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셈케이 May 01. 2024

15 순간의 힘이 또 살아가게 해



 오빠는 나보다 두 살 위, 정확히는 2년 7개월 먼저 태어났다. 고작 5살이 소독차를 따라 뛰다 넘어지자 7살은 선두로 달리다 넘어진 5살을 발견하고 뒤돌아 뛰어왔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줬다.


 물감이 갖고 싶다고 문방구에서 조르자 엄마는 그런 나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미 집에 한가득 있다는 걸 알기에. 그러나 갖고 싶었고 못내 서러워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울었다.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 물감과 크레파스가 새로이 놓여있었다. 저금통 탈탈 털어 7살, 오빠가 사준 내 기억 속 첫 선물이었다.


 오빠는 늘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고 그가 만나는,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진심을 다하는 참 멋진 남자다. 군대를 제대하고는 부모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게 하던 그와 같은 서울에 살면서 서로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다지 자주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불쑥 저녁을 먹자고 했다. 먹고 싶다던 전골을 배불리 먹이고 내가 자주 가는 바에 데려가 즐겨마시는 위스키를 건네줬다. 그는 맛있게 마시고 계산을 하며 말했다.


 “동생이 오반을 즐겨 마신다네요. 두 잔 더해서 미리 계산해 주세요. 좋은 날 와서 마시도록요.”


 웃음이 튀어나왔는데 이상하리만큼 코끝이 찡해졌다. 역까지 데려다준다는 내 말을 고사하고 그는 집까지 데려다주고 문 앞에서 또 말했다.


 “늘 곁에 가족이 있다는 거 잊지 마. 사랑한다. 동생.”


 오빠가 멀어지자 마음이 멍해졌다. 요 근래 회사가 힘들다던 내 말에, 그 말에 왔다는 걸 잘 알면서 끝끝내 씩씩한 척만 했다. 그래도 그는 알고 있었을 거다. 나답게 잘 버티고 있을 거란 믿음으로 말이다. 그는

나 못지않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 한 이야기. 프로포즈 목걸이를 같이 골라준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이야기. 어버이날 어떤 이벤트를 함께 준비할지 고민의 이야기. 돈에 휩쓸리지 말고 사람 도리 할 만큼만,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분수껏 벌고 쓰며 살면 된다는 이야기.내 동생은 참 뜬금없는 곳에서 어른스럽다며 간지럽게 칭찬섞인 이야기. 어떤 삶을 살아도 늘 곁에 서로가 있음에 감사하자는 이야기. 그 무수한 이야기들 사이사이 오늘 하루 나의 고됨과 노여움과 억울함이 희석되어 버렸다. 또 가족의 힘을 빌린 셈이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의 힘을.



 기분 좋게 씻고 누워 인센스에 불을 붙이자 고교 동창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원서를 도와 써줬고 군 휴가 나왔을 땐 알바로 번 돈으로 무려 10만원어치 고기를 사 먹였고 결혼식을 한다며 별안간 연락해 와 축의를 하니 바로 해외로 튀어 한동안 감감무소식이던 무정했던 녀석이 이토록 늦은 시간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자냐?”


 그는 기분 좋게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는데 내 생각이 났다며 운을 띄웠다. 행복한 순간 늘 함께해 줘서 고마웠는데 소홀했었다며. 그때는 너무 어렸다며.


 “취했으면 곱게 집에나 가. 웬 청승?”

 “진심이야!”


 반가우면서도 괘씸했다. 연락이 두절된 후 지인의 장례식에서 몇 번 봤지만 그때도 미처 하지 않던 말을 이제야 하던 그였다. 그것도 뜬금없는 이 늦은

밤에.


 “나 사실 처음 말하는데.. 아빠 된다! “

 “진짜? 진짜야? 축하해! 와 진짜 너무 축하해!”


 참 재밌다. 그 소식에 일말의 서러움이 씻겨 내려갔다. 기분 좋게 술 마시고,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그런 친구의 진심 하나만으로, 사랑스러운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소중한 이유 하나만으로, 와이프는 아직 쉬쉬하랬지만 너무 기뻐 누구한테라도 먼저 말하고 싶었던 철부지 천진난만함 그 하나만으로 모든 게 괜찮아졌다. 벅차올랐다.



 많이 힘든 하루였다. 웃으면서 편하게들 과한 업무를 더해주는 사람들이 얄궂고 미운 참 고된 하루였다. 하루의 시작은 그러했는데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오빠의 따스한 진심과, 애송이 같은 동창의 기쁜 소식에 나는 그 어느 날보다 행복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누워 이 글을 써본다.


 인생, 참 재밌다. 별거 아닌 하루에서 찰나의 순간으로 엄청난 하루가 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너덜거리다가도 꽤 의미 있는 사람이구나 제 모양을 다시금 선명히 새기는 때도 있다. 그래서 또 한 번 용기 내어

아침을 맞이할 이유들이 생긴다.


 그래서 이따금씩 그러한 존재들로 참 감사하다. 그 순간들이 참 고맙다.


매거진의 이전글 14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