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가도 단 한 명에게 모든 걸 들키고 싶었을지 모른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저 와달라던 그녀의 연락에 가겠다고 답했다. 2일장 내내 부의금을 내는 자리에 앉아 조문객들을 맞이했고 혹여나 향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시선을 두며 때때로 새로이 꽂았다. 양가 조부모 모두 묘에 모셔 화장을 처음 경함한 날이었다. 더 이상 아빠가 없다며 연신 울어대는 친구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함께 울어주는 것 빼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마저도 미안했다. 감히 그 슬픔을 이해한다 말할 수 없었다.
60여 년을 달려도 하얀 가루가 되는 데 단 2시간뿐이었다. 치열했던 삶을 뒤로하고 고요한 흩어짐이 되는 건 그다지 치열한 일이 아니었다. 막연히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죽음은 그러했다. 죽음은 그저 침묵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울부짖음이 더 깊고 날카롭게 내 귀와 마음에 꽂혔는지도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죽음이 처음이었다. 사회생활하며 다양한 관계의 장례식에 갔지만 이만큼 슬프고 아팠던 적은 없었다. 여린 그녀의 어깨를 쥐고 물을 먹이고 마음을 다독이자 어느새 주말이 왔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퇴사하길 잘했다. 온전히 네 곁에서 함께 슬퍼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참아왔던 서러움이 삐져나왔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내 삶에 누적해 온 무기력함이 슬픔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달리는가. 기차는 목적지를 알고 달리지만 우린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가. 그 끝이 침묵인데 말이다.
집에 돌아와 전화로 엄마에게 안부를 전하고 난 뒤 침대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삶이 버겁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 누구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진정 삶이 버거웠다. 땅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친구 아버지를 보며 나를 투영했다. 언젠가 나도 낱낱이 흩어지는 가루가 되어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겠구나. 나는 왜 고통받았을까. 꾸역꾸역 당신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너니까 해낼 수 있다며 쥐어준 무거운 일을 받아내며, 그래서 다음 과정은 무엇이냐 재촉하는 질문에 웃어 보이며. 어차피 우리 모두 저항 없이 스며들 자연일 뿐인 것을.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싶었다. 걸음 하나하나에 무거운 의미의 추를 미처 달지 않아도 걷는 그 찰나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왜 스스로를 다독이지 못했을까.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날도 있을 수 있다고 응원하지 못했을까. 마음에 까만 재가 가득해졌다.
그렇게 못나게도 여러 사람들을 탓하고 나면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들의 잘못은 없다. 내 무기력함에 일할 보태지 않은 그들을 미워할 필요 없다. 웃어 보인 것도, 견뎌낸것도 오직 나였다. 그래서 다시금 살아내려 하는 것도 분명히 나여야 한다. 누굴 위해서가 아닌 나, 나 자신을 위해.
혹시나 내가 죽게 된다면 나는 제주 세화해변에 뿌려지고 싶단 생각을 스쳐했다. 물론 바다에 뿌리는 것이 허가되진 않겠지만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다. 가장 열정적이고 뜨거웠던 그때의 내가 살아 숨 쉬는 곳, 세화에서 삶을 마무리해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렇다. 그저 생각일 뿐이다.
책을 잡히는 대로 읽었고 시간 내어 포트폴리오도 정리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전 직장 선배를 통해 프리랜서로 잠시 일을 받아하게 되었다. 큰 규모의 브랜드라 페이도 적지 않았고 새로운 브랜드와의 업무는 내게 잠시 슬펐던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거리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우연으로 평소 좋아하던 브랜드 채용 공고에 이력서를 냈고 정신 차리니 임원면접을 앞두고 있다. 실무면접 때 실장이 내게 말했다.
"포트폴리오 감도가 너무 마음에 드네요. 딱 이 정도의 감도로만 작업해 주면 우린 충분합니다."
너무 오랜만이었다. 충분하다는 말.
물론 진짜 팀원이 되면 그녀는 내게 많은 걸 바랄지 모른다. 그래도 내게 더 나은 이상이 아닌 충분하다라 말해주는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만났다. 참 별거 아닌 말에 가슴이 콕콕 쑤셨다. 비록 끝 말에 '디자이너가 야근을 안 하는 게 말이 되나요?'라는 괴상스러운 말을 더했지만 그때 무언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치열한 게 싫었던 게 아니라 의미 있게 치열하고 싶었던 것일까? 변태스럽고도 변덕스러운 감정이 교차했다.
종종 지인들이 말한다. 셈케이 넌 이직도 참 잘하고 삶이 순탄해. 고마웠다 그렇게 바라봐줘서. 그리고 동시에 넌 날 잘 모르는구나 악의 없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토록 치열하게 나아가고 있음을 알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왕 이른 이직을 한다면 돈이라도 더 받자라는 마음에 직급도 높이고 희망연봉도 적지 않게 적어 메일 회신을 보냈다. 이제 남은 건 그들의 선택이다. 충분한 날 채용할지, 내게 더한 자유를 줄지.
그녀는 엄마와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돌아오면 그녀의 슬픔이 조금은 씻겨져 있길 바라며 나는 또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무기력을 친구 삼아 말이다. 어쩌면 내가 죽는 날 끝까지 내 곁을 지켜 줄 존재는 자질구레한 나의 잡념과 무기력이 아닐까 또 잠시 생각했다.
오늘도 살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