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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Jun 20. 2022

지금까지 먹어본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글쓰기 좋은 주제 642, 45번째

 그래. 여행 전부터 이탈리아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말은 참 많이도 들었다. 근데 그 소매치기가 나한테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어쩌면 난 이탈리아에 있는 소매치기들보다 가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아 겨우 오게 된 이탈리아. 난 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소매치기에게 당하고 말았다. 언제, 어떻게,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게 가방 깊게 꽂아 넣은 현금 뭉텅이가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 여권은 숙소에 보관 중이었고, 며칠 뒤면 부모님이 카드에 돈을 넣어주기로 했으므로 며칠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주머니에 따로 보관하고 있던 50유로쯤이었다. 로마까지 가는 기차표도 구하기가 어려운 돈. 그때부터 난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한국에서 내가 원하는 뭔가를 포기하는 것은 참 익숙한 일이었는데,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와서 먹어보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뭔가 더 가혹한 일이었다.


 내 참담한 심정과 달리 피렌체 두오모 광장은 활기차고 따뜻했다. 거리에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나가는 관광객을 붙잡고 호객행위를 했다.   

두오모 광장

 내가 그림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지, 광장의 화가들은 나에게는 통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화가가 나에게, "시뇨리나" 하고 말을 걸었다. 나를 부른 뒤에 나에게 한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눈치를 보니 돈을 내고 초상화를 그리라는 것 같았다.


 초상화? 나도 한 번쯤 그려보고 싶었다. 더욱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만난 화가가 그려주는 초상화라면 더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는 판국에 그림을 그려댈 상황이 아니었다.


 손짓과 발짓을 동원해서 내 뜻을 전했다. 

 "I would love to... but I don't have money. Someone... Italian... pickpocket..." 

 대충, 나도 그림 그리고 싶은데 이탈리아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내 의사표시를 전달했다. 그 화가는 말뜻을 이해했는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림을 "for free"로 그려준다며 이탈리아에서 그런 일을 당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날 작은 간이의자로 안내했다. 누군가에게 공짜로 호의를 받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이건 내가 이탈리아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낭만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Thank you"라고 말하고 그 간이의자에 덥석 앉았다. 


 그 화가는 자신의 이름을 마르코라고 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화가는 자신의 동생 마테오라고 소개했다. 마테오도 어떤 남자 손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곁눈질로 보아하니 그 손님의 머리는 검은색이었고, 얼굴을 보지 못해서 정확히 어떤 나라 사람인지는 몰라도 아시아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테오의 손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그의 입에서 나온 한국어가 반가워서 난 고개를 돌렸다. "어? 한국사람이에요?"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고, 뭔가 신기한 듯 서로를 향해 웃었다. 마르코와 마테오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말라면서도, "둘이 같은 나라에서 온 거야?" 라며 신기해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난 다시 내 앞에 있는 마르코를 쳐다봤지만, 뭔가 신경은 내 옆에 있는 한국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말을 걸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결국 난 되지도 않는 복화술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이탈리아에 언제 오셨어요?"


 내 복화술에 화답하듯, 그도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듯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며칠 전에 왔어요. 전 내일 로마로 가요. 그쪽은요?"

 "저는, 며칠 남았는데 얼마 전에 소매치기를 당해 가지고..."


 난 그에게 소매치기를 당한 억울한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요? 그럼 제가 돈 빌려줄게요."


 선뜻 돈을 빌려준다는 그의 말에, 난 또다시 마르코의 지시사항을 어기고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진짜요?"

 내가 그쪽을 쳐다본 것이 느껴졌는지 그도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다. "네, 진짜요."


 은인을 만났다 싶었다. 우리의 초상화는 비슷한 시간에 끝났다. 우린 우리의 초상화를 그려준 마르코, 마테오 형제와 인사를 나눴고, 그냥 그 광장을 걷기 시작했다. 서로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초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근데 초상화보다 실물이 더 예쁜 것 같아요. 그쪽은."

 "아 진짜요?"


 그의 칭찬이 당황스러워서 "진짜요?"라고 묻자, 그는 크게 웃었다. 내가 말할 때 '진짜요'라는 말을 진짜 많이 쓴다나 뭐라나...


 "아 맞다, 소매치기당했다고 했죠? 그럼 저기서 아이스크림은 먹어봤어요? 여기 며칠 있으면서 여러 군데 가봤는데 저기가 제일 맛있거든요."

 "아... 저 밥도 잘 못 먹고 다녀가지고 아이스크림은... 못 먹어봤는데..."


 아이스크림을 못 먹어봤다는 말에 그는 나를 한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려갔다. 내 손에는 내가 그려진 종이 한 장. 그의 손에는 그가 그려진 종이 한 장. 우린 그렇게 우리가 새겨진 종이 한 장씩을 들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걸어갔다.


 그는 익숙한 듯 아이스크림을 주문했고, 두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나를 보고 웃었다.

 "이건 그냥 내가 사줄게요. 이게 진짜 맛있는 맛이에요."

 "감사합니다."


 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내 반응이 궁금한지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계속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통유리에 들어오는 햇살은 환했고, 가게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이야기 소리는 점점 웅얼거림으로 변했다. 그는 내 앞에서 계속 웃고 있고, 나는 또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당근을 통해 글쓰기 모임을 모집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일곱 분 정도가 모여서, 글쓰기 좋은 주제 642라는 책에서, 원하는 주제를 골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제가 고른 주제는 <지금까지 먹어본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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