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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Jun 26. 2022

회사에서 울어대던 여자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58번째 : 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팀장 : 은영씨, 잠깐 회의실에서 커피나 한 잔 할까?


 잠깐 커피나 하자는 팀장님의 호출. 난 그 호출이 썩 반갑지 않았다. 정말 팀장이 나랑 커피 한 잔 하려고 회의실로 부르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 난 어제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퇴근 전, 김과장과 팀장은 뭔가에 대해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과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날 나를 따로 호출한다는 건, 분명 불길한 징조였다. 김과장은 우리팀 빌런 중 빌런이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원래는 무지하게 똑똑하다는데(사실 나도 그가 똑똑하다는 것은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비상하다는 느낌?) 그 좋은 머리를 일하는 데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좋은 머리를 이런 데에 사용했다.

 1. 본인이 최대한 편하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2. 본인이 맡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 있도록

 3. 자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팀장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도록


 어제는 김과장이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된 날이었다. 하필 그날 김과장과 팀장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날 팀장이 나를 따로 부른다? 김과장이 뭔가 수를 썼을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왔다. 회의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 : 팀장님, 여기...커피...

팀장 : 요즘 일은 어때? 괜찮아? 이제 은영씨가...입사한 지가 한 6개월 정도 됐나?

나 : 네. 그 정도 됐습니다. 

팀장 : 바쁘지? 은영씨가 나이가 24살이랬나? 아직 친구들은 취업 많이 못했지? 부모님이 많이 자랑스러워하시겠다. 요즘 대기업 들어오기 힘들잖아.

나 : 네...


 내가 이 팀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물어봤던 내 나이, 친구들은 취업을 많이 못했는지 여부를 또다시 묻는 팀장.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본론일 리 없었다.


팀장 :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우리팀으로 새로 사업 하나 넘어온 거 있잖아?


 역시. 이제부터 본론 시작. 이럴 줄 알았다. 지난주쯤, 부서 간 업무 조정을 하면서 우리팀은 새로 사업을 하나 받게 되었다. 사업을 하나 받게 된다고 해서 인원을 추가로 더 데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일이 하나 더 생겨버린 것이다. (아마 우리 팀장이 팀장치고 좀 어린 탓에 협상 테이블에서 밀린 듯했다.) 

 팀장은, 그 일을 우리팀 최선임자인 김과장에게 맡겼다. 실제로 우리팀에서 김과장의 업무량이 제일 적기도 했고. 


나 : 아 그 김과장님이 맡기로 한 그 일이요?

팀장 : 어, 그지. 근데 내가 어제 김과장님이랑 얘기를 좀 해봤어. 새로 시작하는 일을 신입한테 맡기면 배우는 것도 많고,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은영씨도 이제 큰 일도 새로 해봐야지.


 내 기준에 난 이미 김과장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또 큰일이 생긴다는 건 정말 말 그대로 큰 일이었다. 디제스터. 재앙이었다. 여기서 내 의견 피력을 제대로 못하면 난 그냥 이 일을 맡게 돼버릴 것이다.  


나 : 팀장님...근데...이미 전...


'이미 전 많은 일을 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팀 업무분장표만 보셔도, 그 일은 김과장님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선배들에게 일이 너무 과중하게 몰려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팀장 : 아, 은영씨 울지 말고. 이거 별로 어려운 일 아니야. 그리고 어려운 일 있으면 김과장이나 나한테 말하면 다 도와줄 거고.

나 : 진짜 팀장님...헠..흨..흨.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일 맡았는데, 실제로 김과장님이 도와주시는 것도 없었고 제가 담당이니까 제가 해야 된다고만 하시던데... 여기서 더 맡는 건 무리인 것 같아요. 저 정말 지난주에는 거의 새벽에 퇴근했다고요.'라고 말해야 되는데...


 눈물은 더 많이 오기 시작했고, 숨이 찰 정도로 엉엉 대기 시작했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이 제대로 말이 안 나오고, 나 스스로 내가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이렇게 질질 짜면 앞으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의견을 제대로 말하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습을 보는 팀장은 나를 과연 제대로 된 직장인으로 봐줄 수 있을까?


 눈물을 멈추고 싶어도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6개월 동안 참은 눈물이 다 흐르는 것 같았다. 야근 수당도 없이 신입사원급 몇 명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 일했고, 김과장은 그 사이 중요한 업무에서는 멀리 떨어져 지냈다. 그러면서도 신기하게도 팀장의 신뢰를 얻고, 상반기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난 팀장과 과장의 성별이 서로 달랐다면, 불륜커플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팀장 : 24살에 회사생활하는 게 많이 힘들지? 어쨌든...마음 추스리고, 은영씨가 추가적으로 맡게 되는 일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 일단 메일로 공유해줄게. 응? 마음 추스르고? 먼저 나갈게?


 역시. 이런 협상 테이블에서는 이렇게 울어대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었다. 난 억울함과 분노를 이성적인 워딩으로 표현하는 대신 울어재껴버렸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억울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차올랐는데, 도대체 이 고질병을 언제쯤 고칠 수 있을까? 


 24살 정도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난 여전히 바보처럼 울어대고 말았다. 내가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2013년 7월 9일 화요일




 당근 마켓에 내놓을 물건을 찾아보느라 혼자 대청소를 하다 9년 전에 쓴 일기를 보게 되었다. 회사에서 이렇게 엉엉거리고 울었다니. 진짜 나도 골 때리는 직원이었다. 여직원들 얼굴에 먹칠이라는 먹칠은 다 하고 다녔네. 


 서른세 살이 된 지금. 난 그렇게 힘들어하던 회사를 아직도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과장으로 진급까지 했다. 내 성씨도 김 씨여서, 나도 '김 과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김과장이 된 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솔직히 나올 눈물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2013년, 난 그때 엄청 억울해하면서도 결국 그 새로운 사업을 맡았다. 화가 나는 한편, 그 일을 맡아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괜히 안 한다고 버티다가는 내 이미지가 괜히 안 좋아질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호구처럼 몇 년 지내다 보니, 회사에서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과장으로 승진시켜줬다. 그동안 내가 일을 무척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내가 퇴사하면 나보다 회사가 손해라는 오만한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내가 퇴사해도 회사에 지장 가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난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화나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 : 진짜, 이건 차장님이 하셔야 돼요~ 다른 사람들은 일 진짜 많단 말이에요~ 진짜 이건 넘기면 말도 안 된다. 진짜. 네?

 

 그 사이 차장이 된 '김과장'. 신기하게도 그는 아직도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심지어 아직도 나와 같은 팀이었다. 예전엔 그렇게 똑똑해 보이더니, 이젠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회사 짬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가 일을 너무 안 하다 보니 퇴화가 되어 버린 걸 수도 있고.


김차장 : 은영씨, 이걸 굳이 내가 맡을 필요가 있나?

나 : 아우, 차장님. 저 과장된 지가 언젠데 계속 은영 씨예요. 대리였을 때는 그렇다고 쳐도 저도 후배들이 지금 수두룩 빽빽인데 김과장이라고 좀 해주세요~ 


 날 선 대화가 오고 갔지만 난 웃고 있었다. 나는 그때처럼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당근을 통해 글쓰기 모임을 모집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일곱 분 정도가 모여서, 글쓰기 좋은 주제 642라는 책에서, 원하는 주제를 골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제가 고른 주제는 <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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