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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Apr 02. 2023

밤 11시 받는 계약 종료 통보, 확실한 을로 살기

밤 11시에 날아든 슬픈 소식

 금요일 밤 11시. 왜였을까? 갑자기 뭔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난 gmail앱을 켜 새로고침 버튼을 클릭했다. 뭔가 새로운 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의 제목은... [BIGHAND company] 계약 관련 메일

 

 불과 3분 전에 보낸 메일이었다. 왜 이 시간에 메일을 보낸 걸까? 그것도 계약 같은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메일을? 찰나의 고민을 지나 메일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BIGHAND 김 OO 본부장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며, 개인적으로도 아쉬운 마음입니다.

 

 전형적인 탈락 메시지의 인트로였다. 이런 젠장... 탈락/이별/불합격/계약종료 등 온갖 불길한 내용의 인트로에 자주 언급되는 '아쉬운 마음', '유감' 등등의 단어를 보자마자 난 맥이 탁 풀려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몇 주 전 토요일. 난 한창 고객사용 PT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재계약하겠지? 설마 안 하진 않겠지? 내가 맡고 나서 실적이 계속 좋아졌는데... 납품 품질도 그렇고 단가도 저렴하게 했고... 또 수량도 엄청 쳤고... 그지?'

 

  PT를 만들고 있으면서도 문득 '설마'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기분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월요일에 우리 회사 최대 큰손 'Bighand' 앞에서 재계약을 위한 PT를 성공적으로 해내야만 했다. 


 BIGHAND에서 하는 이 프로젝트는 몇 가지 치명적인 이유로 업계에서는 저승사자 그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일단 고객사가 무지하게 까다로웠다. 예시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도 이게 오류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세세한 것들까지 잡아냈다. 세부 가이드 분량도 어마어마했다. 한 800장 정도 되었는데, 너무 많아서 고객사에서도 그 기준을 잊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그 가이드가 주 단위로 변경되어서 프로젝트 진행은 정말 혼돈의 카오스였다.)


 그럼에도 이 고객사를 놓칠 수 없었던 건 딱 하나. 돈 때문이었다. 업계에서 유래 없을 정도로 프로젝트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던 동료는 아무리 큰 손이라고 해도 더 이상 이런 프로젝트를 담당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 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투입된 것이 바로 나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를 참 칭찬하고 싶은데) 내가 투입된 이후에 프로젝트는 안정 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아웃풋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몇 차례 재계약에도 성공했고, 이번은 또 재계약 시즌이었다.


 그렇게 월요일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그러다 월요일, 난 고객사 앞에서 나름 멋진 발표를 해냈고 그 자리에서 악수까지 하며 재계약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마치 대행사의 고아인 상무가 된 기분이었다. 그 기쁜 소식을 회사에 전달했을 때,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BIGHAND company] 계약 진행 관련 메일 이런 개떡 같은 메일이 오다니 무슨 날벼락인가! 생각해 보니까 헛웃음만 나왔다.


1. 이럴 거면 PT를 왜 시켰으며,

2. PT 후 재계약하자고 악수는 왜 했으며, (심지어 프로젝트가 확대될 거라면서 준비를 잘해달라고 했다.)

3. 그 뒤 몇 주 동안 계약서 초안도 오고 갔는데, 그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4. 그리고 최소한 이런 건 전화로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필 금요일 밤 11시라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 시간에 냅다 Bighand의 김 oo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로 고객사에게 이런 결례를 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몇 분 전에 이런 메일을 보냈는데 아직 잠들진 않았겠지. 연결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뭔지 모를 배신감, 막막함 같은 감정이 커져갔다.


고객사 김본부장 - 네, 여보세요.
나 - 아, 본부장님~^^ 너무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방금 보내신 메일 보고 연락 드렸는데, 통화 괜찮으세요?


 막상 전화가 연결되자 내 목소리 톤은 한 없이 올라갔다. 


김본부장 - 많이 놀라셨죠. 저희도 정말 죄송하네요. 근데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저희도 고객사한테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아서...어쩔 수가 없이


 김본부장은 bighand의 사정을 제법 면밀히 설명해 주었다. 요즘 업계 자체가 쪼그라들고 있는 판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으며, 정말로 계약 연장할 생각이었으나 본인들의 고객사 때문에 어쩔 수 없다나 뭐라나... 그 야심한 밤. 난 그와 30분가량을 통화했다. 


 '본부장님, 그래도 상황 괜찮아지시면 꼭 연락 주세요.'라는 애절함과 친절이 섞인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통화가 종료되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로젝트를 운영해 온 것도, PT를 열심히 준비한 것도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제 뒷수습만이 남았다.


1. 회사 주 수입원이 끊기게 생겼으니, 당장 대표님께 보고를 해야 했고

2. 팀 MBO 설정을 다시 해야 하고

3. 이 프로젝트가 연장되면 계약이 연장되었을 수십 명의 인력에게 갑작스러운 계약 종료 통보를 해야 했으며,

4. 프로젝트 관련 프리랜서 계약직 수백 명에게도 이런 상황을 안내해야 했다.


 난 금요일 밤 11시에 고객사로부터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고, 그다음 주 월요일에 계약직 직원들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화요일에는 프리랜서 수백 명에게 계약 연장이 없음을 안내했다. 참 힘든 과정이었다.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전화해서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말씀드리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밤 11시에 받은 그 메일. 나도 참 힘들었는데, 이쯤 되니 내가 힘든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Bighand는 지네 고객사한테 계약 종료 안내를 몇 시 쯤 받았으려나? 한 9시에는 받았으려나. 


이미지 출처 : 치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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