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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Jun 03. 2024

동네 여행

행복이 안 보인다면 내가 밟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정자를 발견했다. 자주 지나다니던 길이었는데 이번에야 눈에 들어왔다.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으면서 적당히 나무들에 가려져 대놓고 드러나지도 않은 곳이었다. 날씨가 더웠지만 그들이 져있어 시원해 보였다. 딱 책 읽기 좋아 보이는 곳이라 마음에 담아놨다.


요 며칠 마음이 제멋대로 시간여행을 했다. 과거로 가서 후회를 하거나 미래로 가서 닥치지도 않은 일을 불안해했다. 명상을 하면서 멀리 떠나버린 마음을 자꾸 현재로 데려오려고 노력했다.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한동안은 딱 달라붙어있던 마음이 이번엔 잘 따라와 주지를 않아서 좀 지쳐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주말이 됐다. 강박적으로 나를 돌보던 보호자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하자고 태도를 바꿔봤다. 


잠을 못 자 포도막염이 재발한 게 몇 주째인데 그러느라 입에 대지도 않았던 바닐라 라떼를 사 왔다. 몸에 쌓인 염증을 빼겠다며 식단도 최대한 엄격히 관리했지만 그 강박도 버렸다. 슈퍼에 들러 먹고 싶던 과자도 잔뜩 골랐다. 막상 가득 올려놓고 보니 물려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마신 커피는 시원하면서 달았고 하지 말라며 나를 억누르기만 하다 조금 풀어주니 마음은 편했다.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온 책도 여유 있게 읽었다.


과자는 적당히 먹었지만 풀어주는 김에 쌀국수까지 야무지게 시켜 먹었더니 배가 빵빵해졌다. 이 지경까지 먹었어! 나를 탓하는 대신 소화시킬 겸 산책을 나갔다. 날이 덥긴 해도 그늘진 곳으로 걸어 다니니 생각보단 괜찮았다. 운동으로 열심히 체력을 끌어올린 덕분에 컨디션도 괜찮았다. 왕복 40분 정도를 걷고 집에 다다랐는데도 체력이 남았다. 아까 봐둔 정자에 가고 싶었다.


집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셨던 컵을 씻어 그 안에 카모마일 티를 담았다. 냉동실에 넣어둔 초콜릿도 챙기고 소설 하나 에세이 하나를 골라 가방에 넣었다. 혹시나 정자에 사람이 있으려나 슬금슬금 걸어갔는데 다행히 좀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한 명만 있었다. 본격적으로 정자에 가방을 두고서 책을 펼쳤다. 마침 돗자리도 깔려있어 피크닉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위치한 곳이라 너무 시끄러우면 이어폰을 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가까운 놀이터에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빌려온 소설은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대담한 글이었지만 모두 한데 어우러져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평소 자주 보던 길, 집에서 걸으면 1분 이내 도착할 수 있는 장소인데도 꼭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아주 익숙한 곳에서 이만큼의 낯섦을 느끼는 감각이 신선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도 충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단편 소설 하나를 다 읽고 더 머물고 싶었지만 흡연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해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놀이터 한복판에 위치한 정자였다. 정자도 세 개가 붙어있어 아까 있던 곳보다 크기도 더 크고 확 트인 곳이었다. 에세이를 꺼내 읽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도 동네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만나기로 한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걸까? 할머니들이 모이며 대화를 시작했다. asmr처럼 듣고 있는데 곧 어린이들도 정자에 모였다. 어떤 놀이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저기 책 읽는 분도 계시잖아.” 나를 지칭하는 소리가 너무 공손해서 왠지 민망했다. 자리를 비켜줄까 싶어 슬쩍 고개 들었다. 다행히 나가라는 눈치는 주지 않아서 그냥 그 자리에 머물렀다. 


어린이들은 찐드기 라는 놀이를 시작했다. (발음이 정확히 된소리였다.) 나도 초등학생 때 비슷한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났다. 기둥을 하나씩 차지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찐드기! 라고 외치는, 지금 보면 이게 재밌을까 의문이 드는 놀이였다. 아이들은 배려심 있게 내가 기댄 기둥을 제외하고 정자를 뛰어다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의 진동이 느껴져 책에 집중하기는 어려웠지만 아이들 속에 내가 하나의 기둥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느낌이 좋았다. 


어린이들은 그네에 빈자리가 생기자 미련 없이 정자를 떠났다. 어느새 할머니들은 열 분 정도 모여계셨다. 초콜릿을 꺼내 한 조각 부셔서 까드득 씹어먹었다. 하루종일 배를 채워서 여전히 배는 불렀지만 달콤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온전히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엄청 대단한 걸 한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몇 달 동안 행복해지고 싶어 더 불행함을 느꼈던 게 허무했다. 


행복하기 위해선, 하루하루 즐겁기 위해선 대단하지 않아야 하나보다. 엄청난 행복의 조건들을 하나하나 맞춰서 행복해지려면 그 항목을 채우다가 지치고 만다. 사실 즐거움이라는 건, 현재를 느낀다는 건 지금 당장 쥐고 있는 좋아하는 것들의 조합일 텐데. 내가 좋아하는 책, 먹고 싶은 음식,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 주변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다. 가진 것들이 너무 익숙해지면 행복을 코앞에 두고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거 같다. 주말 동안 내가 밟고 있던 행복을 다시 찾아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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