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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Nov 14. 2023

시.지.사.(1)

 김 부장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새벽 6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전역의 초겨울 새벽 공기는 차가왔고 주변은 아직 한산했다. 

 어제 1박2일로 대전에 출장을 내려온 김 부장은 오전에 대전 청사의 조달청에서 자사 제품의 우수 조달제품 등록을 위한 PT발표를 마치고 오후에는 기계연구원에 들러 현재 자사가 개발하고 있는 정수장치의 개발 진척도를 확인했다. 회사는 산간 오지나 물이 부족한 나라들에서 이용할 수 있는 정수처리제품을 개발하고 있었고 그 제품의 핵심부품이라 할 수 있는 필터장치는 기계연구원에 외주 의뢰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기계연구원의 책임연구원, 한 박사로부터 개발 진척도를 세세하게 보고받고 샘플로 제작된 파일롯 부품을 확인했다. 제품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김 부장은 개발 일정을 더 서둘러줄 것을 요청했다. 

 저녁에는 그간 회사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전 소재 연구기관의 지인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김 부장은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었지만, 저녁에 만나는 이 지역 연구원들은 회사의 지속적인 제품개발을 위해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출장계획을 세울 때부터 늦게까지 남기로 계획을 세우고 서울 복귀 일정을 다음날 아침으로 잡았다. 

 예상대로 어제의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김 부장은 내년 상반기 정부과제 공모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회사는 내년 상반기에 정부에서 진행하는 개발과제 공모를 신청할 계획을 갖고 있었고 공모에 선정되면 막대한 개발자금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다. 개발 제품의 컨셉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연구원들에게 흘렸고 그들에게서 연구 협업을 약속받았다. 밤 12시가 다 되어 연구원들에게 택시를 잡아주고 나서야 대전출장 일정이 종료되었다. 

 김 부장이 아니라면 하루간의 출장일정으로는 끝내기 어려운 업무들을 깔끔하게 모두 처리하고 주변의 모텔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기차를 타기 위해 대전역에 나온 것이었다.  

 대전역에서 6시10분에 출발하여 서울역에 도착하는 KTX를 타기까지는 10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침을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주변을 둘러보다 커피샵을 발견하고 시간을 계산했다. 커피를 먼저 주문하고 화장실을 들러 볼일을 마치고 주문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면 5분정도 소요될 것이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시간 3분. 승차해서 2분 정도 숨을 고르면 딱 떨어질 만한 시간이었다. 화장실을 먼저 들르고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를 준비하는 대기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시간을 손해 볼 수 있다. 김 부장은 커피를 먼저 주문하고 화장실엘 들렀다. 볼일을 마치고 커피 한잔을 픽업하니 예상대로 5분이 남았다. 김 부장은 여유롭게 플랫폼으로 내려가 승차했다. 

 KTX는 정해진 출발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어 출발하는 점이 좋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도착시간의 오차도 크지 않아 출장 동선을 계획하기에 편리했다. 서울역엔 7시10분쯤 도착할 것이고 도착하여 도보로 5분정도 이동하여 전철을 타면 가산디지털 단지에 있는 회사까지는 8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김 부장은 회사 출근시간인 9시보다 항상 1시간 일찍 출근하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출장지에서 회사로 바로 출근하는 경우엔 출근시간보다 좀 늦게 10시까지 출근해도 무방했지만 김 부장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정해놓은 시간 원칙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김 부장이 몸담고 있는 회사는 정수기를 주력제품으로 생산하는 회사로 매출 1000억 정도를 하는 중견기업이다. 김 부장은 R&D 부서의 제품개발 팀장으로 신제품의 개발부터 시장에 론칭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른 나이에 부장을 달았고 내년에는 임원급인 연구소장으로 승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비자의 구매 니즈를 파악하는 데에 귀신같은 재주가 있었고 작년에는 소형화한 정수기를 출시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신제품 출시는 타이밍이 생명인데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는 제품개발이 계획된 일정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김 부장은 대학 및 연구기관의 연구원들과 폭넓은 네트워킹을 하고 있어서 회사가 자체개발하기에 역량과 시간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아웃소싱을 활용할 줄 알았다. 제품 설계가 완료되어 시제품을 제작할 때에는 본사가 위치한 가산 디지탈 단지에서 공장이 있는 화성까지 하루에 두 번 이상을 왕래하며 일정관리를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고로 신제품은 제때에 출시되었고 회사에 역대급의 수익을 안겼다. 김 부장의 철저한 시간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사 내에서는 이러한 김 부장을 시지사라는 별병으로 불렀다. 간을 배한 나이, 시지사.      


 예상대로 8시 정각에 회사 출입문을 통과했다. 1층 로비에서 간단한 아침 요깃거리를 사서 5층에 위치한 R&D 센터 사무실로 올라왔다. 외투를 걸고 자신의 자리에 앉은 김 부장은 컴퓨터를 부팅했다. 바탕화면에 달력화면이 떴고 요일마다 그 날 할 일이 빼곡하게 타임별로 채워져 있었다. 김 부장은 오늘 할 일을 한번 훑고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오늘의 일정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퇴근시간을 넘어서 저녁 6시 이후의 타임라인은 적혀있지 않았다. 사실 김 부장은 퇴근 시간 이후의 일정에는 철저하지 않았다. 아니 완전 방관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회사에 들어서는 시간부터 퇴근하기까지의 시간은 철저한 시.지.사.였지만 그 이외의 시간은 무대책 사나이였던 것이다. 

 철저한 시간 관리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 주어진 미션에 집중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간 관리를 해야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회사이외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김 부장 정도의 철저한 시간 관리는 인위적으로 작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타고나길 꼼꼼한 성격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꼼꼼한 성격은 사실 일상에 마주하는 매 사건마다 적용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 것이나 이상하게 김 부장은 회사를 떠나면 긴장이 풀리고 시간에 대해 방만한 자세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시간 관리를 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김 부장은 야심가였다. 회사 업무가 자신이 정작 하고 싶은 일과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자기계발서나 주변의 부추김에 동요되는 순진한 인간도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이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기에 모자라지 않았으며 아니 모자란 게 아니고 출중하다고 할 만했기에 남들 보다 월등한 업무실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더해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여 할 수 있는 업무를 극대화한다면 자신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또한 그 확신대로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김 부장은 항상 자신이 맡은 업무를 상사가 정해 준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끝냈으며 한 가지 일을 끝내기 무섭게 다음 일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업무에 정해진 마감 시간에 여유가 있어도 항상 시간에 쫓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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