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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Nov 22. 2023

시.지.사.(완)


 그로부터 며칠 후, 김 부장은 시립대학교의 오 교수와 저녁 약속이 있어 정시 퇴근을 하게 되었다. 약속 장소는 오 교수 집과 가까운 사당역 근처였고 김 부장 집에서도 멀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며 반주로 술을 약간 마실 경우를 예상하고 회사에 차를 두고 지하철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데 항상 정시퇴근하는 인간이 우연히 20미터쯤 앞에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 류빈이었다. 항상 팀장보다 먼저 퇴근하는 저 인간. 김 부장은 아는 척을 하려다 말고 문득 이 친구가 정시퇴근해서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잠시 뒤를 밟아 보기로 했다. 

 류빈은 지하철역을 코앞에 두고 왼쪽 모퉁이를 돌아 첫 번째 5층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김 부장은 좀 떨어져서 걷다가 류빈이 건물 계단을 오르기 위해 건물 현관을 통과하자마자 쏜살같이 따라붙었다. 현관에 막 도착했을 때 류빈은 2층까지 올라갔고 2층 상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막 들어가고 있었다. 김 부장은 뒤쫓기를 멈추고 건물 출입구에서 좀 뒤로 물러나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2층에 붙어 있는 사각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네온사인이 아닌 간판 내부 형광등 빛으로 밝히는 좀 어두운 빛의 노란 간판이었다. 

‘가산 요리학원’ 

요리학원? 칼퇴해서 배우는 게 요리였어? 

김 부장은 약간 허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고 지하철 입구를 향했다.   

   

다음 날 아침, 김 부장은 아침 미팅을 마치고 류빈을 별도의 회의실로 불렀다. 

“커피 마셨어?”

“예...팀장님”

“편히 앉아...지난 번 정수장치 PT는 잘 만들었어...내가 고칠 게 없었어...”

“감사합니다...팀장님”

 김 부장은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변에서 류빈 씨 칭찬하는 얘길 많이 들었어. 일도 잘하고 사무실 분위기도 즐겁게 한다고...근데 내가 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서...사적인 질문인데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무슨 말씀이신지...?”

“...... 류빈 씨는 퇴근하면 주로 무얼 하고 지내는지...아니 회사를 벗어나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해서 그래...뭐...한마디로 말하면, 자네의 시간 관리 방법이 궁금한 거지...”

문책을 하려는 건지 사적인 궁금증인지 애매모호한 표정의 김 부장 얼굴을 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김 부장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다시 말했다.

“.......아 류빈씨를 나무라려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좀 궁금해서 그래,,, 사적인 질문이니까 꼭 대답하지 않아도 돼....단지 자네의 시간관리 방법이 궁금해서 그래...내가 배울 게 없나해서......”

사적인 질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했다.

“...아...네...시간관리 방법이요?... 그거라면 말씀드릴 수 있어요”

 뒤이어 류빈은 자신의 시간관리 방법을 자랑하듯 소상하게 설명했다. 설명하는 내내 밝은 표정이었고 마치 시간 관리 방법을 포교하는 전도사처럼 보였다.

 류빈의 얘기를 듣고 있는 김 부장의 얼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생각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며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대체로 놀라움과 수긍의 표정이었다. 류빈이 설명한 내용은 대체로 이러했다. 

 일단 류빈은 자신의 생활원칙 다섯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일을 의무적으로 하지 않는다.

둘째, 시간에 쫓기어 일 하지 않는다.

셋째, 피로를 느끼면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넷째, 잠은 8시간 이상 충분히 잔다.

다섯째,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섞어서 한다.     

류빈의 생활원칙을 들으며 그간의 회사에서의 그의 생활 모습을 떠오르니 수긍이 갔다. 다만 첫 번째 원칙, 일을 의무적으로 하지 않는다 는 김 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사 일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반문하지 않고 계속해서 류빈의 설명을 들었다. 

  그의 시간 관리 비결은 사실 단순했다. 한마디로 시간의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휴대용 태블릿을 들고 다니며 자신이 보낸 시간을 기록한다. 하루 동안 한 일을 간단히 나열하고 시간과 분을 계산하여 적는 것이 전부였다. 류빈은 태블릿을 꺼내 어제 적어 놓은 메모를 예시로 보여 주었다.

[뜻밖의 뇌과학] 책을 읽음(2시간)

친구 민준에게 이메일 편지(20분)

요리학원 수강(1시간20분)

휴식(10분)

개발 제품 자료조사(3시간)

목공예 유튜브 청취(40분)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류빈에게 있어서는 관심분야의 지식을 쌓는 것), 그런 활동을 기본으로 놓고 나머지 하고 싶은 취미 생활에 대해서도 분 단위로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월, 년 마다 총계를 내어 시간 사용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한다. 어떤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 분석하고, 필요한 일에 시간을 보다 많이 배치함으로써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총량을 증가시킨다.

 설명을 듣고 있던 김 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단지 시간의 가계부를 적는 것만으로 시간 관리가 되는지 약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류빈은 시간 관리 전도사답게 차분하게 사례를 들어가며 이해시켰다. 류빈이 시간 가계부를 통해 1년간 누적한 자신의 활동 시간과 해낸 일들을 설명하자 김 부장은 매우 놀랐다. 과연 조 부장이 말했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퍼포먼스였다. 

 시간 가계부를 적는 방법 외에 류빈이 추가로 알려준 것은 김 부장에게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김 부장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는다거나 시간에 따라 읽는 책 종류를 달리한다거나 하는 방법들이었다. 그러나 김 부장은 시간의 가계부를 적고 있지는 않았다.   

 류빈의 시간 관리 방법을 다 듣고 나자 김 부장은 이 젊은이가 다르게 보였다. 이 친구야말로 진정한 시간 지배자가 아니던가! 놀라움으로 그를 바라봤다. 선생님께 칭찬을 들어 기쁜 내색을 숨길 수 없어하는 학생처럼 류빈은 어깨를 약간 들썩이며 두 손으로 태블릿을 꼭 쥐고 몸을 좌우로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약간 의기양양해 보였다. 

“...류빈 씨 그런데 말야...회사 내에서는 왜 그렇게 여유로운 거지? 그리구 이렇게 시간 관리를 하게 된 동기는 뭘까?”

한참을 전도사에게 은혜받은 신도 표정을 짓고 있던 김 부장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류빈이 입을 열었다.

“사실 팀장님의 지금 질문은 굉장히 사적인 질문인데요...하지만...말씀드릴게요”

사적인 질문에 사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었지만 류빈은 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류빈은 성인이 된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남아 지루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지루함의 개념조차 알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엔 마냥 뛰어 놀기에 바빴고 시간이란 그저 자신에게 맞추어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조건이 자신을 통제하고 의무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할 일이 사라질 때는 지루함과 권태가 찾아왔다. 견디기 힘든 이 지루함은 외로움으로 연결되곤 했다. 류빈은 권태가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지루한 시간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철저히 줄이고 계속해서 어딘가에 몰두하고 있어야 했다. 빽빽하게 짜인 시간은 그로 하여금 몰두해서 일하도록 하고 그로 인해 절약된 잉여 시간은 또 다른 흥밋거리를 즐기고 누리는 데 할애하는 것이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약된 시간을 이용하여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고 취미를 파고든 사람은 그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의 능력을 쌓을 수도 있다. 그러나 류빈이 시간을 관리하는 이유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에게 무위의 시간이 주어져 권태가 찾아오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뿐이다. 그 시간을 자신이 행복해지는 시간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는 효율적인 인생이란 쾌락이라는 행복을 보다 많이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출세나 명예, 돈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과 집착을 어리석게 생각했다.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몫을 자신이 즐기고 관심 있는 것에 최대로 할애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김 부장은 류빈의 이야기를 모두 공감하진 못했지만 숙고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류빈이 왜 회사 내에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시간 관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물었다. 류빈의 시간 관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측면이 있었다. 자신은 회사 내에서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고 퇴근 후에는 엉망이 되는 것과 달리, 류빈은 회사에서는 느굿하게 시간을 보내고 밖에서는 치밀하게 생활하는 것이었다. 

 류빈의 대답은 간단했다. 회사 업무는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은 아니지만 몰두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었고 몰두하는 시간 동안은 무위의 상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 계획을 여유롭게 세우면 주어진 업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수 있고 풍부한 자료조사 및 내용의 충실을 기할 수 있어 그 결과물의 질도 훨씬 높아진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발생할 때면 동료들과 잡담하고 시간 가계부를 정리하고 채우며 잉여 시간을 만들지 않는다.  

 류빈의 설명이 끝나고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앉아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마침내 김 부장이 입을 열어 대화를 마무리했다.     

“솔직한 대화...흥미로웠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류빈이 말한 이야기엔 상사가 들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 만한 내용도 없지 않았지만 류빈은 그 점에 대해 그닥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고 늘 그랬듯이 당당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박 대리와 이 대리가 고개를 돌려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얼굴을 살폈지만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사무실 기둥 디지털 시계의 붉은 다이오드가 10:00 초를 찍고 있었다.   

 잠시 후, 김 부장은 화성공장 출장을 위해 외출했다. 컴퓨터는 켜져 있는 상태였다. 

 바탕화면에 시간별로 빼곡이 정리된 일정표는 수정되어 있었다. 각 업무에 할애된 시간은 좀 더 길게 바뀌어 있었고 퇴근 시간 이후의 타임라인도 추가되어 있었다.  


 ※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 류비셰프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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