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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Feb 25. 2020

31년산 위스키의 위용


2019년 12월 31일. 여행 마지막 저녁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 하고, 밖에 나가야 닫은 곳도 많아서 그날 저녁은 호텔 내부 식당에서 먹었다. 식당을 나오다가 왠지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에 호텔바로 향했다. 위스키를 시키려고 메뉴를 보다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위스키 이름과 31년산, 그리고 가격(무려 8천엔, 우리돈으로 8만원!)이 눈에 띄었다. 위스키 한 잔에 8만원이라니... 호기심에 바텐더에게 병이나 한 번 보여달라고 했다.


바텐더는 장 속에서 깊숙히 두었던 위스키병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었다. 나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 "이거 그렇게 좋은 술인가요?" 답은 뻔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심각함이 보였다. 정말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그 조그마한 잔에 8만원이라니...라는 말을 되뇌이며, 다른 것을 고를까 할 때, 놀랍게도 아내가 "한 해의 마지막날인데 관심있으면 마셔봐~"라고 말했다(아내는 <스토브리그>도 무료로 몰아보다가 돈 내는 회차가 되면 1주일을 기다려 공짜가 될 때에 보라는 사람이다). 한 해의 마지막날에 여행의 마지막 날까지 겹치면서 온갖 감정이 섞여있었던 나는 바텐더에게 한 잔 달라고 했다. 그는 정말 시키는 것 맞는지를 다시 확인한 후, 위스키를 따랐다.


바텐더도 긴장했는지, 그 비싼 술을 따르다가 조금 흘렸고, 그는 조금 더 따라주었다. 아. 그 작은 한 잔을 두고 아껴가며 1시간은 마셨는데(당연히 얼음 절대 섞지 않고), 스포이드로 입속에 2-3방울을 떨어뜨리듯이 조심스럽게 마셨는데, 입속에서 그 향이며, 혀의 이곳 저곳을 자극하는 맛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실은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 집에 있는 위스키를 마셔도 계속 생각나는 것은 그 때 마셨던 그 술이다.


알고보니 이 술은 세계 위스키 시장에서 가장 귀하며, 가장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었다. 가루이자와(Karuizawa) 증류소는 1955년 세워졌고, 일본내에서 가장 작은 증류소로 운영되다가 2000년에 생산을 중단했고, 기린맥주에 팔렸다가 2011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즉, 더 이상 가루이자와 위스키는 생산되지 않는다. 이런 희귀성 때문인지, 가로이자와 1960년산으로 52년된 Old The Dragon 위스키는 한 병에 63만 8천불(한화로 약 7억 7천만원)에 팔린다니 놀라울 뿐이다.


가루이자와 위스키가 지금 이렇게 희귀하면서도 세계 최고가 위스키가 된 과정에는 대만의 에릭 황(Eric Huang)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영국의 에버딘(Aberdeen) 대학에서 국제무역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공부에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주말마다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를 놀러다녔다고. 희귀한 위스키를 사는 것에 관심이 있던 그는 멤버들에게만 독특한 위스키를 판다는 스카치 몰트 위스키 협회(Scotch Malt Whisky Society)에 가입한다. 카... 회원 가입이 그의 인생을 바꿀 줄이야. 당시 대만 시장을 눈여겨보고 있던 협회 회장은 회원 중 대만 국적의 회원을 딱 세 사람을 찾아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60세 이상이었고, 에릭 황만 젊은이였다. 회장은 그에게 접근해 대만에 협회 설립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게 된다. 공부에 별 재미도 못 느꼈던 그는 Why Not?이라고 답변하면서 위스키 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참고로 대만은 위스키 시장으로는 전세계 4위 시장이며,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몰트 시장이 블렌드 시장보다 더 큰 곳이다 (2014년 기준). 당연히 협회로서는 구미가 당길 곳이었다.


아무튼 에릭은 일본에 있던 친구를 통해 기린에 소개를 받게 된다. 당시 기린은 가루이자와 증류소를 닫기로 결정하기 전이었고, 전세계적으로 홍보를 도와줄 인물을 찾고 있다가 에릭 황과 연결이 된다. 하지만, 결국 기린은 가루이자와 증류소를 닫기로 결정했고, 위스키통(cask)의 원액을 팔 것인지 아니면 기린의 블렌드 위스키를 만드는 데 섞어 쓸지 고민하게 된다. 에릭 황은 가루이자와 원액으로 블렌드 위스키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말에 "미쳤냐?"고 반응하고, 이 통들을 몇 몇 다른 곳들과 함께 사들이게 되는데, 이 결정은 에릭 황에게는 행운이었고, 기린맥주에게는 커다란 실수였다! 2018년 기준으로 에릭황이 20통을 보유했고, 다른 보유자들은 모두 합쳐도 5통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위스키 제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에 정통한 에릭 황은 이 위스키통을 팔기보다는 병입(bottling)하여 마케팅을 하고 싶어했다. 그가 사들인 위스키통을 보관한 곳이 과거 허리포트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이치로 아쿠토(http://her-report.com/archives/3636)가 운영하는 치치부 증류소였다. 이렇게 병에 담아 직접 디자인한 라벨을 붙여서 팔기 시작했고, 이것이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고가의 위스키로 팔리고 있는 것이다. 에릭 황이 갖고 있는 마지막 통은 2020년 도쿄 올림픽 즈음에 내놓을 예정이라고 하니, 앞으로 가루이자와 위스키는 더 구하기 힘들 듯하다.


위스키 콜렉터인 에릭 황은 무려 1만 병 정도 갖고 있다고. 가루이자와 위스키는 내게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가 되었다. 위스키 맛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희귀성이 얼마나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심리 속에서 높은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에릭 황의 이야기로부터 우연이 삶에서 얼마나 극적인 방향 전환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두 흥미로웠다.


참고:
"The Man Behind The Last Drops Of The World's Rarest Whisky" (
George Koutsakis, 2018. 4. 19)

"Taiwan's accidental whisky evangelist spreads the word in Hong Kong" (Robin Lynam, 201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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