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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Mar 30. 2020

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생각한
‘트리아주’

<재난 그 이후> 

트리아주(triage)는 프랑스어 명사이며 동사형 트리에(trier)는 구분하다, 정리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트리아주는 특히 커피콩을 분류해내는 작업을 통해 남은 부서진 커피콩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나폴레옹 시대에 전장에서 의사가 부상자의 정도를 파악하여 치료 우선순위를 정하는 뜻으로 쓰였는데, 이제는 응급의료의 용어로 쓰인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유럽의 병원 입구에서 환자를 검진하는 모습이 뉴스에 나올 때도 의료용 텐트에 적혀진 이 단어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재난 그 이후> (2015, 쉐리핑크 지음, 박중서 옮김, RHK)를 읽었다. 미주를 빼더라도 내용만 650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이 책의 원제는<Five Days at Memorial>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의 뉴올리언즈를 덮쳐 도시의 80%가 침수된 상황에서 메모리얼 병원 내부에서 5일 동안 벌어졌던 일을 의사이면서 재난 및 분쟁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기도 하는 의학전문기자 셰리 핑크가 쓴 것이다. 원래는 "메모리얼의 치명적인 선택(The deadly choices at Memorial)"이라는 상당히 긴 기사를 써 퓰리처상을 받은 뒤, 500회 이상의 인터뷰를 통해 책으로 발전시킨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해보면 한 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재난판'이라고 볼 수 있다. 재난 상황에서 우리는 시스템이나 매뉴얼만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된다. 이 책은 재난 상황과 관련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볼 수 있는데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와 "무엇이 환자를 위한 것인가?"란 질문이다. 당시 메모리얼 병원에는 200명의 환자와 600명의 병원 직원이 있었으며, 2천 명의 시민이 대피중이었다. 하지만 병원에 5미터의 물이 들어 찰 예정이란 것을 알게 되고, 환자들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던 병원의 유리창은 허리케인으로 박살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전력이 나가게 되고, 비상전력으로 환자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의료기계가 곧 작동 중단 될 것임을 알게 된다. 에어컨은 당연히 꺼지게 되고 내부 온도는 37도를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정부의 구조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병원 내에 남은 의료진은 여러가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기계가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환자들이 있지만 전기는 얼마 유지하지를 못하는데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170킬로그램이 넘는 걷지 못하는 환자를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를 지키기 위해 의사는 무 조건 끝까지 남아야 하는 것일까(먼저 병원을 포기하고 떠난 의료진도 있었다)? 한병의 물이 남았을 때 여러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의사에게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환자에게 주어야 하는가? 당시 병원에는 병원 직원들이 함께 대피 시킨 반려동물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구조보트에는 반려동물이 탈 수 없었다. 결국 반려동물의 주인들은 자신의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안락사 시키기도 했다.


재난 상황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이 책은 실감나게 보여준다. 너무나 극적이어서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매뉴얼이나 절차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결국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지는 상황이 오게 된다. 이론적인 원칙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 상황에서 이를 적용하는 것은 커다란 딜레마를 안겨준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공리주의 철학(최대다수의 행복)"을 재난 상황에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구조에서 우선되는 것일까? 구조된 사람의 숫자? 구조된 사람의 나이의 합? 구조된 사람의 삶 중에서 삶의 질이 최상인 것의 합?


당시 두경부암 전문가로 평소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포(Dr. Pou)는 간호사 두 사람의 협조를 받아 남은 환자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환자에게 표시하기 시작한다. 1번은 건강 상태가 좋은 사람, 앉았다가 일어나고, 걸을 수 있는 사람, 2번은 건강이 더 안 좋은 사람이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 3번은 매우 아프고, 심폐소생술 금지에 동의한 사람. 일반적으로 아픈 사람을 먼저 구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포는 반대로 결정한다. 즉, 건강한 사람부터 먼저 구조헬기와 보트에 태우기 시작한다. 건강한 사람을 먼저 살리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전체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사건에서 더 큰 딜레마를 만들어낸 것은 후반부이다. 의사 포와 두 명의 간호사가 환자 네 명을 살해했으며 2급 살인법령을 위반했다는 주장이 재난이 끝나고 난 후 나오게 되고 체포된다. 구조가 힘든 환자 중 삶이 얼마 남지 않았고, 물에 휩쓸려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모르핀 등의 약을 투여해 그들이 죽음을 좀 더 빨리, 덜 고통스럽게 맞이하도록 한 의료진의 결정이 과연 합법적인지, 윤리적이었는지 논란이 생긴 것이다. 안락사에서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이 책은 적고 있다. 하나는 환자가 죽기를 먼저 요청했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의료진이 사망을 도울 때 적극적 형태(투약)였는지 아니면 소극적(생명유지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 형태였는지의 여부다.


하지만 당시 지역 여론은 76%가 병원 의료진을 지지하고 기소에 반대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은 8퍼센트에 불과)하고 있었다. 이런 영향이 어느 정도 작동했는지 2007년 7월 24일 대배심원은 모든 혐의에 대해 의료진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논란의 핵심에 있었던 의사 포는 자기가 직접 주사를 놓았는지, 행동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수술을 했고, 재난의학에서 윤리적 고려에 대한 강사로서 미국 전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저자인 핑크는 포를 인터뷰하려 했고, 그의 강연에도 참석했으나 이후 참석을 거부당하기도 한다.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익명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옳은 일을 한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게는 시간이 없었죠. 저는 가장 섬뜩한 상황에서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고, 그래서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했어요. 저는 죽어가며 고통스러워하던 그 환자들에게 모르핀을 주사했어요. 한번이 충분하지 않으면 두 번 투여했죠. 그리고 밤이면 제 영혼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612-613)
저자 셰리 핑크는 바로 이 익명의 의사가 논란의 인물 애너 포였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은 재난이 인간을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고 갔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어느 한쪽의 입장을 지지하기 보다는 재난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토론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당시에는 부시 대통령이 뉴올리언즈를 비행기를 타고 재난 지역을 행차하는 것 때문에 한 동안 구조용 비행을 중단했어야 하는 장면도 묘사된다. 또한 이익 때문에 병원들이 그 이후에도 비상 전력 시스템 보완 등을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한다. 당시 정부와 병원 경영진이 이런 재난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면, 이런 개인적 결정의 딜레마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물론 꼬집는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상황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직접적 영향을 받은 감염 대상자와 의료진, 정부나 민간의 담당자들은 현장에서 간단히 설명하기 힘든 상황과 딜레마를 접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뉴스를 보고 잘한다, 잘 못한다를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게 된다. 항상 매뉴얼이나 이론과 현실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남의 상황'으로 재난을 접할 때와 직접 그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큰 차이를 느끼게 된다.


아무쪼록 이 상황이 잘 끝나기를. 그리고 이번에 배운 것들이 향후에 있을 수 있는 재난 상황에 보다 현명한 대응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극적 보도나 비난보다는 차분한 복기와 분석이 있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Y5Ctg9SRm_0

YouTube 동영상(Sheri Fink "Five Days at Mem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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