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인듯 고백아닌 고백같은 거
아이의 물건에 이름을 써줄 때면 이름 뒤에 하트를 그려 넣었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레 하트가 따라왔다.
아이가 커서 취학을 하고, 이름을 꾸며선 안 되는 것들(회신용 가정통신문 등)에 습관적으로 하트를 그렸다 지우는 일이 반복되자 언제부터인가 하트를 그만 그리게 됐다. 서운할 일은 아니지만 격세지감을 느꼈다. 이름에 하트 하나 뺐다고 세월을 깨닫다니, 주책이다.
이름을 쓰면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찰나 동안 떠오른다. 어린 넷째 아이의 이름을 쓸 땐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올라 아직 하트를 그리고 있다. 유치원 선생님도 원생들의 이름을 써줄 때 꼭 그러신다. 질세라 나는 이름 양 옆에 두 개도 그려본다.
남편의 이름을 써야 할 땐 왠지 모르게 비장하다. 비장함 속엔 응원과 복수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필체가 미세하게 다르다.
내 이름을 쓰는 건 좀 더 복잡 미묘하다. 이름을 싫어했던 예전에는 빨리 쓰고 덮어버렸고, 글씨를 한참 배울 땐 싫거나 말거나 최대한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동안은 그랬다.
누군가의 이름을 쓰는 마음은 관계에 따라서 그 깊이가 달라진다. 그냥 글자가 아닌 그 사람을 쓰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의 통신문에 하트를 그려 넣을 순 없지만, 그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게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치원생의 아이가 그저 사랑스러웠다면, 청소년 자녀의 이름엔 희망을 이루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글씨에 정성을 담고자 노력하고, 동시에 그 아이의 삶도 정갈해지길 바라게 된다. 그러나 정작 내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떠한 마음가짐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예전부터 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흔치 않은 성씨 때문에 튀는 게 싫었고, 이름도 왠지 촌스럽게 느껴졌다. 이름이란 게 예쁘다고 자랑할 건 아니지만, 본인 이름이 마음에 안 차는 사람이라면 말하기 껄끄러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살면서 익숙해졌을 뿐 딱히 좋아지지도 않았는데 최근 어느 날, 내 이름을 좋아하고 싶어지는(?) 일이 생겨버렸다.
캘리그라피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을 다시 시작했다.
마케팅용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프로필을 지우고 단정하게 꾸미며 프로필에 아호를 걸었다.
청유淸油. 한자를 직역하면 푸른 기름으로, 가톨릭의 세례와 연관돼 있다. 좋은 글귀로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겠다는 마음과, 내 글들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경험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리고 대회와 전시 참가용 아호가 하나 더 있긴 하다.)
예술가들에게 아호는 제2의 이름이니 포트폴리오라면 당연히 걸어야 한다. 아호는 자신을 대표하는 시그니쳐이자 본인이 추구하는 세계를 표방한다. 그래서 중복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본명이 중복될 때와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태어나며 붙여진 본명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진 않지만, 아호는 비슷한 업의 사람들이 스스로 짓는 이름이라 도의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본명을 가진 자들끼리는 재밌을지 몰라도 같은 아호를 가진 자들끼리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누가 먼저 지었냐부터 시작해 누가 더 실력자냐까지 따지게 되면 더 이상 공생이 어렵다.(물론 서로 간에 신경을 안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양 쪽 다 도장을 팠다면 오히려 선의의 경쟁구도가 완성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유명한 서예가들은 아호와 본명을 나란히 쓴다. 당당함의 상징이다. 자연스레 중복에 따른 문제를 피하고 그만의 독립된 세계를 써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름이 여전히 싫어서 프로필에 아호만 써놨더니 중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막연히 내 것을 지키고 싶다는 욕구는 아니다. 혹시라도 실력이 미천한 이유로 같은 아호의 작가가 피해를 볼까봐서였다.
AI를 켜고 오랜 시간 새로운 아호와 브랜딩을 논의했으나 적당한 대체어를 찾지 못했다. 하다 하다 스페인어, 불어가 나오더니 급기야 다국어 조합까지 등장했다. 이 정도면 어디에도 없을 아호임이 확실했지만, 그렇게 떨이처럼 바꾸고 싶진 않았다. 이 얼마나 간사한 마음인가.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문득 나도 본명을 함께 넣고 싶어졌다. 오래된 감정이지만 이제야 표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마음에 안드는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될 순 없을까? 내면의 질문이 시작됐다. 나는 왜 이름을 싫어하는 것인가. 단지 촌스러운 느낌이 부끄러워서인가. 아닌 것 같다. 내 실력이 부끄러워서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었던 것이다. 본명을 싫어한 감정과, 아호가 중복되었다는 불편함 사이에는 한줄기 공통된 불안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자신감이었다.
그렇다면 이름을 사랑하기 위해선 모든 나의 것들을 인정하고 껴안는 방법밖에 없다. 그 이름을 안고 살아온 세월이 40여년이다. 그 시간만큼 수없이 불렸다. 무수한 선택과 의견들은 좋았든, 부끄러웠든, 싫었든, 모든 것이 이름 앞에서 이뤄졌다.
하나의 아호를 가지고 니꺼 내꺼 따지는 것은, 그것이 그의 프라이드를 만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지어진 후 마음에 들어야 하는 본명의 주도권을, 마음에 들어 지어진 아호가 빼앗아오길 바랐는지 모르겠다. 본명은 소속의 의미 이상으로 확장하지 못했지만, 아호는 내가 만들어낸 세계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본명은 바꿀 수 없다. 나와 함께 수십 년을 살아와 텃세를 부린대도 아호는 그 삶을 따라가며 나를 채워야 한다. 이제 더는 멀찍이 둬선 안될 것 같다. 나란히 걷게 하고 싶다. 본명도 아호도, 내꺼인데 내꺼아닌 내꺼같은 이상한 관계가 아닌, 하나의 내가 되는 날을 만들어가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 옆에 그렸던 마음처럼, 존중과 책임을 담아 예쁘게 이름을 써볼 것이다. 예쁘게 예쁘게 더 예쁘게 쓰다 보면 정말 예쁜 이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