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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Aug 09. 2020

<코뮌>:혁명사를 다시, 그리고 새로 쓰는 영화에 관해

<코뮌>(피터 왓킨스, 2000) 분석, 공간연구 문화연구 어쩌구와 접합

I. 들어가며


  초기단편 <무명병사의 일기>(1959), <잊혀진 얼굴들>(1961)로 영국 언더그라운드 씬의 주목을 받은 피터 왓킨스는 곧 BBC로 스카우트되어 합류한다. BBC 근무 시절의 그는 <컬로든 전투>(1964)를 연출하며 잠시나마 영국 다큐멘터리계의 계승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당시 왓킨스는 1746년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사건인 ‘컬로든 전투’를 TV뉴스 중계 형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이 때 구축한 유사 다큐멘터리(quasi-documentary) 형식은 이 글의 분석 작품인 후기작 <코뮌>(2000)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후속작 <워 게임>(1965)의 방영금지처분, <프리빌리지>(1967)에 대한 평단의 ‘저주’ 등은 왓킨스로 하여금 영국 영화계를 떠나 각국을 누비며 영화를 제작하는 ‘망명자’가 되도록 만든다. 물론 여러 대륙에서 수십년간 이어진 ‘망명’ 시절 그는 <글레디에이터>(스웨덴, 1969), <퍼니시먼트 파크>(미국, 1971), <에드바르트 뭉크>(스웨덴·노르웨이, 1974) 등 주요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이 시기 왓킨스는 ‘사람들은 내가 1973년 경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이용철, 2007)는 한탄을 남겼고, 또한 1977년까지 그가 ‘MAVM’(Mass AudioVisual Media)이라고 부르는 기존 영화의 방식에 대한 해체와 개념전복 방식 사이에서 갈등하였음을 고백한다.(Watkins, 2019)

  왓킨스는 MAVM을 헐리우드 고전 양식부터 최근 넷플릭스 영상물에 이르는,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겠단 목표’에서 ‘영화의 문법’을 추구하는 고도로 구조화된 영상물로 정의한다. 왓킨스는 스탠 브래키지, 트린 민하, 크리스 마커, 아녜스 바르다, 크쉬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등의 ‘작가’ 영화가 MAVM의 플랫폼으로부터 벗아나게 해준 사례라고 논한다. 하지만 왓킨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수많은 대안 또는 실험 영화 작품들이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의 스페셜리스트 상영세션으로 강제격리(ghetto-ized)되었고, 더 많은 대중 앞에 모습을 그러낼 기회를 박탈"(Watkins, 2019: 4)당해왔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왓킨스의 한탄과 갈등은 그가 ‘MAVM’의 체계를 파괴하기 위한 시도로서 제작했다는 ─ 그는 자신의 영화를 급진적 대안영화의 역선에 배치한다 ─ <코뮌>에 대한 평단의 재-환대를 통해 일정부분 해소된 것으로 논해진다.(이용철, 2007) 그렇다면 우리는 <코뮌>의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해 왓킨스의 MAVM-모노폼으로부터의 탈출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 그리고 성공적이었다면 표준 체계 밖에서의 급진적 대안영화가 ─ 영화일반이 아닌 개별 영화작품으로서 ─  어떤 의의와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다.

  한국에서 피터 왓킨스와 <코뮌>이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의 전주국제영화제(고길섶, 2001), 그리고 2007년의 왓킨스 회고전(이용철, 2007)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영화제와 회고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던 평론가 정성일(2010)은 대중저서를 통해 <코뮌>을 한 챕터로 소개했다. 그런데 정성일은 자신이 “왓킨스가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해서 갖고 있는 역사적 판단에 대해서 …… 비평할 자리에 있지 않다”(정성일, 2010: 150)며 구체적 ‘개입’을 거부한다. 그는 영화-텍스트의 요소들을 포착하기 보다는 단지 <코뮌>을 하나의 결로 환원시킨다. 왓킨스의 입장을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텍스트 세부적 요인 자체에 대한 관심을 거부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영화작품 요소들의 분석을 생략한 채 비평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의 의문을 갖게 한다. 일례로 <코뮌>은 역사적 사건인 파리코뮌의 평가와 현재에 대한 조망을 끊임없이 오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글은 <코뮌>의 작품분석을 통해 정성일 식의 일종의 텍스트로부터의 거리두기가 적절한 것이었는지를, 영화작품의 여러 결로부터 재검토하는 데에 추가적인 목적을 두고자 한다.          



II. 복수의 시간과 접합


  왓킨스는 MAVM의 프레임으로서의 ‘모노폼’을 여느 영화, 영상의 서로 다른 요소들 위에 서로 고정된 시공간 틀이라고 규정한다. 영화 문법으로서의 표준형식화된 모노폼은 영상과 사운드의 ‘퍼붓기’와 빠른 편집을 통해, (주제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주제와 테마 간의 본질적 차이를 흐린다. 그리고 이는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모노폼 역시 영화 언어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노폼의 사용은 영화 교육제도에서의 독자화에 대한 강요, 그리고 이에 따른 경로의존성에 의해 표준화된 것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모노폼이 표준화되며 영화는 시공간을 일원화하는 ‘조작’을 통해서 관객-수용자로 하여금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해왔다고 왓킨스는 지적한다. 물론 누구라도 표준 체계로부터의 탈피를 영화 외적으로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영화작품 분석을 통해 특정한 영화로서의 <코뮌>이 탈피를 어떻게 시도하였고, 어떻게 성공하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코뮌>이 다루고 있는 파리코뮌은 프랑스 혁명사에 있어 역사적 사건이다. 서양사학자 노명식(1980/2011)은 프랑스 혁명을 1789년으로, 그리고 그 약 백년간의 직접적 역선의 ‘최종 사건’을 1871년의 파리코뮌으로 꼽은바 있다. 좌파 정치에서도 파리코뮌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코뮌의 존속 자체가 파리코뮌의 의의였음을,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긍정적 사례로 파리코뮌을 평하기도 했다. 이후 레닌은 파리 코뮌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라고 논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다.(Boyle, 2004/2005: 113) <코뮌>의 부제는 파리코뮌을 의미하는 'Paris, 1871'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모노폼을 탈피하고자 한 <코뮌>의 시도는 파리 코뮌이 있었던 1871년의 단순한 재현에 멈춰있지 않다. <코뮌>에서는 여러 겹의 시간대가 포착된다.

  <코뮌>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여러 겹의 카메라(들)이다. <코뮌>은 영화의 촬영시점인 1999년의 카메라로부터 시작한다. 이 때 <코뮌>의 주요 관찰자이자 행위자이자, 극중 ‘코뮌TV’의 리포터인, 그리고 전문 배우인 제라르 왓킨스와 틸리 맨델브롯은 ‘배우 자신’이라는 ‘배역’으로 등장한다. 이 때 영화의 도입부는 코뮌의 영화 촬영이 끝난 다음날 진행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가장된다. 그리고 <코뮌>의 제작 환경, 일종의 기록연극의 무대를 살피는 것처럼 움직인다. 이 때의 시점은 1999년이다. 그러나 잠시 암전이 있은 후 곧이어 첫 인터뷰가 시작되면서 시점은 1871년으로 진입한다. 그런데 이 1871년은 역사적 시간으로서의 1871년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가 말했던 ‘유니크 픽션’으로서의(Fujiwara, 2008) 1871년, 일종의 가상의 시간대를 ‘형성’한 것에 가깝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코뮌>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과잉실재’처럼 ─ 가시화의 자리에 놓인다. 이를테면 <코뮌>의 팩션faction-1871년에는 텔레비전과 텔레비전 방송이 ‘이미 있었던’ 것으로 놓여진다. 텔레비전은 놀라운 문물이 아닌 당연히 있는, 심지어 일상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익숙한 기제에 가깝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영화의 ‘의도’에 가깝다. 영화작품 분석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 포착하는 것에 멈춰서는 곤란하다.

  도입부부터 다시 보도록 하자. 도입부에서 ‘1999년’의 배우 틸리 멘델브롯은 이제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으며, 이에 회의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힌다. 다만 영화에서의 발화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실제 배우 틸리 멘델브롯이, 영화 안팎의 순수한 자신이라기보다는 ‘1999년의 배우 틸리 멘델브롯’이라는 ─ 자기복제라기보다는 자기의 일정한 반영에 가까운 ─ 배역을 연기한다고 볼 수 있다. 카메라 내화면에 처음으로 잡힌 인물 중 하나인 틸리는, 이후 공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화면 밖으로 이동하여 외화면의 해설자가 된다. 피터 왓킨스는 다큐멘터리로 주요한 경력을 시작했지만, ‘순수한 다큐멘터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사실 다큐멘터리의 순수함 자체가 현실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막스 베버적 의미에서의 이념형(idealtypus)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Steyerl, 2008/2019) 외화면의 현실-1999년은, 내화면의 부분현실-1999년과 부분적으로(만) 상응한다. 이처럼 내화면의 1999년 역시 리얼리티의 시점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부분적으로 반영하여 만들어진 또 다른 시간대에 가깝다. 이 복수의 시간대는 영화 안에서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분명 차이를 갖는다.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는 (약 200여명의 비전문 배우들이 주축이 된) 이 영화에 처음으로 등장한 두 인물 ─ 틸리 멘델브롯과 제라르 왓킨스 ─ 만큼은 전문배우라는 지점에 있다. 전문배우들의 페르소나와 자연인으로서의 배우 역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페르소나가 등장하는 부분현실로서의 1999년과, 영화에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등장한, 그리고 영화 바깥에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현실의 1999년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

  코뮌TV가 개국하자 배우 틸리 멘델브롯은 배역 블랑쉬 카밀리에가 된다. 하던 1999년의 배우 틸리의 정체성을 내버린다. 영화 도입부에 자신으로서 ‘등장’한 틸리에게 있어, 코뮌을 그저 낙관적으로 보고 ‘전적으로’ 지지한 1871년 블랑쉬로의 이입은 어려운 것이었다(혹은 어려웠던 것으로 대사 처리된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영화에서 퇴장할 때까지 블랑쉬로 남는다. 틸리-블랑쉬에게 1871년과 1999년은 중첩되지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코뮌TV의 공동 리포터로 등장한 제라르 왓킨스에게 1999년의 시간과 1871년의 시간은 구분되지 않는다. (1999년의 것으로 보이는 가치관을 통해) 1871년의 코뮌 내부 문제에 대한 내적·외적 갈등을 겪고 심지어 동료인 블랑쉬와도 대립하게 된 제라르는 결국 코뮌TV에서 사임한다. 사임 이후 텔레비전을 경유하지 않은 독립 리포터가 된 (1871년과 부분현실-1999년이 중첩된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는) 제라르는 팩션-1871년의 배우들에게 부분현실-1999년도 아닌 현실-1999년을 볼 것을 요청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민중의 전투 장면에서, 고조된 분위기 속에 1871년의 배역으로 1871년의 베르사유 체제를 비난하는 배역-배우들에게, ‘그보다도’ 1999년 현실에 대한 생각을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배역-배우들은 1871년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실제로’ 살고 있는 1999년을 말한다. 관객은 이를 흡사 배우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메타적 장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리얼리티로 보이는 모순에 가깝다. 이 다큐멘터리 형식의 픽션에서 분석가/관객은 무엇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이 때의 배우들의 발화 역시 캐릭터로 개발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왓킨스는 <코뮌>의 꾸준한 상영을 염두에 두었다. 이에 그는 직접 2005년 <코뮌>을 영화제 상영 목적으로 재편집하였고 공식적인 두 개의 판본이 생성되었다. 판본 간의 비교는 영화사의 기술에도 유의미하지만(Aumont & Marie, 2015: 6장), 또한 <코뮌>의 복수의 시간대를 논할 때에도 좋은 분석방법이 된다. 2000년 첫 버전인 5시간 45분의 ‘Rebond pour la Commune’의 판본(이 글의 주 분석대상)과 2005년 재편집본인 3시간 30분의 ‘13 Production' 판본은 1999년을 서로 다르게 조망한다. 비전문배우들이 말한 21세기에 대한 상대적으로 막연한 기대의 발화들이 2000년 판본에는 있지만, 2005년 판본에는 상당부분 삭제되었다. 이는 비전문배우들의 다큐멘터리적 발화라고 하더라도 동시에 팩션인 이 영화의 1999년의 현실 역시 영화 내적으로 구성된 시간대임을 포착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Rebond pour la Commune’ 판본에서는 비전문배우들 간의 토론이 <코뮌> 속 파리코뮌의 역사적 국면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 토론의 ‘진정성’이 현실-1999년의 것인지, 부분현실-1999년의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영화 내적분석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분석할 지점은 앞서 전문배우인 틸리 멘델브롯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1999년의 비전문배우들 역시 100년도 이상 된 파리코뮌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지점이다. 이들의 토론은 (부분)현실-1999년의 자기자신(혹은 ‘자기자신’이라는 배역)과 <코뮌>이 구축한 팩션-1871년의 시간대를 끊임없이 오간다. 각 시간대는 양자를 오갈 때의 근거로 활용된다. 동시에 그 사이의 시간들이 토론에 개입한다. 혹자는 <국가와 혁명>을 직접 거론하며 20세기의 레닌을, 다른 이는 트로츠키를 소환한다.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실제로 참여한 아나키스트들의 논의 역시 이후 20세기에 발전된 아나키즘 이론들을 토대로 한다. 이를테면 혹자는 19세기의 것이라기보다는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의 발전 이후 새롭게 구축된 (루돌프 로커나 노엄 촘스키 식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e)을 제시한다. 팩션으로 구축된 1871년에서 코뮌 참여자의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이, 다른 한편으로 1999년의 시점에서 코뮌을 다양한 방면에서 평가한다. 이들에게 코뮌은 이미 공식적으로 종결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나 “그 때와 지금은 같다”는 식의 발화가 가능해진다.

  MAVM의 모노폼에서와 달리 <코뮌>에서 복수의 시간대는 서로 구분된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적 조건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 서로간의 차이를 이유로 ─ ‘접합’될 수 있다.(Hall, 1996/2015) <코뮌>에는 다수의 상황적 조건이 배치된다. 가령 코뮌정부의 수립을 선언하는 연설에 있어서 소비에트 초기 레닌이 했던 연설로부터 문장들이 직접 인용된다. 여기서 1871년의 파리 코뮌은, 1917년의 소비에트 혁명과 접합된다. 레닌의 문장이 1999년의 배우-1871년의 배역으로부터 발화되면서 담론의 통일성unity(앞의 책: 179)을 통해 1871/1917/1999·2000년의 세 시간대는 영화작품 <코뮌>에서 교차되고, 이 교차점에서 접합된다. 그리고 2005년의 현실에 맞추어 다시 편집되었던 13 Production' 판본에서처럼 접합되었던 요소들은 필연적 소속을 갖고 있지 않는바 다양한 방식의 재접합이 가능해진다. 가령 항쟁 시퀀스의 제라르의 인터뷰에서 한 노인 인터뷰이-배우/배역은 1944년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다른 다수의 인터뷰이-배우/배역은 1968년을 1871년과 1999년의 사이에 주요하게 배치한다. 이와 같은 <코뮌>의 복수의 시간은 ‘21세기 사회주의’의 구축에 관여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또한 팩션-1871년의 혁명적 민중 배역을 연기한 비전문배우들 상당수가 ‘현실’에서 이미 NGO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자원봉사격으로 이 영화에 참여했고, 또한 <코뮌> 이후 별도의 사회운동을 조직했던 컨텍스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극의 복수의 시간으로부터 접합된 통일성은 사회세력과 연결될 수 있으며, 또한 ‘현실’의 사회세력 간의 연계를 가능케 한다는 의미를 확보한다.      

    


III. 혼합적으로 생산된 공간


  이 절의 본격적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코뮌>의 제작환경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코뮌>의 연극적 무대는 파리 외곽의 버려진 자동차 타이어 공장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 부지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스튜디오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왓킨스는 2019년의 글의 서두에서까지 이 일화를 밝힐 정도로 그 사실을 중요시했던 것 같다. 그가 일부러 이 부지를 택했던 것은 멜리아스에 대해 ‘빈곤 속에 사망’하였음을 강조한 것처럼(Watkins, 2019: 1) 자신의 작업이 받는 현재적인 소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코뮌>을 영화사에 배치하려는 일종의 공간적 ‘전유’로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유’는 앙리 르페브르나 미셸 드 세르토 등의 ‘공간적 전회’와 ‘도시의 문화정치’ 선구자들에게 있어 핵심적인 실천의 하나로 제시되는 개념이다. 해미쉬 포드(Ford, 2016)는 르페브르의 도시공간 이론을 통해 <코뮌>의 혼합을 설명하려 시도한 바 있다. 포드는 도시의 잠재적인 혁명적 재구성의 구체적 사례로써 <코뮌>을 제시했다. 하지만 포드의 논의는 왓킨스의 <코뮌>으로부터 혁명을 단지 낭만적으로 긍정하는 데에 그쳤다. 우리는 포드의 논의에, 왓킨스의 지향을 교차해 생각해봐야 한다. 왓킨스 자신이 정의한 바와 같이 모노폼이 서로 다른 요소들 위에 서로 고정된 시‘공’간 틀이다. <코뮌>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 역시 해체함으로써 재구성되며 다른 대안적 공간으로 ‘생산’한다. 따라서 1999/2000년 <코뮌>의 공간 생산은 1871년 파리코뮌의 공간을 단순히 긍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삶을 바꾸다’, ‘사회를 바꾸다’는 식의 말은 적합한 공간의 생산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Lefebvre, 1974/2011: 115) 이 지점에서 <코뮌>은 파리코뮌을 긍정하지만, 숭배하지는 않는다. 이를 중심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는 <코뮌>의 공간 구성이다. <코뮌> 속 혁명 수뇌부는 대사와 문헌으로 평등을 말하지만, 극의 무대로 설치된 공간의 구성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이를테면 코뮌의 혁명 수뇌부는 코뮌 정부 선언의 순간부터 단상에 올라섰다. 그 직후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이들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일반 민중보다 상대적으로 권력을 확충한 코뮌TV의 카메라조차도 수뇌부의 회의만큼은 접근하지 못한다. 코뮌TV는 수뇌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공표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논한 제라르의 불만 지점이 된다. 제라르뿐만 아니라 민중 역시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운동의 결정과정에게 접근할 수 없음에 직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하지만 베르사유에 코뮌이 접근할 수 없었던 것처럼, 민중은 코뮌 수뇌부에 접근할 수 없다. 단절된 공간에서 수행하는 의사결정 과정에 민중은 올라서지도, 진입하지도 못한다. 설령 관공서에서 ‘우연히’ 수뇌부를 목도하더라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조용히 하라는 식으로 면박을 받기까지 한다.

  <코뮌>에서 민중은 수뇌부를 만나지 못하지만 대리인인 관료를 만날 수는 있다. <코뮌>에서의 시청은 도입부의 내레이션이 말한 것처럼 ‘전권이 행사되던 곳’이었다. 행정시설은 <코뮌> 속 파리코뮌 내부에서만큼은 배급·신원확인·경찰권·처형에 이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내부의 탁상과, 그 앞의 작은 의자에 앉게 되거나 혹은 줄지어 서있어야 하는 풍경은 코뮌 이전 구체제의 관료제와 그리 다르지 않다. 심지어 파리에 잔류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는 이 “불쾌한” 곳에 직접 방문하기보다는 하인을 대리인으로 보냈고, 그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시청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문이 나오는, 결국 권력이 갈수록 심화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관료 집단 내에서도 고위직의 장소에 갈수록 남성의 비중은 높아지며, 수뇌부에 이르면 여성은 완전히 부재한다. 팩션-1871년의 불평등한 공간구성은 실제-1871년의 역사와도 부합한다. 파리 혁명 당시 코뮌정부의 행정은 역사적으로도(Jounin, 2014/2015: 10-11), 그리고 영화 <코뮌>에서도 구 왕정과 부르주아지의 통치기구-장소를 점거해 전개되었다. 그런데 르페브르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적 관계에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Lefebvre, 1974/2011: 115)하다. 기존 공간의 반복 속에서 “‘바꾸자’는 생각은, 점진적으로 혹은 비약적으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공간적 실천을 실행에 옮겨야 함에도 불구하고”(앞의 책: 116) 그러지 못할 때 이념성의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코뮌>에서 코뮌정부의 일부 세력이 군사주의적, 강압적 혁명론을 내세우며 정책을 실시하며, 팩션 상의 1871년의 민중이 ─ 그리고 부분현실-1999년에서 민중 배역의 배우들이 ─ 불만을 표했던 것은 공간이 생산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혁명을 지속하고자 시도했던 르페브르적 ‘공간 비판’으로 분석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여성동맹의 대표자 역시 조직화의 첫 순간에는 단상에 올라섰다. 대표자를 향하는 카메라의 방향은 혁명정부를 선언하던 수뇌부를 향하던 카메라의 방향과 유사하다. 뒤이어 여성동맹은 시청에 자신들의 회의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들의 시청 내부 장소의 확보 시도는 수뇌부와 관료들의 비협조로 인해 실패에 부닥친다. 관료들은 시청 뒤편의 좁고 낙후된 창고를 장소로 제공한다. 결국 그녀는 일시적이었던 단상-무대로부터 내려왔다. 혹은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여성동맹은 장소(시청)로부터 나와 다시 평평한 공간(광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렇게 수뇌부에 합류하지 않음으로써 여성동맹은 민중과 함께하게 된다. 공간의 정치로서의 회의는 열린 무대에서 진행된다. <코뮌>의 후반부, 베르시아유 군의 파리 침공에 따른 민중의 저항 시퀀스에서 코뮌정부의 수뇌부와 관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동맹원들은 자주 보인다. 또한 최후의 순간까지 카메라와 인터뷰에 개입한다. 비전문배우의 참여를 끊임없이 긍정하는 ─ 이는 명시적으로는 도입부의 나레이션에서, 간접적으로는 수차례 배치된 비전문배우들의 토론 그리고 후반부 제라르의 인터뷰 시도에서 드러난다 ─ <코뮌>에서, 한정되고 폐쇄된 장소를 확보하지 못한 대신 열려있는 공간을 전유했던 실천으로 수행된 여성동맹의 정치는 1999/2000년의 동시대성에 상응한다. <코뮌>이 생산하고자 한 실천적 공간은 단상 위나 협소한 행정 시설의 장소가 아닌, 민중이 오가며 개입할 수 있는 광장과 같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성동맹의 페미니즘적 공간 실천은 이 글의 뒷부분에서 후술할 ‘21세기 사회주의’의 구축 시도와도 맞닿는다.



IV. 복수의 화면구성과 시점, 그리고 미디어 문제


  <코뮌>에서 복수의 시공간의 혼재한다는 근거가 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복수의 화면구성과 시점이다. 부분현실-1999년을 기록하는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카메라, 팩션-1871년을 기록하는 영화의 카메라, 민중방송인 코뮌TV의 카메라, 국영방송임을 스스로 강조하는 베르사유TV의 카메라, 검은 화면에 쓰인 역사적 문헌의 인용 자막화면, 후대의 사가(史家)나 논평가로 개입하는 자막화면, 실존인물의 사진 등이 끊임없이 교차된다. 이에 따라 <코뮌>에 삽입된 영상 형식은 방송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기록연극, 팩션 등을 오간다. 영화는 일종의 모자이크나 꼴라쥬‘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완결된 영화로서 <코뮌>은 자신의 ‘모자이크’나 ‘꼴라쥬’ 구성물 전체를 긍정·지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코뮌>은 스스로 만든 영상물의 일부를 비판의 대상이 되는 레퍼런스로 활용한다. 극중 코뮌TV의 개국 이전, 국영방송으로 설정된 베르사유TV의 카메라에 대해 민중은 카메라를 의심하거나 무시한다. 사병 집단은 불만을 표출하며 미디어에서 자신의 발화가 어떻게 재현될 것임을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인다. 이에 더해 일부 최빈민층은 아예 베르사유TV의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다. 국영방송도 이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하지 않으며, 이들 역시 국영방송의 카메라에 관심을 표하지 않음으로써 상호 간의 거부 관계가 표출된다. 반면 이들은 이후 개국한 코뮌TV와는 조응한다. 다른 한편 몽마르트 언덕에서의 민중의 대포 점유와 국민군 사병들의 반란 이후 베르사유TV는 파리에서 실질적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 대신 베르사유에서 원거리로 프로파간다와 포섭을 시도한다. 그러나 ’코뮌TV'의 등장 이후 민중은 베르사유TV에 보다 관심을 끊는다. 쁘띠부르주아의 영업장에서는 국영방송이 계속 나오기는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민중은 그 텔레비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구도로 재현된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다큐멘터리적 카메라와 팩션 영화의 카메라, 그리고 ‘코뮌TV’의 카메라는 핸드핼드로, 그리고 35mm 카메라를 대체한 베타 캠코더로 촬영되었다. 정성일은 이 형식으로부터 코뮌TV가 “혁명기간에 일어난 일들을 사실 그대로 알리고자”(정성일, 2010: 149)했던 것으로,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왓킨스의 희망 지향적 태도였다고 평한다. 왓킨스가 베르사유군이 파리에 진입하면서 코뮌TV를 폐국했다는 가상의 자막을 역사적 자막의 형식으로 삽입한 것을 볼 때 분명 왓킨스가 자신의 코뮌TV를 대안적 미디어의 형식으로 긍정한 것은 일정부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코뮌> 텍스트 내부에 대한 세부 분석은 정성일의 논평을 회의하게 된다. <코뮌>은 절대 코뮌TV를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코뮌>의 극중 코뮌TV는 절대로 사실을 그대로 알리려는 기구가 아니었다. 코뮌TV는 개국 초기부터 코뮌정부의 다소 강압적인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전문배우가 연기한 ─ 따라서 비전문배우들의 인물해석과 달리 감독의 디렉팅이 보다 직접 개입한 캐릭터로서의 ─ 리포터 블랑쉬는 여기서도 혁명의 희망을 상실하지 않은 채 웃으며 연기한다. 하지만 극 도입부부터 부분현실-1999년의 다큐멘터리적 순간에서 틸리 멘델브롯가 자신의 가치관과 배역 사이의 갭이 힘들었다고 논한다. 극중(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코뮌정부의 구성에 있어 자코뱅이 다수를 이루게 되자 코뮌정부는 보다 강압적인 정책을 시행했고, 결국 다른 리포터인 제라르는 코뮌TV를 이탈한다. 이후 제라르가 ‘개인’적 카메라를 든 것은 코뮌TV가 혁명의 담지체로서 무용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라르의 개인 카메라 역시 모든 ‘민중의 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뮌의 마지막 항쟁 시퀀스의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보도를 하네요. 아무렇지 않게”라는 이름 없는 민중 구성원의 제라르를 향한 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카메라에 인접한 인물이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다른 민중의 총구가 카메라를 직접적·계속적으로 향했던 것처럼. 나는 앞서 <코뮌>이 파리코뮌을 긍정하지만, 낭만화하지는 않는다고 논했다. 시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안미디어의 존재는 분명 가능성이 되지만, 온전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코뮌>이 계속적으로 긍정하는 여성 프롤레타리아들의 조직인 여성동맹에 있어서도 코뮌TV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을 촬영한 것은 극중 코뮌TV의 카메라가 아닌, 보다 메타화되어 있음으로 동시대성을 지니는 가상 1871년 팩션의 카메라와 1999년 다큐멘터리 시점의 카메라이다.                                                                      

  우리는 <코뮌>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실제’가 아닐뿐더러, 영상민속지의 '원자료(source)'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러닝타임이 여섯시간이기는 하지만, 촬영은 13일 동안 진행되었다. <코뮌>은 날 것 그대로가 아니라 포스트프로덕션을 거친 픽션영화이다. <코뮌>이 촬영한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은 아니다. 또한 팩션으로서 <코뮌>이 지향하는 것은 사료의 엄격한 검증과 이를 통한 적확한 역사적 고증이 아니다. 식자층 지식인에 의해서만 남겨진 역사 문헌들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보다 <코뮌>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1871년에도 말할 수 없었던, 그리고 현재에도 말하기 힘든 ‘민중의 소리’이다. 따라서 <코뮌>은 역사 다큐멘터리로(만) 놓일 수 없다. 코뮌이 재현하고자 한 것은 1871년의 파리코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20세기의 끝자락이었던 1999/2000년의 현실이다. 코뮌TV를 삽입한 것은 이를 위한 장치였지, <코뮌>이 대안미디어라는 또 하나의 단일한 진술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낭만화한 것은 아니다. 앞서 살핀 것처럼 극중 코뮌TV는 혁명 수뇌부의 노선을 ‘읊는’ 역할을 한다.

  설령 수뇌부 역시 혁명 민중의 하나였다고 선해하더라도, ‘민중의 소리’ 역시 단일하고 일관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코뮌>은 단일한 노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민중의 목소리(예를 들어 여성동맹의 활동)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이다. 어느 정도의 동일한 대의를 가지고 있지만 ─ 역사적 파리코뮌에서도 공산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가 연대하면서도 대립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 서로 다른 관점의 수많은 진술을 재현하는 것이 <코뮌>의 지향이자 의의이다. 수개월 이상의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은, 특히 편집은 다양한 목소리 간에 일정한 통일성을 확보하는 작업이었다. <코뮌>의 복수의 시점 역시 이로써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스튜어트 홀의 접합이론이 논한 ‘접합의 조건’(Hall, 1996/2015: 177-179)을 가시화한다.     

     


V. 나가며를 대신하여: 21세기 사회주의와 혁명의 구상으로서의 <코뮌>


  안토니오 네그리는 <코뮌>을 인상적으로 보았다면서, 특히 본작의 텔레비전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완전히 새로운 형식 속에서 다시 경험되는 낡은 반란”(Lotringer & Negri, 2008/2009: 310)이었다고 평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혁명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뒤이어 계급투쟁의 측면을 논하지만, 우리는 <코뮌>의 작품분석을 통해 이 영화가 ‘생산’하려는 혁명에 있어서는 계급관계가 ─ 여전히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 충분조건이라기보다는 필요조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코뮌>은 1871년의 파리코뮌이 협의의 정치(제도적 장악과 바리게이트의 구축)와 경제(베르사유TV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비난과는 달리 원활히 운영된 조합주의 경제의 일정한 성공)적 혁명을 이루어낸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동시에 <코뮌>은 파리코뮌이 혁명은 문화정치와 생활정치의 혁명이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비전문배우들이 인터뷰를 통해 1968년을 끊임없이 소환하는 것은 이 지점과 연결되어 생각될 수 있다. <코뮌>의 팩션-1871년에서 민중들에게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일관성 속에서도 젠더, 인종, 민족적 정체성은 계급적 변수와도 충돌한다.

  가령 우리는 앞서 공간과 시각의 문제에서 여성 프롤레타리아 ─ 특히 여성동맹 ─ 의 이중억압적 상황을 살핀 바 있다. 또한 관료제적 행정기구의 말단인 문지기부터 여성동맹의 진입을 차단했던 것부터, 기껏 마련한 시청 내 장소의 열쇠를 제공받지 못한 것 역시 이들이 프롤레타리아로서라기보다는 여성으로서 겪은 억압의 지점으로 파악될 수 있다. 코뮌을 지지하는 매체(극중 <페어 뒤센>)로부터도 사용되는 여성혐오적 욕설과 비하적 어휘가 등장하기도 한다. 여성동맹의 회의에서조차 회의장 뒤편에 앉아있던 남성들은 여성들이 현실경제를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며, 거시경제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치기’를 시도한다. <코뮌>은 여기서 계속 이어지던 여성동맹의 회의 시퀀스를 갑자기 종결시킨다.

  역사적으로 파리코뮌에는 상당수의 유색인종 ─ 특히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인 ─ 이 참여했다. <코뮌>에도 유색인종(특히 흑인)은 민중의 구성원으로는 종종 등장한다. ‘Rebond pour la Commune’ 판본은 <코뮌>의 촬영에는 ‘불법 체류자’ 그룹이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고 극후반부 자막을 통해 밝히기도 한다. 하지만 극중 베르사유TV가 묘사하는 1871년의 영상에서, 그리고 코뮌TV나 제라르의 카메라를 비롯한 핸드핼드로 비춰지는 혁명의 수뇌부-인텔리겐치아 중에서도 유색인종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한편, 동유럽 출신의 연대자들 ─ 특히 국제주의적 견지에서 참전했다는, 그 중 일부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기도 하는 군사적 연대자들 ─ 은 주류문화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국영방송 베르사유TV로부터 코뮌에 대한 비난의 핵심 지점으로 활용되는 한편, 민중의 일부로부터도 의심을 사며 배격당하기도 한다.

  하승우(2017)는 혁명과 영화적 기억을 다룬 논문에서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25)의 비교대상으로 <코뮌>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코뮌>은 1871년의 상황을 번역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 때의 번역은 단순한 상황 재현이라기보다는 “혁명적 상황의 번역을 통한 오늘날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승우, 2017: 118-119)하는 것이다. 이는 <코뮌>에서 복수의 시공간과 시선들로부터 도출되는 ‘21세기 사회주의’의 구상과 직결된다.

  스튜어트 홀은 “21세기의 어떤 사회주의든 확장된 문화적, 주관적 기반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야”(Hall, 1996/2015: 351)한다고 논했다. 그리고 홀은 신사회운동, 다시 말해 페미니즘과 성정치 그리고 종족·인종의 투쟁의 장으로서의 “새로운 형태의 종족성”(앞의 책: 352)으로부터 21세기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찾는다. <코뮌>의 방점 역시 비슷하다. 프롤레타리아-여성들은 <코뮌>에서 몽마르트 언덕에서 대포를 점거하고, 국민군 사병들을 포섭하며 코뮌의 도화선을 마련하고, 코뮌의 혁명과정 전반에 걸쳐 ‘우리가 혁명의 상징’이라는 테제를 내세우며 적극 개입한다. 가령 (코뮌 상황에도 파리에 잔류한) 구체제의 문화·생활정치의 ‘장치’인 교회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코뮌>은 실질적이고 유의미한 토론자로 여성 인물들만을 배치한다. 다른 한편, 베르사유TV에 반박자료로 등장한 협동조합에서 노동하는 인원 전부가 남성이었다는 장면과 여성동맹에서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주요 안건으로 검토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있어 강렬하게 연결되어 기억되는데, 당위적으로 떨어져있을 필요가 없는 문제가 ‘현실’에서 떨어져있음이 지적된다. 또한 이후 <코뮌>은 이례적으로 통계자료 ─  가사노동분담률 및 여성 직종이 문제 ─ 를 자막 화면을 통해 제시한다. 이처럼 1871년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코뮌이 ‘번역’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이다. 이처럼 이중억압의 충돌적 상황, 혁명에 개입한/개입하는 다양한 정체성들, 현재의 사회문제를 교차 배치함으로써 <코뮌>은 “어떤 꿈을 꿀 것인가? 어떻게 그것을 고안하는가?”의 고민을 던진다. 다시 말해, <코뮌>은 역사적 판단과 현재적 적용을 통해, 한 방향으로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위계를 배치함으로써 ─ 혁명이 지금 온당한 것일지에 대해서는 극중 배우들의 발화를 통해 스스로 고민하면서도 ─ 더 이상 계급문제만으로 환원되기 어려울 21세기 사회주의를 구상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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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주석은 별도 지면에 공개한 원문을 확인.


2019년 12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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