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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Aug 09. 2020

<콘크리트의 불안>과 포스트메트로폴리스 공간의 재현

<콘크리트의 불안>(장윤미, 2017)을 도시연구 공간담론 어쩌구와 접합

1. 들어가며


1.1.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수의 영화 담론과 공간 담론이 공유하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궤적’ 논의는 근대 모빌리티로서의 기차 차창의 시각풍경-영화의 파노라마 이미지를 중첩시킨다.(전진성, 2009) 이처럼 근대 도시공간에서 영화는 공간적 고유성, 즉 도시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기록·전파·쟁점화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였다. 영화의 시각 본위 다감각성이라는 매체적 속성은 (그것이 적절히 활용된다면) 시각 본위의 다감각적 표현체 군집(김왕배, 2000)인 근대적 대도시의 도시성과 원활히 접합되며, 새로운 도시상상계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벤야민 이후로 도시공간과 매체와 예술의 장은 함께 변모해왔다. 이를테면 혹자는 에드워드 소자의 논의(<포스트메트로폴리스>)를 전용해 새로운 세기를 전후해 포스트모던 도시공간으로의 이행을 선언하였다. 영화 역시 디지털화, 감상 플랫폼, 미학적 속성, 다른 매체들의 등장 등 다양한 변화 상황과 맞물리며 변모했다. 그렇기에 오늘의 영화를 단지 근대성의 매체로 한정지을 수만은 없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는 수많은 변형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로부터, 혹은 현실을 보여주는 장르로 존속한다. 연출되고 한정된 장소에서가 아니라 로케이션을 통해 현실의 공간-장소로부터 (주로) 이미지가 기초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 자신의 새로운 매체적 변형과 미학적 실천들을 통해서도 여전히) 근대 도시뿐만 아니라 이른바 ‘포스트메트로폴리스’ 이행에 있어서도 강력한 기록수단이자 새로운 도시상상계 구축의 방식으로 유효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번 학기에 함께 살핀 바와 같이) 주요한 미학적 실천의 하나로 공간의 부각을 내세웠던 ─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국적 맥락에서 이 매체적 변화를 포착하고, 한편으로는 예술장의 변화를 추동하기도 했던 ─ 다수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1.2. 여성 감독의 아파트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 바로 현 시점 미디어의 헤드라인에는 정부기관의 관리방안과 이에 뒤따르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대치 은마’, ‘성신 시영’, ‘잠실 5단지’, ‘목동 6단지’…. 새로운 아파트들의 분양광고만으로도 바빠 보이는 미디어의 지면에 지어진지 수십 년 된 오래된 아파트들의 이름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동인은 주지하다시피 재건축 사업, 더 정확하게는 그 기저의 부동산 시장 이익의 욕망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근대 서울의 주요한 공간 구축 형태이던 아파트를 주요한 제재로 했던 일군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조류가 있다. 예컨대 같은 해(2017년) 만들어졌거나 공개된 장윤미 감독의 <콘크리트의 불안>,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 마민지 감독의 <버블 패밀리>. 이 목록의 영화들은 단지 경제논리와 욕망에 사로잡히지만은 않는다. 혹은 <아파트 생태계>에서처럼 경제논리를 부분화하거나, <버블 패밀리>처럼 경제논리를 직접 조망하면서도 내재화하기보다는 전유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 목록 영화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여성 감독들이, 자신의 개인적 시선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부각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요소의 접합 속에서, 이 때의 아파트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주류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재현하던 남성적 부동산 시장의 경제논리도, 이에 대항하던 (8·90년대 도시공간을 다룬 몇몇 한국독립다큐멘터리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액티비즘 주류의 남성적 투쟁양식도 반복하지 않았다. 이는 더 이상 정통·주류·제도권 체계에서의 이분법적 싸움이 아닌, 근대 도시에서 하위주체이던 이들의 전면화, 즉 새로운 도시 주체(Urban subject) ─ 가령 여성·퀴어·소수인종·하층계급·마이너리티·비인간 도시행위자 ─ 의 실천과 실천의 재현을 통한 새로운 장의 형성을 기획·분석한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실천적 담론(Sassen, 2017; Sennett, 2018/2020; Soja, 2000b/2019)과도 상응한다.      

  그 중에서 이 글이 주목한 것은 장윤미의 <콘크리트의 불안>이다. <콘크리트의 불안>에는 상술했던 재건축 예정 아파트들보다 더 오래된, 그리고 못지않은 유명세를 가지고 있던 한 아파트(서울 성북구 정릉 스카이 아파트)가 등장한다. 그러나 장윤미는 이 공간을 상품화하지도, 그렇다고 상품화 논리에 맞서는 투쟁의 ‘현장’으로만 다루며 결국 공간을 후경화해버리는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작품의 두 가지 감각적 구성방식(현재의 도시를 찍는 시각과,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허구를 가미한 에세이를 읽는 청각)은 모두 현실 공간 자체를 스스로의 질료로 하고 있으며, 이 때 공간은 후경화되지 않고 전면화된다. <콘크리트의 불안>의 이 전면화는 포스트메트로폴리스 분석을 수행했던 ‘공간적 전회’의 이론가 에드워드 소자(Soja, 2000a/2018)가 강조하고자 한, 도시 어바니즘의 공간적 특수성, 그리고 그의 구체적 도시(로스엔젤레스)에서의 분석과도 인접하다. 이에 따라 이 글은 <콘크리트의 불안>의 공간성을 전면화함으로써 가능했던 두 가지 세계의 영화적 배열과 결합을 다루고, 이를 공간이론 및 현실 공간의 문제, 그리고 포스트메트로폴리스 이행에서의 도시 상상계의 문제와 엮어 논의를 수행하고자 한다.        

  


2. 스카이 아파트의 공간사와 작품의 구상     


  근래의 다른 공간 다큐멘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콘크리트의 불안> 역시 “영화 외부적으로도 충족 가능한 상황이기에”(이승민, 2017, 260쪽) 정보 전달의 욕망에 천착하지 않는다. 영화의 대부분은 스카이 아파트와 인접 지역을 다룬 영상, 그리고 에세이를 읽는 감독의 나레이션의 층위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콘크리트의 불안>의 마지막에서는 “스카이 아파트(1969년~2017년)”이라는 영화 전반에 걸쳐 드문 자막이 등장한다. 자막이 지시하는 연도는 한국 사회의, 더욱이 한국 도시공간의 역사를 아는 관객을 전제하고 염두한 것으로 보인다. 연도 자막은 철거되기 전 아파트의 낡은 외관이 한국 현대사의 격동적 시기를 온몸으로 맞아 형성되었음을, 즉 역사의 흐름이 도시공간의 차원에서도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개입되었기에 공간에는 그 역사의 ‘흔적’이 삽입되어 있음을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장윤미가 영화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참고했다고 밝힌(장윤미·손시내, 2018, 226쪽 등) 박해천(2011)의 논의에서처럼, 한국 사회 개발독재의 초입부였던 정릉 스카이 아파트는 서울의 초기 아파트 중 하나로, 처음 건립된 개발독재기의 초기, 1969년만 하더라도 최첨단 근대성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부유층과 같은 도시 행위자들의 입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학과 시각문화의 차원에서도 아파트 단지라는 양식 자체가 한국의 도시공간의 ‘국가 아방가르드’의 시기에 놓인 선도적 건조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신식 아파트들의 등장, 환금성이 높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심의 부동산 시장 형성, 강남 개발 등의 요소들은 강북 외딴 동네(“도시의 끝”)의 소규모 구식 아파트였던 스카이 아파트에게서 부유한 도시 행위자 거주민을, 그리고 시각문화적 아방가르드의 기치를 이탈시킨다.

  힘 있는 주민과 문화적 가치를 상실한 스카이 아파트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가난한 이들이 진입했다. 그렇기에 도시의 ‘흉물’이나 ‘위험물’로 여겨진 스카이 아파트는, 2007년 정밀안전진단을 통해 가장 높은 재난위험시설 단계인 E등급으로 지정되었고, 주민의 대피 명령이 내려진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강남권의 주요 아파트 단지에서 재난위험시설 지정은 재건축을 가능케 해주는 부동산적 ‘축복’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스카이 아파트에서는 이주 대책이 없는 한 이 곳을 떠나는 게 여의치 않은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사정이 허락하는 사람들만 하나둘씩 떠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곳은 점차 근대적 도시 주체로는 여겨지지 않던, 심지어 도시성에 있어서는 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존재들 ─ 이를테면 무직의 독거노인이나 동물 ─ 만이 거주하고, 오가는 장소가 되어간다.

  <콘크리트의 불안>의 촬영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한 때 봉사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스카이 아파트의 ‘모양’, ‘물질성’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촬영 초기에는 지금은 희귀한 형태가 된 스카이 아파트의 모양과 집안의 구조 등을 주로 찍었다. 동의를 구해 한 주민분의 집 내부와 생활하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장윤미·손시내, 2018, 225쪽) 그런데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일체 담기지 않았다. 장윤미가 이를 영화에 일절 담지 않는 과감한 선택을 내린 것이다.

  장윤미는 어째서 오랜 기간 촬영한 해당 푸티지를 분초조차도 영화에 삽입하지 않은 것인가? 촬영해놓고 영화에 담지 않았을 그 장면을 상상해본다. 영화의 완성본에는 삽입되지 않은 이 부분의 상상은, 비슷한 시기 아파트 재건축 직전을 기록한 라야의 다큐멘터리영화 <집의 시간들>을, 다른 한편으로 비슷한 시기 스카이 아파트에서 만들어진 극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서있는 김도준의 영화 <율리안나>를 연상시킨다.     

      


3. 감독의 위치성과 폐허 - <집의 시간들>과의 비교를 통해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콘크리트의 불안>의 스카이 아파트 이후 몇 년 뒤 재건축 단지로 지정된 둔촌 주공아파트를 제재로 한다. 이 영화는 ‘가정방문 프로젝트’를 통해 각 가정의 집 내부와 생활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실제로 둔촌 주공에서 나고 자랐다는 감독의 시선에서 그곳은 노후화 되었을지언정 여전히 녹색의 수목과 젊은 창조적 계급으로서의 중산층의 세 세대, 즉 “아파트 키드”가 활동하는 ‘장소’다. <집의 시간들>은 이들을 각계각층의 다종다양한 사람들인 것처럼 다루지만, 이는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시대적 조건일 후기자본주의 중산층이라는 단일계급의 성격이다. 이들은 대단지 아파트라는 넓은 공간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었고, 넓은 대단지의 공간을 장소로 만들어내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런데 둔촌 주공과 정릉 스카이 아파트의 장소성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또한 라야와 장윤미 역시 공간을 다룬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어내기에는 엄연히 다르다. 스카이 아파트에서 장윤미는 애초에 다른 지역 출신의 비상업 영화 감독이라는 이중·삼중의 외부자이고, (크레딧 맨 앞에서 글자로 언급된 한 주민을 제외하고는) 모든 주민들 이 감독의 촬영을 못마땅해 했다. 동질화된 ‘장소’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집의 시간들>의 라야가 각 가정을 ‘방문’하고, 내밀한 시간을 기록했던 것이 감독, 주민, 관객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고 달리, 감독의 다른 위치성과 피사체와의 다른 관계로 인해 <콘크리트의 불안>의 카메라는 내밀한 곳에 진입하지 못한다/않는다. 그렇기에 최종 판본에서처럼 이 영화의 카메라는 아파트 주변을 회전하며 배회하고, 바람을 맞으며 흔들릴 뿐이다.

  <집의 시간들>의 둔촌 주공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가꿔지고 있고, 그렇기에 이 요소들의 ‘보존’ 및 ‘보전’을 쟁점화하려는 (대체적으로) 합일된 감독과 주민들이 하나의 관점으로 함께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주민들의 협조와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반면 <콘크리트의 불안> 스카이 아파트의 주민들은 삶과 공간을 영상으로 기록하기를 원치 않는다. 감독 역시 그곳에 ‘억지로’ 파고들지 않는다. 이 대조는 <콘크리트의 불안>이 <집의 시간들>과 다를뿐더러, 사회문제를 ‘고발’하려는 ‘거대한 의도’가 앞서는 근대-남성적 운동권의 다큐멘터리 운동과도 다르다는 점을 드러낸다. 감독과 (영화에서 결국 ‘대부분’ 재현되지 않은) 주민들은 이 곳이 ‘폐허’임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폐허이든 아니든 그보다는) 영상 기록을 통해 ‘폐허로 보일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폐허가 ‘될 수 있음’을 일정부분 같이 인지하고 있다.

  감독은 작품 발표 이후의 인터뷰를 통해서, 스카이 아파트를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하는 곳’으로 여기던 주류 영상매체의 시선과 이미지에 대해 피로감과 거부감이 주민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기에 <콘크리트의 불안>은 작품 내적으로 이 폐허(성)에 대한 탐구를 수행한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스카이 아파트가 주변의 상대적으로 ‘멀끔’한 다른 건물들과 시가과 청각을 동원해 비교한다. 스카이 아파트가 “빠진/빠질 이”의 비유를 통해, “예쁘지 않고”, “흔들리는”, “버려질” 것으로 다루어진다면, 그 뒤에 들어설(그리고 비슷한 과정을 통해 들어섰을 신축 건물들은) ‘새로운’, ‘튼튼한’ 이로 비유된다.

  르페브르(Lefebvre, 1974/2011)가 규명한 것처럼 고가의 고속화 도로는 공간을 고도의 도시화가 진행된 (물리적으로) 협소한 지역과, 저개발로 '추락'한 나머지 지역으로 구분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에서도 원경에는 정주환경(특히 빌딩)이 높고, 튼튼한 것으로 다루어지는 한편 원경의 모빌리티 역시 고가도로(내부순환도로) 위의 빠른 차량으로 재현된다. 반면 근경 ─ 즉 스카이 아파트와 높은 관계성의 지리적 영역 ─ 에는 고가도로 밑 어두운 그늘의 느린 차량을 배치해 공간의 분할을 재현한다. 한편, 이를 살피며 360도의 카메라 패닝을 하던 시선은 갑작스레 위쪽을 향한다. 여기서 아파트의 낡은 벽이 이 장소에 곰팡이 진 어둠-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이 공간을 타자의 영역으로 의미부여해 장소화하기보다는, 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공간성을 부각함으로써 장소화를 유보하고, 오히려 영화/감독 자신의 타자성을 찾는다.     

     


3. 타자화의 문제와 후퇴의 공간 - <율리안나>와의 비교를 통해     


  한편, <율리안나>의 ‘극중’ 스카이 아파트에는 모종의 다른 곳에서 온 도망자, 그리고 이 도망지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온 원주민이 등장한다. 보여주지만 그 무엇도 서사적으로 종결하지 않고, 그 뒤를 상상하게 하겠다는 <율리안나>의 포부는 ‘공간에 담긴 아픔’, ‘집을 잃은 도시빈민층의 삶’ 등을 다루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시도한 형식적 급진성에도 불구 <율리안나>는 결국 그 현실의 공간과 현실의 사람을 타자화한다. 자살 미수와 같은 ‘극적 사건’들 속에서 이 곳은 마치 극을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극의 공간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독 자기 고유 영역과 작품의 공간, 혹은 관객의 공간에서는 극중 스카이 아파트 공간에 대한 어떠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결국 <율리안나>의 극중 스카이 아파트는 스크린 속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다.

  반면 <콘크리트의 불안>은 다르다. 먼저 작가로서의 감독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장윤미의 작가주의적 특징 중 하나는 피사체를 타자화하지 않고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스카이 아파트의 잔류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장윤미에게 분명하게 촬영 거부 의사를 밝혔고, 때문에 <콘크리트의 불안>은 ‘물러선다’. 그런데 카메라-사람의 관계가 타자화가 이루어지기 쉬운 공간에서 <콘크리트의 불안>의 물러서기는 일회적 물러나기가 아닌 ‘전면적 후퇴의 ‘실천’이 된다. 후퇴하면서도 영화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후퇴 가능한 공간을 작품 스스로가 포착하거나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의 불안>에는 주민들이나 주민들의 내밀한 삶의 장소(실내)가 사실상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후퇴의 우선적인 공간, 즉 주민들과 실내의 장소성-이야기를 대체하며 이 영화의 서사를 끌어나가는 감각적 요소는 청각, 즉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적었던 에세이에 기반한 내레이션이다. 이 후퇴의 공간이 비시각적인 외화면 영역에 있기에, 오히려 내화면 이미지의 스카이 아파트-공간은 타자화되지 않을 수 있다. 양자 사이의 틈새 ─ 이를테면 감독의 경험은 스카이 아파트 낡은 벽면의 어린아이들의 낙서 흔적과 합입되며 틈새를 만들어낸다 ─ 로부터, 타자적 공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던 스카이 아파트와 공간과 감독의 사적영역(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에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시각과 청각 사이의 공감각적 특질, 서울 대도시 외곽과 대구 대도시 외곽의 공통적 경험, 낡고 ‘시장성’이 떨어지는 아파트로 여겨짐으로써 겪은 모멸감, 어린 아이들의 시간대. 이 공통분모는 이 두 공간 사이 경계에 놓인 구멍, 즉 다공성이 된다. 즉, 관계적 지리, 그리고 영화적 이미지의 연결망은 이 다공성에 기대어 작동한다. 이를 통해 <콘크리트의 불안>은 스스로가 타자인 공간에만 천착하였다면 발생할 수 있었던 타자화의 위험성을 피해간다.

  아울러 <콘크리트의 불안>의 완성된 판본은 <율리안나>, 혹은 자신의 초기 판본과는 달리 촬영의 ‘현장’과 영화에서의 공간 바깥에 관객의 공간이라는 또 다른 층위의 공간이 있음을 인지한다. 이 물러섬의 결과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 나는 그것이 이 영화의 의도된 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지만 ─ 공간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 때의 공간은 ‘현장’으로 여겨지는 것으로서의 촬영의 공간, 영화에서 재현되는 시/청각 ‘두 세계’의 공간, 그리고 스크린 바깥 관객의 공간이라는 다겹의 층위의 공간이다. 이 공간(들)을 전면화함으로써 다공성 구멍은 커지고, 많아진다.          



4. 나가며를 대신하여


4.1. 복수의 공간과 다공성     


  공간에는 그 곳의 기억이 흔적으로 담긴다. 다층적 시간이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공간 이미지의 다차원성이 수립된다. “여기에서 시간은 교란된다. 과거가 현재로, 현재가 과거로 돌아가며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제시한다.”(이승민, 2017, 96쪽) 공간의 역사가 사회에, 동시에 사회의 역사가 공간에 새겨져 있다는 관점은 도시공간 연구에서도 일치하는 관점이다. 20세기 전반기의 근대 메트로폴리스를 탐구했던 루이스 멈퍼드와 20세기 후반~21세기 전반기의 포스트메트로폴리스 이행을 탐구한 에드워드 소자가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도시는 언제나 이전 도시공간의 흔적을 간직하지만, 동시에 재구조화 산물로서의 영향을 재현한다. 이들에 따르면 “도시 안에서 역사의 시간은 볼 수 있는 것이 된다.”(Soja, 2000b/2019, 183쪽, 인용자 강조) <콘크리트의 불안>은 영화적 공간 이미지를 활용하여 도시의 흔적을 재현한다. 물론 이 때 도시는 ‘전체 도시’의 스케일이 아닌, 감독과 도시민 제각각의 기억에 기초한 심상의 도시에 해당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스카이 아파트의 폐허성을 부각하는 주요한 기제의 하나는 벽에 대한 포커싱이다. 건축이론가 에블린 페레-크리스탱(Péré-Christin, 2001/2005)이 말한 것처럼 벽의 물질성 성질은 그 벽으로 인해 경계지어진 공간/장소의 성질을 반영하는 한편, 그 경계의 효용을 통해 공간에 스스로의 성질을 반영한다. 영화에서 노후화된 벽의 물질성은 약 360도의 카메라 패닝을 통해 재현되며, 폐허성은 부각된다. 그런데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벽을 보다 노후화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기제는 낙서이다. 이 때의 상술한 것처럼 내레이션의 감독의 에세이, 즉 그녀 혹은 ‘외부자 개인’의 사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험과 얽히며, 청각적 내레이션과 시각적 이미지라는 두 공간 사이 경계에 다공성의 틈들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페레-크리스탱이 지적한 것처럼 낙서는 벽으로 하여금 ‘발언권’을 얻게 하여 ‘화면’으로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벽-화면은 다른 한편 영화 ‘바깥’(인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의 관객의 공간과 영화를 매개하는 스크린-화면과 클로즈업을 통해 일치 내지는 연결된다. 그럼으로써 두 세계의 다공성 틈은 영화 바깥 관객의 세계, 즉 현실 도시공간으로 개방된다. 엄격해보이던 경계가 영화의 공간 재현을 통해 접경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다공성’은 각 세계를 온전히 합일시키려는 것을 목적하지도, 실제로 합일시키지도 않는다.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이미지, 사운드, 관객이란 영화의 각 요소는 뭉개지지 않고 각 체계로서의 공간으로 유지된다. 다만 그럼에도 다공성의 틈은 각 체계-공간에서의 경험은 서로에게 이입을 통해 삽입된다. 이로써 영화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그리고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세르토적으로) 가로지를 수 있도록 한다. 이 가로지르기(trans)에서 매체로서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공간적 특수성으로 손꼽히는 세계-공간들의 관계망을 재현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메트로폴리스로부터 확장되어오며, 포스트메트로폴리스 이행에 따라 보다 다공적이 된 도시성, 이른바 ‘프렉탈도시’와 ‘엑소폴리스’ 담론이 지시하는 혼종화된 내외부 경계의 도시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영화의 미학적 실천은 접합의 가능성을 갖는다.

  이처럼 <콘크리트의 불안>은 현실의 공간 ─ 사운드로 재현되는 어린 시절의 아파트 경험, 그리고 이미지로 재현되는 스카이 아파트 ─ 을 자신의 주요한 질료로 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의 초기 촬영이 물리성에만 천착했다면, 이후 방향을 틀고 초기 촬영본을 모두 삭제하면서까지 만들어진 영화 최종본의 공간은 단지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이라기보다는, 다공성을 매개로 중첩되며 의미로 생산된 공간이다. 이와 같은 영화의 형식은 감독의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험과 공적인 재현물로만 여겨지던 스카이 아파트를 묶어내면서 공사 이분법을 해체한다. 이는 물론 앞서 살핀 것처럼 남성적 시선의 한계를 내포하던 근대적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전형적 방식과는 상이한,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도시 주체로서 다시, 그리고 새롭게 대두한 여성(주의)적 시선에 기초한다.



4.2. 공간의 전면화  


  에드워드 소자(Soja, 2000a/2018)는 르페브르로부터 유래하는 ‘사회-공간 변증법’을 발전시킨 ‘어바니즘의 공간적 특수성’ 이론을 제시하며, 도시 공간에 대한 접근에서 사회생활과 역사 자체가 ‘내재적·우연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공간성’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사회적-공간적 현상으로서의 도시를 지시함을 전제로 하되, 해석적이고 설명적인 목적을 위하여 특히 내재적 공간성을 부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은 존재할 수 없다. 이를테면 현실 도시의 공간성은 모델(model)이나 모형(matrix)을 기반으로 개념화된 교과서적 도시 이론과 달리 획일적 형태의 ‘규칙성들’에 의해 설명되지만은 않는다. 모든 공간은 물질 간 관계를 통해 존재하기에 물질 없는 공간이란 허구적 산물에 불과한 한편, “자연과 인지의 공간들은 공간성의 사회적 생산 속에 통합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현격하게 변형된다”(Soja, 1989/1997, 158쪽)는 이중의 이유에서다. 즉, 물리적 공간과 정신적 공간, 사회적 공간은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어 있으며, 공간성은 각 공간의 요소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사상들 간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간의 다중성과 장소를 구성하는 관계적 지리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박경환, 2017, 110쪽)

  앞서 살핀 것처럼 공간 이미지에 부여한 다공성은 그 공간의 이면을 드러낸다. 공간의 이면은 공간을 재맥락화하며, 낯설게 만든다. 이는 작품의 의미망을 풍요롭게 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철거를 앞둔 아파트를 주요한 재현물로 하면서도 이 곳을 ‘현장’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공간 그 자체의 전면화를 이루어낸다. 이 이미지로 재현된 공간은 겹쳐지는 내레이션의 기억적 공간, 그리고 염두에 두어진 영화 밖 공간은 다공성에 기초한 틈으로부터 의미적 연결망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관계적 지리를 재현하고 인식하게끔 한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타자화의 문제를 우려하여 사람을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다. 가끔씩 극소수의 사람들(배달부와 노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멀리서 혹은 흐리게만 다루어지며 서사 속으로 직접적으로 삽입되지 않는다.. 얼굴이 나오지 않고 그렇기에 개인화되지도 않는다. 이 연출은 같은 공간이라도 그 의미망의 작동방식에 따라서 각 도시 행위자들에게는 다르게 여겨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아파트 외부자-여성-감독,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실상 ‘유일한’ 생명체인 개와 고양이들에게 있어서 도시의 의미는 한편으로 부동산 시장, 다른 한편 투쟁적 액티비즘으로 양분되던 근대적 메트로폴리스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자신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분리하고, 다른 시간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도시 공간의 심상적 지리가 (근대 도시에서는 주된 주체로 여겨지지 못한) 하위주체들의 의미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콘크리트의 불안>은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새로운 도시 상상계 구축을 이루어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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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 (2000b). Postmetropolis: Critical studides of cities and regions. Part. 2. 이현재·박경환·이재열·신승원 (역) (2019), <포스트메트로폴리스 2부, 포스트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여섯 가지 담론>. 서울: 라움.     


다큐멘터리·영상 자료

<공사의 희로애락>, 장윤미, 2018

<깃발, 창공, 파티>, 장윤미, 2019

<버블 패밀리>, 마민지, 2017

<율리안나>, 김도준, 2017

<아파트 생태계>, 정재은, 2017

<집의 시간들>, 라야, 2017

<콘크리트의 불안>, 장윤미, 2017



2020년 6월에 씀.





이후 고쳐 쓴 버전:

플랫폼 공간주의를 통해 읽을 수 있다.

1) https://attention2.space/2021/apart-doc-posmetropolis/

2) https://attention2.space/2021/por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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