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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Aug 09. 2020

<쇼킹 패밀리>(경순, 2006) 리뷰

그렇기에 이 ‘패밀리’는 여전히 ‘쇼킹’하다.

  <쇼킹 패밀리>가 만들어진 2006년은(개봉은 2008년) 유명 극영화 <가족의 탄생>(김태용, 2006)이 만들어져 개봉된 해이기도 했다. <쇼킹 패밀리>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진 것처럼 2005년 3월의 호주제 폐지 결정은 한국 사회로 하여금 ‘가족’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생각하게 했고, 2006년의 두 영화를 그 연속선상에 배치하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당시 <가족의 탄생>이 받았던 주요 찬사 가운데 하나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가족’을 제시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일견’ <가족의 탄생>의 새로운 ‘가족’은 <쇼킹 패밀리>의 감독과 딸이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쇼킹 패밀리>의 대표 스틸컷에서 감독 ‘경순’은 ‘화장실에 앉아’ 다이애너 기틴스의 책 <가족은 없다>를 읽었다. <쇼킹 패밀리>를 <가족의 탄생>과 비슷한 방식으로 읽어내는 것은 정당한가?     

  물론 <가족의 탄생>이 (김태용 스타일의 온건한 방식으로) 극을 통해 꼬집었던 것들은 <쇼킹 패밀리>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적대시된다. <쇼킹 패밀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CF 자료화면을 연기자들을 통해 재구성해 풍자·조롱·전유한다. 중·노년 남성 노인을 주축으로 구성된 호주제 유지 집회를 ‘그대로’ 삽입함으로써 현실과 맞지 않음을 꼬집는다. 카메라 앞에서 ‘경순’은 딸이 받아온 학교의 아버지에 대한 설문 조사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내뱉는다. 모임의 영어교사인 빈센트를 경유해서 영화는 입양아 해외 ‘수출’ 국가이던 한국이 ‘혈통’을 중요시한다는 모순을 비꼰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여성혐오의 결합을 비판한 영화의 방식은 ─ 특히 2000년대 스타일의 타이포그래피는 ─ 20세기말~21세기초 이른바 운동권 식의 영상 선전물을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그런데 <쇼킹 패밀리>를 단순한 선전 영화로 두고 논의하는 것은 곤란하다. <쇼킹 패밀리>가 호주제 폐지를 ‘성과’나 ‘진전’으로 놓고, ‘국민적 정서’를 이유로 “멈춰선” ‘여성계’의 경향을 공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부분에서 이 영화는 가장 활동가적이고 ‘운동권’적이었다. 제도권에 들어간 과거의 동료들의 정체(停滯)를 비판하는 구도를 우리는 운동권 선전물에서 익히 보아왔다.      

  그럼에도 내가 <쇼킹 패밀리>가 단순한 선전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은 영화와 재현대상인 자기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다는 지점에 있다. 영화의 자기 확신이 없지만 성찰적인 태도는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감독이 딸의 머리를 함부로 짜른, 그리고 울며 화내는 딸의 모습을 재현한다. 영화에 두 차례 배치된 이 장면에서 한 ‘이모’는 내레이션으로 이를 ‘알콩달콩’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영화는 제작진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이모’들은 이를 ‘귀여운’ 상황을 보는듯한 표정을 비춘다. 그러나 이 배치 이전과 이후에 감독과 ‘친구’들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권력관계가 존재함을 분명히 말하고 보여줬다. 감독과 ‘친구’들이 자신의 (협의적 의미의) 가족에서 겪었던 일화들을, 감독은 자기와 딸의 관계에도 일정부분 비슷한 구도가 형성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알콩달콩’이라고 말해줬던 폭력성은 카메라에 담기고, 편집과정에서도 잘려나가지 않고 영화에 포함된다. 다른 한편,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딸을 ‘그녀’라고 하나의 (자기 영역을 가진, 즉 거리를 갖는) 인격으로 다룬다. 그러나 재현된 ‘현실’에서 감독이 엄마라는 권력우위에서 초등학생인 딸에게 하는 일종의 폭언을 담아낸다. 이는 제작진이 자기 가족에서 들었던 폭언과, 그리고 들었다고 증언하는 폭언을 관객에게 연상케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를 담아내는 행위 자체도 자기반성·성찰적이면서도, 동시에 폭력적일 수 있다. 2인 가구의 유일한 성인이자 경제권을 가진 어머니가 딸을 다큐멘터리에 담아내는 것은, 그 딸이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위력에 의한 허락이지 온전한 허락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이 <쇼킹 패밀리>에 가해질 수 있는 ─ 가해질 것을 영화 자신도 감내하고자 하는 ─ 비판은 흥미롭게도 호주제 폐지로 여성 역시 세대주가 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모든 것’의 중심에 배치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꼬집는 다큐멘터리의 문제의식과도 상응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쇼킹 패밀리>에서 스탭과 ‘친구’들은 감독의 딸에게 ‘이모’ 등으로 불린다. 더욱이 <쇼킹 패밀리>에서 해외여행을 갔던 감독 모녀, 그리고 ‘친구’ 모자가 담긴 네 명의 단체사진은 <가족의 탄생>의 포스터로 쓰이기도 한 극중 ‘가족’의 단체사진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가족의 탄생>이 그랬던 것처럼 ‘대안가족’이나 ‘유사가족’의 가능성을 찾고 봉합하는 것은 ‘쉬운’ 방식의 “성과”이자 “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과’나 ‘진전’을 문제 삼으며 여기에 정주하지 않으려 했던 이 영화의 일정부분 이상주의적인 문제의식을 떠올려본다면, <쇼핑 패밀리>는 혈통 중심의 가족은 물론 대안가족, 유사가족의 범주에 멈춰서지 않으려는 보다 급진적인 시도로 논해질 수 있다. “알콩달콩”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안·유사 가족 역시 ‘가족’이며, 이 때의 가족은 여전히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엄마는 재현대상-딸에게 ‘너는 가족이라는 표현을 너무 좋아한다’고 지적한다. 같은 선상에서 영화 초반부의 가족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한국 사회의 교육 병폐를 지적하였던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딸을 ‘그녀가 재밌게 살 것이라 예상된다’며 긍정한다. 이들은 분명 모녀 관계이지만, 가족이라는 관계에 갇히지 않으려 한다.

  “가족보다는 친구들”이라는 영화의 표현은 그렇기에 보다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물론 한국사회에도, <쇼킹 패밀리>에도 ‘가족’은 실재·현존한다. 그러나 ‘가족은 없다’라는 기틴스 책의 선언적 문구에서처럼, 그리고 친구와 동료들이 딸의 밝은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처럼. 이 영화는 어떤 ‘가족’으로도 묶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친밀·밀접할 수 있는 관계-결합체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따라서 여전히 ‘가족’이 중시되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소스와 편집이 다소 ‘올드’해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전히 급진적이다. 그렇기에 이 ‘패밀리’는 여전히 ‘쇼킹’하다.


2020년 4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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