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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Aug 09. 2020

마셜 맥루언 발제하기: 모자이크적 글쓰기의 재구성

미디어-공간적 재검토를 위한 재구성하기 (재구성을 시도해봄)

Text

McLuhan, M. (1964). The medium is the message, In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 (pp. 23-35, 63-67). NY: Signet.   

  


1. 들어가며


1.1. 맥루언의 생애와 궤적


  1911년 캐나다에서 출생한 마셜 맥루언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문학 연구로 영문학자로서(의) 자신의 학문적 궤적을 시작한다. 초기 맥루언은 ‘과학 시대’ 이전에 향수를 갖고 과학화에 따른 상업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과학을 통한 진보’를 핵심 의제로 하던 전후 북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당대 지성계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학술적 연구 대상으로 채택한다. 이는 토론토 대학에 부임하여 해당 분야의 선구자적 연구를 수행했던 해럴드 이니스와 친교 관계를 구축하게 된 맥루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Coupland, 2009/2013, 119-135쪽) 맥루언은 이니스와 교류하던 시기의 글을 모아 <기계 신부: 산업 인간에 관한 이야기>(1951)를 출간하는데, 이 저서는 전기의 맥루언과 후기의 맥루언을 연결하는 교두보로 평가된다. <기계 신부>가 대중사회의 물리적 생산물에 관심을 두었던 맥루언의 마지막 공식저작이자, 커뮤니케이션 양식과 무의식적 메시지 연구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앞의 책, 128-130쪽)

  맥루언은 1960년대초 <구텐베르크 은하계: 문자인간의 형성>(1961)과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의 출간하는데, 이 저서는 곧 그의 주저로 알려지며 그에게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이론가로서의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했다. 그는 60년대 중반 광고업자 하워드 고세이지의 지지를 바탕으로 영미 지성계과 미디어계의 ‘샐러브리티’로 올라섰으며(McLuhan & Staines, 2003/2007, xvii), <미디어는 마사지다>(1967)의 출간 이후에는 팝 아티스트로 여겨진다.(Coupland, 2009/2013, 174쪽) 한편, 맥루언의 논의는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수용·해석되는 과정을 거쳐 대륙 지식세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송태현, 2007)

  그러나 맥루언의 도발적인 글과 활발한 미디어 출연은 60년대말과 70년대를 거치며 비판자들의 다양한 반박에 부닥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존 바스는 “우리들 ‘인쇄물 위주의 잡놈들’은 이제 퇴물이 되었다는 맥루언의 마녀의 노래가 요란하게 들려왔다”는 표현을 쓰며 맥루언에 대한 감정적 반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했다.(김종운, 1993, 225쪽) 1980년 그의 사후 비평가들, 특히 “뉴욕 평단은 맥루언의 이론은 신중함이 부족하고 이제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루이스 래펌이 <미디어의 이해> 1994년판 서문에 쓴 문장처럼 “이러한 판결은 성급한 것이었다.”(McLuhan, 1964/2002, 7쪽) 90년대초 인터넷이 대중화를 비롯한 20세기말 매체환경 변화 속에서 맥루언과 그의 저작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선지자·에언가적인 지위를 (다시금) 획득하게 된다.(McLuhan & Staines, 2003/2007, xvi) 당시의 ‘신(新) 맥루언주의자’들은 가상현실과 사이버공간의 감각·심리·사회적 영향이 맥루언주의와 가상성 담론을 만나도록 하여 <미디어는 메시지다>의 테제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Horrocks, 2000/2002)          



1.2. 모자이크적 글쓰기


  맥루언은 “미디어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McLuhan & Fiore, 1967/2001, 26쪽)고 논한다. 그러나 “미디어의 원리와 특성들을 식별할 수 있으려면 구조나 미디어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미디어는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그 전제를 주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과 통제는 이처럼 무의식적인 자기도취 상태를 피할 때 가능하다.”(MuLuhan, 1964/2002, 46쪽) 이는 맥루언의 글쓰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맥루언의 중후반기 저작은 (당대로서는) 새로운 형식의 도발적 글쓰기였으며, 학계 안팎의 많은 문헌과 자료를 비판적으로 재조망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맥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글쓰기 방식에서 탈피한 ‘모자이크적 글쓰기’를 제언했으며, 그 스스로의 저작에서 이 글쓰기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McLuhan, 1962/2001, 503쪽) 모자이크적 글쓰기는 맥루언 자신이 주장하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선형성, 균질성, 그리고 획일성을 부정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평가된다. 루이스 래펌은 <미디어의 이해>의 맥루언의 사고가 맥루언이 전자 미디어에 부여한 인식론적 특성을 충족한다고 보았다.(McLuhan, 1964/2002, 8쪽) 그러나 이는 맥루언이 받는 찬사(‘미디어의 예언자’)의 어두운 면으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이론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예언과 같이 구체적 분석과 논리적 완결성의 결여되었다는 것이다.(심혜련, 2012, 126-127쪽) 조너선 밀러는 맥루언이 책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을 선형적으로 전개하기를 꺼리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논한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자 할 때, 책-미디어의 특성을 완전히 거부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Miller, 1971/2001, 12-13쪽)

  맥루언은 “정보와 정보가 마주칠 때 그 결과는 놀랍고 효과적”이라고 논한 바 있다.(McLuhan; Coupland, 2009/2013, 96쪽 재인용) 이 지점에서 스탬스와 그로스윌러 등의 연구자들은 맥루언 매체이론의 반 폐쇄적이고 개방적인 형식을 벤야의 몽타주적 글쓰기-매체이론과 결부하기도 한다.(김균·정연교, 2006, 137쪽) 벤야민 역시 이미지의 대중화를 경험하며 인용문만으로 이루어진 책의 구상으로 ‘몽타주적 글쓰기’를 제안한 바, 둘의 글쓰기 방식과 지향은 유사하며, 따라서 맥루언과 벤야민 간 매체와 글쓰기 방식을 상호관계 차원에서 비교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심혜련, 2012, 127쪽) 하버마스는 벤야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학문적 그리고 더 나아가 정치적 입장이 결정될 수 있다”(Habermas, 1972, pp. 175-177; 앞의 책, 39쪽 재인용)고 평했다. 심혜련은 이 언급을 벤야민의 논의가 그의 글쓰기 방식으로 인해 각 분야 해석자들의 이론적·정치적 지평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것으로 논한다.(앞의 책, 39쪽) 뒤이어 심혜련은 맥루언의 모자이크적 글쓰기에 유사하게, 저자로서의 맥루언은 “독자에게 각각의 모자이크 조각을 그냥 줄 뿐이며, 이 조각들을 가지고 나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로 독자의 몫”(앞의 책, 127쪽)이라는 독해 방식을 제시한다.

  이런 선상에서 맥루언이 개발했다는 독서법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새로운 책을 보면 우선 69쪽을 펼치고 거기서 뭔가 인상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Coupland, 2009/2013, 97쪽) 유사하게도 래펌은 <미디어의 이해>가 “텔레비전 카메라의 양쪽(제작과 소비)에서의 나 자신의 체험에 확신을 부여한다. 그리고 …… 이 책을 꼭 앞에서부터 읽어나갈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어디를 펼치든 독자들은 거기에서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McLuhan, 1964/2002, 13쪽)이라 평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미디어의 이해>의 첫 번째 챕터답게도 모자이크적 글쓰기의 방식을 적극 활용하여 선형적 구조와 논지전개 방식을 배제하고, 또한 텍스트 내부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부연설명을 생략하고 있다.(앞의 책, 12쪽)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패턴을 찾아내서 이를 구조화하려 한다.”(McLuhan; Coupland, 2009/2013, 5쪽 재인용) 맥루언의 독자는 ─ 발제자는 ─ <미디어는 메시지>를 비롯한 맥루언의 저술을 스스로 구성하고, 활자 출간물이라는 문자 문화적 미디어의 조건에서 독해해야 했다. 맥루언이 지향한 모자이크적 글쓰기와 수업 발제의 취지 사이에서 본 발제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의 논의들을 중심으로 두되, 맥루언의 다른 저작 및 강연·대담록, 그리고 관련한 논의를 수시로 오가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2. 쿠텐베르크 은하계: 문자-활자 시대와 시각 중심성


  앞서 다룬 것처럼 맥루언의 모자이크적 글쓰기의 지향은 이른바 쿠텐베르크 은하 체계에서의 탈피였다. 맥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의 서두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서구 문화에서 충격으로 여겨진다고 비판한다. 서구 문화는 모든 사물을 통제의 수단으로 보는 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기에,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가 주는 개인적·사회적 결과들이 확장물이나 기술에 의해 인간사에 등장하게 된 새로의 척도들이라는 주장조차 수용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인류는 수세기 동안 전형적이고 전면적인 실패를 거듭해 왔다. 미디어의 충격을 무비판적, 순종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미디어는 그 사용자를 벽 없는 감옥에 가두어버렸다.”(McLuhan, 1964/2002, 54쪽)

  맥루언의 서구 문화에 대한 사적 분석은 미디어-형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쿠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매체를 중심으로 (서구) 인류의 역사를 4개의 (발전) 단계로 분절해 논한다. 구술 중심의 부족문화, 문자 중심의 필사문화, 인쇄술 발전으로 등장한 ‘구텐베르크 은하계’, 그리고 전기 시대가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분류 방식은 정치, 사회체계, 경제를 중심으로 역사를 분류하기 보다는 명확하게 그 시기의 지배적인 미디어를 중심으로 역사를 구분했다는 시도로, 특히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중심이 되었다는 지점에서 독특한 것으로 논해진다.(심혜련, 2012, 130쪽) 그는 한 시대에 (새로운) 지배적 매체가 등장하면, 이는 곧 문학, 예술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이 일어난다고 파악했다. 이를테면 그는 로드베르투스와 피어슨 등의 고대 사회경제사 연구를 화폐의 미디어적 관점에서 재독해하는데(McLuhan, 1962/2001, 15-16쪽), 이런 관점은 17세기 일본의 화폐경제 침투에 대해 화폐를 감각 생활의 확장이며 또한 감각 생활을 재편한 기제로 파악한 <미디어는 메시지다>에서 발전되어 전개된다.(McLuhan, 1964/2002, 51쪽) 단, 미디어를 중심으로 구분된 맥루언 식의 역사 발전단계는 모든 사회가 한 시기에 동시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일부 문화권은 쿠텐베르크 은하계의 인쇄 시대를 본격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바로 전기시대의 미디어(가령 텔레비전)를 경험한다.(앞의 책, 53쪽) 혹자의 진화론적 이해는 “맥루언의 ‘비시각적’ 역사분석을 ‘시각적’ 모델의 틀 속에 집어넣어 평가할 때 생기는 오류의 성격이 강하다.”(김균·정연교, 2006, 102쪽)

  <미디어는 메시지다>에서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다루며 중요하게 언급하는 전 세기의 학자가 바로 알렉시 드 토크빌이다. 토크빌의 주저 <미국의 민주주의>(1835)가 미국에 대해 다룬 것은, 미국에서는 모든 법률이 하나의 사상계열에서 나오기에 사회 전체가 단일한 사실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었다. 미국 사회의 ‘모든 것’이 단일한 원칙에 유래하기에, 그 중심만 찾으면 ‘모든 것’을 한번에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은 미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수많은 교차로로 이루어진 사회로, 각 방향의 길들을 가보아야만 전체적인 상을 파악할 수 있다.(Tocqueville, 1835; McLuhan, 1964/2002, 44-45쪽) 맥루언은 토크빌의 이와 같은 언급을 미디어의 견지에서 재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인쇄된 말'(printed word)이 프랑스 혁명기 프랑스 국민을 동질화시켰으나, 영국에서는 관습법과 구술의 전통이 중세 의회제도의 지지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시각 중심의 새로운 인쇄 문화가 갖는 획일성과 연속성이 사회를 장악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중대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역시 신생국가로 애당초 폐기해야 할 중세적 법제가 없었던 까닭에 토크빌의 분석이 유효했다고 평한다. 맥루언에 따르면 토크빌의 영-미 비교는 “일양성과 연속성을 만들어낸 것이 인쇄 문화와 인쇄술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쇄의 문법은 구술로 된 비문자적 문화와 제도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앞의 책, 45-46쪽) 물론 이는 앞서 다룬 모자이크적 글쓰기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맥루언의 역사 발전단계 모델이 특히 주목한 것은 ‘감각들의 상호작용’이다. 맥루언적 관점에서 인간이 오감을 이용해 “외부 세계를 지각하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오감이 상호작용하고 또 상호의존성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심혜련, 2012, 131쪽) 하지만 “어떤 기술이 한 문화권 내에서 혹은 외부 문화권에서 도입되어 우리의 5개 감각 가운데 어떤 하나의 감각을 강조하고, 그것이 전체 감각들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을 상승시키게 되면 우리의 5개 감각들 간에 지배 비율은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전과 같이 느끼지 못하게 되며, 우리의 눈, 귀, 혹은 다른 감각 기관의 감각은 전과 같을 수가 없게 된다.”(McLuhan, 1962/2001, 56쪽) 그런데 “이런 변화는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승인 여부에 관계없이 일어난다.”(McLuhan, 1964/2002, 51쪽) 맥루언은 이 때의 감각들의 상호작용을 마취 상태로 비유하는데, 특정한 감각의 강도가 고도로 강화될 때 여타의 감각들이 마취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발생한 감각들 간의 비율의 파괴는, 일종의 그 전 미디어 체계의 인간에게 있어서 정체감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맥루언에 따르면 기존의 역사가들은 표음문자로서의 알파벳-미디어의 “사고와 그것이 사회 조직 형식에 미친 혁명에 관한 연구를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였다.”(McLuhan, 1962/2001, 15쪽) 반면 맥루언은 알파벳 문화와 인쇄 문화가 갖는 폐해를 지적하고자 한다.(앞의 책, 25쪽) 그는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낳은 가장 주요 영향을 “감각들을 서로 떼어 놓고, 그리고 실체의 질감을 느끼는 촉각적 공감각 속에서 그들 다양한 감각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에 간섭하여 방해하는 것”(앞의 책, 42쪽)으로 파악하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 문자 중심의 필사문화 시대와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시대에 중심이 되었던 감각은 시각이다. 특히 인쇄-활자 문화가 억압한 감각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시각’은 다른 감각들을 지배하는 폐쇄적인 감각체계로서 우위를 점한다. “감각이 분열되고,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앞의 책, 111쪽)이다.

  시각 우위의 인쇄-미디어는 “다섯 개 감각의 상호작용 속에서 혹은 집합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한”(앞의 책, 21쪽) 폐쇄된 체계에 해당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에서는 이러한 시각-문자 주도 미디어 단계가 “규칙적이고 연속적인 유형으로 행동하게끔 하는 기술의 요구에” “제대로 순응할 수 없는 사람”(특히 어린이, 장애인, 여성, 유색인)을 부적응자로, 불의의 희생자의 위치에 두는 경향을 지적한다. 시각의 감각으로 “동질화된 문화에서는 계량적인 관찰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지능검사(IQ 테스트)는 그 예시가 되는데, 검사자들은 “활자 문화의 문화적 편견들에는 주목하지 못한 채” 시각 문화의 “획일적이고 연속적인 습관이 지능의 표시라고 전제하고, 귀의 인간, 촉각의 인간은 배제”한다.(이상 McLuhan, 1964/2002, 49쪽)

  이는 서구 문화의 이전 단계에 있던 ─ 혹은 동시대 다른 문화권의 ─ 부족문화, 그리고 서구사회가 진입하게 된 전기문화 시대와 구분되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기술적 조건이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유기적 기능에 모두 일률적으로 효과적인 것은 아”(McLuhan, 1962/2001, 25쪽)닌 까닭이다. 맥루언이 칼 폴라니를 경유해 설명했던 것처럼 쿠텐베르크 은하의 원리는 “형식(forms)과 기능(functions) 간의 분리에 의해 우리가 잘 아는 실용적 삶에 있어서의 진보와 유용성”(앞의 책, 512쪽)을 추구한다. 폴라니가 뉴턴 역학적 반향으로 인한 ‘자율 규제’의 서구 18-19세기 사회로의 침투(흡수)를 논했던 바와 같이(Polanyi, 1944/2009, 208-237쪽), 유용성을 담지한 시각적 ‘방법’의 적용은 구텐베르크적 기계화 과정에서 하나의 자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단계에 이르러(McLuhan, 1962/2001, 513쪽) 지속된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획일적인 시간과 획일적이고 연속적인 공간의 추상적이며 명시적인 시각 기술”(앞의 책, 45쪽)은 (서구의) 환경을 지배했다.       


   

3. 재편된 은하계: 전기 시대, 재부족화, 미디어와 메시지의 등식, 문화 지체


   맥루언에 따르면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 전신(telegraph)의 발명과 함께 침해되기 시작했다.”(McLuhan, 1962/2001, 482쪽) 시각 중심으로 형성된 인쇄-미디어 문화는 “자신이 주술적이며 마법적인 청각 세계를 붕괴시켰던 것처럼, 그 자신도 종말의 시간을 맞이한다.”(심혜련, 2012, 133쪽) 전기와 전기적 미디어의 등장은 그 내용과 무관하게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만들어버렸다). 원인들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계열이나 연쇄 속의 사물들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다.(McLuhan, 1964/2002, 41-42쪽) 맥루언은 이전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부별되는 전기 시대의 미디어-체계를 ‘재편된 은하계’로 논한다.(MuLuhan, 1962/2001, 503쪽)

  맥루언은 구술 시대-문자 및 활자 시대 시대-전기 시대로의 이행 과정을 기독교적 비유에서 낙원, 실낙원, 복락원의 단계로 파악한다.(송태현, 2007, 223쪽) 그에 따르면 구술 시대/사회의 인간은 전 부족원이 함께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하고 직접 의사소통을 하면서 모든 감각기관을 사용했다(사용한다). 그런데 표음문자로서의 알파벳 발명의 문자 시대와 구텐베르크 활자의 활자 시대에는 “감각간의 분열, 기능간의 분열, 작업의 분열, 감성적 국가와 정치적 국가의 분열, 목표의 분열이 진행”(MuLuhan, 1962/2001, 90쪽)되고 이는 서구인을 동양의 표음문자권과는 다르게(앞의 책, 100쪽) ‘탈부족적’ 개인주의와 시각 본위로 재편했다. 반면 전기 시대의 미디어는 이전 시대에 비해 무척 빠른 전기 속도를 매개로 사회를 ‘재부족화’한다. 재부족화는 ‘재편된 은하계’는 ‘전문화를 촉진하지 않는’ 전기 기술에 기인한다.(Coupland, 2009/2013, 166쪽; McLuhan, 1964/2002, 59쪽)

  전기 시대의 시초적·순수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전깃불’은 전기의 속도와 그것의 전체적인 장의 확보는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McLuhan, 1964/2002, 43쪽) 그 자체는 순수한 정보에 해당한다. 특정 형태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메시지가 없는 미디어에 해당한다. 이것이 미디어의 특징이 된다. 미디어의 내용이 언제나 또 다른 미디어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내용이나, 내용의 작성 방법에 관계없이 미디어 그 자체가 작용한다.(앞의 책, 39쪽) 이로써 이전 시대의 막연하던 “통일체로서의 형식과 기능에 대한 일정한 감각”은 점차 교육이론과 수학의 분야의 구조적·집합적 발전을 비롯한 구조·구성의 통합적인 사고로 확산된다.(앞의 책, 43-44쪽)

  분명 인간의 행위, 결사의 규모와 형태를 형성·제어하는 것은 미디어지만, 미디어의 내용이나 용도가 너무 다양하기에 “인간의 결사의 형태를 갖추는 데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미디어의 내용으로 인해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 것이다. 가령, “전깃불은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앞의 책, 37쪽) 많은 논자들이 전깃불이 표시하는 ‘내용’에 주목하지만, 맥루언 자신이 파악한 바와 같이 전깃불의 미디어-메시지, 즉 “인간의 결사에서 시간적, 공간적 요인들을 제거한다는” 전력과의 공통점, 그리고 전보·라디오·전화·텔레비전 미디어와의 유사성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맥루언은 이를 흡사 미디어로서의 철도가 아닌 “철도라는 미디어가 운반하는 화물이나 내용”에만 관심을 갖는 격이라고 비판한다.(이상 앞의 책, 36쪽)

  앞선 구텐베르크 시대의 문자 문화는 서구 사회의 ‘탈부족화’를 불러왔다. 비서구 문화권의 “토착민”은 “자신들을 집단적인 부족의 세계에서 끄집어내 개개인으로 고립시키는 문자 문화에 대처하지 못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에 따르면 전기 미디어의 등장으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문자 문화에서 거주하던 서구인 자신은 비서구의 “토착민”과 “동일한 홍수를 경험한다.”(이상 앞의 책, 48쪽) 맥루언은 뒤이은 <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에서 이를 문화 지체 현상으로 논한다.(앞의 책, 59쪽) 문화 지체는 전기 시대와 함께 등장한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이들의 전기 속도에 의해 서구인이 감각 마비 상태에 빠트리는 형태로 전개된다(앞의 책, 48쪽) 이는 서구 문화에서 자연화된 구텐베르크적 체계가 시공간 관계의 시각화 없이는 “삶의 질서를 기계론적인 인과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MuLuhan, 1962/2001, 47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에서는 “소리의 의미가 많이 상실된 상태이며, 사람들은 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놀랄 만한 능력을 개발하였고, 또 개발하지 않으면 안”(Carothers, 1959; 앞의 책, 47쪽 재인용)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4. 매체와 감각: 청각성, 촉각성, 공감각성


  주지하다시피 맥루언에게 미디어는 인간(감각)의 확장이었다. 그에게 특정 감관의 사용은 지각 형식의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김균·정연교, 2006, 206쪽) 이에 맥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의 인쇄 문화를 시각 중심이라 비판하는 한편, 텔레비전을 비롯한 전기 시대의 ‘재부족화’로 복원된 청각 중심성을 긍정한다.(심혜련, 2012, 146-147쪽) 그에 따르면 “눈은 귀와 같은 섬세함을 지니지 못하고 있”(McLuhan, 1962/2001, 61쪽)다. 맥루언은 또한 말기(1979년)의 강연에서 현대의 전자기술 환경을 가진 세계가 ‘동시성과 즉시성을 주된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청각에 의존하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시각에 의한 세상은 특정한 관점을 갖지 않고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귀를 이용한 청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McLuhan & Staines, 2003/2007, 402쪽)고 논하기도 했다. 시각적 공간이 서구 알파벳 전통의 연속적 부작용이라면, 청각적 공간은 인류 문화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누구나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의의를 갖는다는 것이 맥루언의 주장이다.(McLuhan & Powers, 1988/2005, 46-48쪽) 그렇다면 맥루언은 청각 중심주의자인가?

  혹자는 그를 단순히 청각 중심주의자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고 논한다.(심혜련, 2012, 146-149쪽) 맥루언의 논조가 청각 문화에 매우 우호적이기는 했으되, 단일 감각이 지배적인 문화를 옹호하는 시각 중심주의자들을 비판하며, “다섯 개의 감각이 서로 공감각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열린 감각 체계”(McLuhan, 1962/2001, 68쪽)를 강조했다는 이유이다. 맥루언에게 시각적 공간이 “획일적이고 서로 관련된 종류의 조직화된 연속체라면 청각의 세계는 동시적인 관계의 세계”(McLuhan & Fiore, 1967/2001, 111쪽)였다. 맥루언은 재편된 은하계를 이전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달리 “책만이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 아닌, 지식의 원천이 다양한 세상”으로 논했으며, “한 가지 종류의 문화에 의해 인류의 모든 잠재력을 구획짓는 것”(McLuhan, 1962/2001, 68쪽)을 경계하기도 했다. 맥루언에게 청각은 분명 중요한 감각이었지만, 다른 종류의 감각을 지배하기보다는 공존하는 것이었다.

  <미디어의 이해>가 출간된지 3년 후인 1967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표현은 이미 진부한 유행어가 되어 있었다.(Coupland, 2009/2013, 174쪽) 이에 맥루언은 <미디어는 맛사지다(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흡사 자기풍자적으로 보이는 단행본에 공저로 참여한다.(McLuhan & Fiore, 1967/2001)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명제는 미디어가 “실제로 인간의 삶에 들어와 대중을 잡아두고 거칠게 주무르고 있다는”(McLuhan & Staines, 2003/2007, 106) 함의인 동시에 말 그대로 인간 신체의 확장-미디어의 촉각성에 대한 강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맥루언을 촉각중심주의라고 논할 것인가?

  맥루언에게 있어서 촉각은 오감의 상호작용이 바로 ‘촉각’으로 나타난다는 지점에서, 오감 중 하나로서의 촉각을 넘어서는 “감각들의 역동적인 통일”(Kloock & Spahr, 2000, p. 54; 심혜련, 2012, 147쪽 재인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의 청각 강조가 “귀는 특정 ‘견해’를 편애하지 않”(McLuhan & Fiore, 1967/2001, 111쪽)기 때문이라면, 촉각 강조는 단순한 촉각이기보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월터 옹의 지각 이론을 계승하여 보편적 감각으로서의 통감각(sensus communis; common sense)를 끌어내고자 한 것이다.(임상원·이윤진, 2002, 290-291쪽) 다시 말해 맥루언의 청각과 촉각의 강조는 이들을 정말로 지배적 감각의 위치에 올리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시각의 지배를 탈피해 오감으로 ‘함께 지각하기’로서의 공감각에 대한 강조에 가깝다.(심혜련, 2012, 148쪽)           



5. 나가며: 미디어-공간적 재검토


  그런데 우리는 맥루언의 미디어 논의가 협의의 미디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잘 알려진 사실에 다시금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미디어의 의미 탐구에 천착한 이론가였고, 이 때 그의 미디어 인식은 문학, 고전학, 미술, 건축, 음악, 철학, 경제사, 사회사 등 다방면에 걸쳐있다.(임상원·이윤진, 2002) 이러한 시도는 그가 수차례 강조한 구텐베르크 은하-뉴턴주의적 전문화에 대한 비판이자(McLuhan, 1962/2001, 514쪽), 그가 파악한 “포괄적 인식으로 대변되는 모자이크적 세계로 대체되고”(McLuhan, 1995, 김균·정연교,, 2006, 128쪽 재인용) 있는 재편된 은하계와의 호흡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기 시대의 도래는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침해’된 분명 가장 중요한 계기였지만, 재편된 은하계의 부별은 단지 그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맥루언에게 매체는 단순한 매체 또는 기술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매체는 하나의 환경을 의미한다. …… 더 나아가 매체는 그 매체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 사유방식, 지식 그리고 관계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제조건이다.”(Mersch, 2006, p. 108; 심혜련, 2012, 135쪽 재인용)

  이상을 전제하고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해체’라는 일종의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맥루언의 논의를 살펴보자. 전신의 발명으로 “침해”받기 시작한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이론적으로 1905년 곡선형 공간의 발견과 함께 해체되었다.”(MuLuhan, 1962/2001, 482쪽) 맥루언은 휘터커(Whittaker)의 논의를 빌려, ‘뉴턴적 공간’이 기하학적 ‘유클리드 공간’이었다고 논한다. 휘터커가 논한 ‘유클리드 공간’은 무한하고, 동질적이며, 완전히 아무런 속성이 ‘없음’을 그 속성으로 한다. 즉, 구텐베르크 은하계-뉴턴주의의 공간은 “사물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빈 곳”으로서의 중성적 공간(neutral space)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맥루언은 획일적 시공간에 기초하여 명시적 시각을 중심으로 한 기술의 지배를 서구 문화의 특성으로 꼽는데, 이는 시공간이라는 양대 축으로 “어떤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뒤따르는 시계열상의 현상으로 파악”(앞의 책, 45쪽)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간을 중성적 용기(neutral container)로 표현하던 이전 시대 논의를 “어리석은 행위”라 비판하며, “시각만을 다른 감각으로부터 분리한 시각 중심의 문화”였기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수용된 것이라 논한다.(앞의 책, 483쪽) 그가 곡선형 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공간 개념이 제시된 구체적 시기(1905년)에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해체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 까닭이다. 아인슈타인적 곡선형 공간의 인식으로 “선형적 전문주의와 고정된 시점주의가 종결됨과 동시에, 현실 세계와 먼 단편화된 지식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앞의 책, 483쪽)는 것이 맥루언의 주장이다. 그는 여기서 시감각이 지식을 무분별하게 분리했던 것을 쿠텐베르크 은하계의 특성으로 꼽으며, 이를 ‘환상’이었다고 논한다. 이처럼 “미디어 하나하나는 모두 다른 미디어나 집단들을 꺾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McLuhan, 1964/2002, 54쪽)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논의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주제를 간략하게 제시하며 발제문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맥루언의 ‘지구촌’(Global Village)에 대한 재검토이다. 지구촌은 앞선 1945년, SF작가 아서 C. 클라크의 <외계로부터의 전달>에서 제시된 지구의 미래상이다. 이에 대해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 서두에서 “지구는 전기의 힘으로 응축되어 하나의 촌락이 된 것”이라며 현재 시제로 논한다. 문자-활자 시대 인간 신체의 기술적 확장이 전기 시대에 돌입하며 “극적 반전을 일으켜 압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앞의 책, 32쪽) 그런데 이후 현대의 지구촌 논의는 주로 국가 내의 균질성이 이제 글로벌 단위의 균질성으로 확장되었음에 대한 논의로 전개된다. 문화적으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사한 (미국식)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현상을, 경제적으로는 국경을 넘어서는 시장경제의 흐름과 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임상원·이윤진, 2002, 304쪽) 이는 클라크 식의 지구촌 개념과는 일정부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적·클라크적 지구촌과 맥루언이 제시한 지구촌 개념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물론 맥루언 역시 공간과 시간을 제거한 중추신청 조직 ─ 인간 중추신경 조직의 확장으로서의 정보통신 및 교통 미디어 ─ 이 전 지구적 규모로 확장한 상황을 묘사하기는 했다.(McLuhan, 1964/2002, 30쪽) 그러나 그것만으로 현재적 지구촌 개념의 연원을 맥루언에게서 찾는 것은 단지 절반의 해석이 될 수 있다. 그의 지구촌 논의는 “인공물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결과”(McLuhan & Powers, 1988/2005, 13쪽)의 이해를 전제로, 구텐베르크 은하적 모더니티의 균질성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16-18쪽). 재부족화는 이전 부족단계 인류의 삶과 유사한 이질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질적 차원의 변화를 의미하며, 다시 말해 그리스적, 혹은 유클리드-뉴턴적 획일 공간 개념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앞서 맥루언이 아인슈타인적 곡선형 공간의 발견을 구텐베르크 은하계 해체로 논했던 바를 고려할 때, 맥루언의 촌(village)은 고전 기하학적 차원의 중성적 공간이기보다는(임상원·이윤진, 2002 307쪽), 다원적이고 균질화되지 않은 ‘이질성이 회복’(앞의 글, 304쪽)된 공간이라는 편으로 독해하는 것이 보다 적확할 수 있다.     

  한편, 맥루언의 미디어 논의는 ‘전통적인’ 미디어 영역은 물론, 미디어-공간적 접근의 차원에서 미디어연구와 문화연구 자장 내에서의 도시공간연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김수철, 2015 459쪽) ‘공간적 전회’로 일컬어지는 학적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 맥루언을 비롯한 미디어-공간적 접근의 선행적 연구들은 “행위와 감각이 도시 공간을 인지, 인식, 상상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미디어의 위치에 대하여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앞의 책, 471쪽)한 것으로 논해진다.

  그런데 미디어연구와 문화연구 내에서 도시공간을 다루는 주된 경향은 여전히 시지각과 활자를 우위에 두고 있다. 국내의 미디어-문화연구 차원의 도시공간 연구를 고려해볼 때, 맥루언이 앞서 구텐베르크 은하 체계적 연구로 꼽았던 계량적 방법론의 연구는 물론이고, 질적방법론을 활용한 것으로 손꼽히는 ‘주요’ 연구들 역시 대개 구텐베르크 체계의 지배적 감각인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앞의 책, 471-480쪽) 물론 청각·촉각·후각이나 공감각적 차원의 도시공간연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며, 분명 유의미한 연구들도 수행되어왔다. 그런데 이들은 여전히 감각적 ‘재구성’이나 ‘전환’을 스스로의 의의로 내걸며(이양숙, 2014; 이재현, 2012) 새롭고, 실험적이며, 따라서 예외적인 감각적 연구의 방법(론)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연구와 문화연구는 미디어-도시공간의 공감각성에 붙어있는 ‘예외’의 딱지를 어떻게 벗겨낼 수 있을까?

  이런 차원에서 나는 미디어연구와 문화연구가 자장 ‘바깥’의 도시공간연구의 경향을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은 도시를 미디어라고 명시적으로 규명하지는 않지만, 이전부터 ─ 마치 맥루언이 지향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시지각 우위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처럼 ─ 다감각·공감각적 연구와 실천을 수행한 까닭이다. 가령 도시계획가 아모스 라포포트(Rapoport, A.)는 문화와 건축, 그리고 디자인의 상관관계를 다루며 시경관 본위로 논의되던 도시경관의 개념을 물리적·사회적·일시적 특성으로 설명한 바 있다. 물리적 특성은 지배적 시각성의 탈피로서 공감각성 ─ 시각, 냄새, 공기의 유통, 소리, 온도, 체감 등 ─ 으로 확장된다.(Rapoport, 1977, pp. 208-212) 라포포트의 저작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 패러다임이 본격화된 이후 인접한 실용분과학문 체계(가령, 도시계획학·도시공학·조경학·생태학)의 영역에서만큼은 주요 담론으로 부상한다.(원제무, 2008, 244-247쪽) 사실 라포포트의 논의를 현실 도시공간에 반영하는 문제는 해당 분과와 제도의 영역에서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 논쟁은 공감각을 적용한 연구가 예외적이라서 라기보다는 계획과 제도에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의 논의에 가깝다. 그렇다면 미디어-문화연구가 맥루언의 미디어-공간적, 공감각적 문제제기를 담아내기 위해서, 라포포트 등의 논의나 이를 둘러싼 관련 분과들의 이론적·실용적·방법론적 논쟁을 검토한다면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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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주석은 별도 지면에 공개한 원문을 확인.


2019년 9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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