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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Apr 15. 2021

공간주의 구상 1안

(+) 구상의 구상



이 글은 2021년 4월 개설(예정)의 웹플랫폼 <공간주의(空間注意)>(attention-to-space.neocities.org)의 런칭을 준비하며 쓴 구상의 전문이다. <공간주의> 웹페이지와 함께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한다.


<공간주의>는 가두리들의 바깥-사이에 있는 접경지대에서, 공간과 관련한 다양한 목소리를 환영한다. 브런치를 비롯한 다른 플랫폼에 올린 글의 게재 역시 가능하다. 특별한 자격과 분량을 요구하지 않는 <공간주의>로의 투고와 관련한 사항은 위의 공간주의 웹페이지의 'CONTACT'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공간주의 구상


우리 모두는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문화적이고 지리적인 위상에서 공간을 경험한다. 이 위상은 모든 이에게 온전히 동일할 수 없다. 동일한 위상의 3차원 좌표 위에서 복수의 주체가 완전히 겹쳐져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각기 다른 위상에서 펼쳐지는 경험은 공간을 장소로 체험하도록 만든다. 장소 체험을 통해 공간은 각기 다른 장소로 분할된다. 물론 공간은 원론적으로 장소 체험들의 중첩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각각의 장소체험들은 ─ 그것이 공간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장소 영토 바깥을 벗어나지 않는다/못한다. 설령 인접한 위상과 유사한 성격의 공간조차도 더 이상 같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물질세계에서 목격되는 주된 경향의 하나는 ‘요새화’로 말해질 수 있는 장소화의 심화이다(Soja, 2000/2019). 예컨대 도시 실재계의 공간에서 요새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되었으며, 또한 우리가 목격하는 현재 진행형의 현상이기도 하다. 요새화된 도시 공간의 세부 영역(sphere)과 구역(pocket)들은 각각의 장소-영토로 분할된다. 영토들의 테두리에는 경계로서의 담벽이 높게 솟는다. 영토의 비구성원이 영토에 진입하는 데에 있어서는 까다로운 인증 과정이 요구된다.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와 게토화(Ghettoizing)로 예증될 수 있을 공간의 현재적 파편화 경향에서 각 영토의 구성원들은 영토 단위의 장소 체험을 통해 각자의 사회-공간과 공간-문화를 구성한다. 이제 이 사회문화적이며 동시에 지리적인 속성들은 분할된 영토들을 아우르는 공통 공간을 구성하지 못한다. 영토의 확장과 강화는 기존의 공유지를 인클로징(Enclosing)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시의 스케일에서 발생하는 심화된 장소화의 경향은 보다 상·하위 스케일의 공간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장소화의 심화 경향은 단지 공간적 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쉽게 공간을 말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계획가, 건축가, 역사가, 활동가, 기업가, 비평가, 예술가, 문학가, 철학가, 행정가, 정치가, 지리학자, 지역학자, 인문학자, 여성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론학자, 문화연구자, 큐레이터, 아키비스트, 디벨로퍼, 해커, 게이머, 장애인, 비장애인, 운전자, 보행자, 부동산 소유인, 임차인, 관광객 …… 한없이 나열할 수 있을 듯한 이 목록은 우리가 목격한 ‘공간’을 말하는 행위자들의 일부다. 이들 행위자 각자는 자기 관점의 장소 체험을 공간의 이름으로 전파한다. 공간을 자기 서사의 정당화의 수사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할된 상당수 담론에서 공간은 총체적인 실체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문학적 심상의 도시공간은 공간 설계자들의 도시공간과 쉽게 중첩되지 않는다. 관념적 철학의 공간관은 사회과학 연구의 구체적인 도시공간에서 그 설명력을 잃는다. 부동산 소유인과 임차인, 그리고 관광객의 장소체험은 결코 겹쳐지지 못한다. ‘도시 실재계’에 대한 접근과 ‘도시 상상계’에 대한 접근은 공간을 분할하고 총체로서의 공간에 대한 주의력을 흐트려 놓는다. 도시의 영토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 혹은 그 이상으로 ─ 각 분과의 외부인의 분과 내에서 발화하기까지는 보다 까다로운 인증 절차가 요구된다. 이와 같은 현재적 상황에서 각기 나뉜 담론 구성체가 말하는 공간은 실상 장소체험에 불과하다. 이것은 각자가 위치한 장(場)이라는 영토-가두리 안에서(만)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가깝다.


예외적으로 목소리 큰 이들의 발화는 자기 가두리를 둘러싼 담벽을 넘어서 다른 가두리에 닿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 가두리와 가두리의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는 (옅어짐을 가장하여) 보다 두터워진다. 그것은 대부분 확성기를 확보할 수 있었던 소수 기득권의 발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두리 내부의 새로운 경향, 그리고 소수자의 목소리가 다른 가두리에 닿기까지는 기약 없는 지연이 요구된다. 결코 닿지 못하고 말소되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목소리 큰 이들과 달리 각고의 노력을 통해 다른 가두리의 일회적 인증 절차를 통과한 이들이 원래의 가두리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적잖다. 이는 각자의 장소경험을 중첩시킬 수 있는 공유지로서의 접경지대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접경지대가 없다면 개별 조각들은 단지 하나의 조각으로만 남을 뿐이다.


우리는 앞서 영토화가 도시의 상·하위 스케일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간을 둘러싼 현상은 다중 스케일적으로 작동한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몇몇 선행 접근들은 공간이 각기 다른 스케일 요인들이 맺는 상호 관계의 산물(the product of interrelations)이자 동시에 그 주요한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입증해냈다(Massey, 2005/2016). 그러나 이와 같은 다중 스케일적 접근은 일부 학술장의 가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공간을 논하는 적잖은 담론과 작업들은 공간을 단일한 스케일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일 스케일적 접근은 공간 경험이 각각의 장소 체험으로 쪼개어진 상황에, 공간을 행위 발생의 용기나 후경으로 치부하는 서구 전통의 담론 지형에, 그리고 공간을 여전히 멈춰 서있는 정주의 영역으로 사유하는 경로의존적 사고 등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인들이 반복되는 것은 각기 다른 다중적 스케일에서 ─ 그리고 다중적 스케일 자체를 주목하며 ─ 이루어진 작업물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스케일‘들’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중 스케일적 접근의 유용성이 밝혀진 현 시점에도 (최소한 한국어 공간 담론의 지형에서만큼은) 스케일을 가로질러 만날 수 있는 접경지대는 부재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공간주의를 제안한다. 공간주의(空間注意)는 공간에 대한 하나의 단일한 주의(主意)를 주창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즉 각자의 장소 체험이 상이한 위상에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고 이를 종합함으로써 일관되지 않은 공간을 맥락화하는 것이다. 목적 달성의 성패는 상이한 도시 실재계와 도시 상상계의 영토들에서 분화된 공간의 조각들에 대한 ‘조각모음’의 실행 수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개별 영토와 분과, 각기 다른 개별 스케일이라는 이질적 장소의 가두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에 공간주의는 공간을 주의하고 전면화하는 이질적인 작업들이 만나는 경계 없는(border-less) 접경지대가 되고자 한다. 이 때 접경지대는 각기 다른 토대와 스케일에서 발전한 공간에 대한 작업들의 논쟁이 펼쳐지는 전장이자, 동시에 그 전장에서 합의된 공통 방향의 총체적인 공간 생산을 위한 공동진지를 의미한다. 공간주의의 접경지대는 거대한 스피커들에게 가려져 가두리 안에서만 메아리쳐졌던 작은 목소리들의 참여를 환영한다. 또한 우리의 접경지대가 공간의 (재)구성을 위한 전술과 실천의 매개 장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丹下健三, <築地電通ビル>.




구상의 구상


이 글은 원래 플랫폼 <공간주의>의 소개로, 우리의 지향을 설정·설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공동설립자인 필자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글의 작업과정에는 우리의 공통 지향을 드러낼 수 있는 글에 대한 공동설립자 ****의 제안, 구성과 방향에 대한 공동설립자 ****의 기여, 그리고 이들의 검수가 함께했다. 지금의 우리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이를 최초 지향으로 설정하는 데에 동의한다. <공간주의>는 분명 여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을 <공간주의>의 기본 규정으로는 설정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는 한편으로 인트로 페이지의 스크롤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만, 보다 주효하게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최초 지향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최초 지향을 절대화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의 지향은 가두리와는 다른, 가두리들 사이의 접경지대를 구축하고자 함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각각의 가두리가 제도의 높은 담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목격했다. 이 때 제도의 장벽은 틈을 허용하지 않는 경계인 것‘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제도가 되지 않으려 한다. 세넷(Sennett, 2018/2020)이 말한 것처럼 경계와 구분되는 테두리 공간으로서의 접경지대의 실천적 가능성은 다공(질)성에 기대있다. <공간주의>가 목표하는 접경지대도 유사하다. 우리가 구축하려는 접경지대는 서로 상이한 문제의식 및 스케일의 침투가 허용되는 다공성의 공간이다.


분명 이 글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지향은 <공간주의>의 출발점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인 기본형 규정의 제시를 통해 사전적으로 우리를 규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를 보다 규정하는 것은 출발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공간과 관련한 어떤 구체적 작업들을 하는지(쓰는지/모으는지)의 문제다. 이는 공간이 자연환경 내지는 최초 건조자에 의한 건조환경만을 구성 요인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옆/아래에서 관계를 맺는 다종다양한 스케일과 행위자들에 의해 구성-생산되는 것이라는 점과 상응한다. 공간이 끊임없이 (재)구성과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공간을 다루는 플랫폼이 불변할 기본 규정과 상정하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은 공간주의 구상의 1안이다. 그것은 우리가 조각모음의 목표를 일정수준 달성한다는 전제하에 <공간주의>의 구상 역시 2, 3, 4안…으로 계속 이어지며 새롭게 재구성되고, 재생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References  


Massey, D. (2005). For Space. 박경환·이영민·이용균 (역) (2016). <공간을 위하여>. 서울: 심산.

Sennett, R. (2018). Building and dwelling: Ethics for the city. 김병화 (역) (2020).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 파주: 김영사.

Soja, E. W. (2000). Postmetropolis: Critical studides of cities and regions. Part. 2. Six Discourses on the Postmetropolis. 이현재·박경환·이재열·신승원 (역) (2019), <포스트메트로폴리스 2, 포스트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여섯 가지 담론>. 서울: 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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