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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May 23. 2021

도시의 활용

초기 세넷으로부터의 메모

초기의 세넷(1970)이 제시하는 목표는 도시생활을 재구조화하여 "도전적인 사회적 모체를 제공하는 것"(192)이다. 다시 말해 시험과 도전을 '강제'하도록 인간 정주지를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 때 관건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사람들을 서로의 삶에 접속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192) 이는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 성장하기’, 즉 새로운 세대가 옛 세대와 대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세넷은 서로 대면하는 마주침을 통해 "사회적 관계, 특히 사회적 갈등을 수반하는 관계가 생겨나야"(193)한다고 주장한다. 생존을 위한 ‘유대’를 신화로 파악한 세넷은, 이어 갈등을 인정하는 도시야말로 "이런 마주침을 위한 독특한 만남의 장을 제공할 수 있다"(193)고 논한다. 그는 이를 위해 도시 생활 구조화에 대한 두 가지의 변화 방식을 제시한다. 첫째, 도시 관료 권력의 스케일에 변화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도시계획에서의 질서 개념에 변화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권력은 관료제적 피라미드로, 기업 권력은 보다 복잡한 관료제 양상을 갖는다. 세넷은 도시계획 내지는 공공계획 분과에 정부식의 피라미드 형태가 고질화되어 있다고 진단하고 비판한다. 상술했던 논리에서 세넷은 도시가 가난한 이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이들까지도 생존을 위해 타자와 직접 대면하는 공동체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 관료제 형태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시 기능의 합리성은 생산성을 위해 유지된다는 효용에 기초한다. 그에 따르면 이 효용의 중추 조직을 바꾸기 위해서는 효용 자체보다는(데이비드 하비 식의 논의방식?) 조직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기계적 생산성과 기술적 믿음의 사고에서 배태된 '유력 중앙 통제 기구'는 "매우 제한되고 한정된 일만을 할 수 있다."(195) 사기업을 지배하는 소수 개인들은 그 틈에서 사기업이 공공 권력이 대체하도록 구상해왔다. 중앙기구 자체를 부정하는 탈집중화 논의는 결국 사기업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이들과 달리 세넷은 "사람들이 서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공 권력의 파괴가 아니라 재구성“(195)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의 재구성은 사기업에 권력을 이전하는 것이 아니며(아니어야 하며), 그 대신 학군설정, 지구설정, 재생과 같은 실천. 그리고 공통-공동체 행동 등으로 예시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도시계획의 질서 개념 변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오스만 계획 이래 지배적인 도시계획 사조는 “도시 전체에 질서와 명료성을 부여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가정”(196)에 기초해왔다. 세넷은 이를 무너뜨릴 것을, 그리고 대신 도시를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적 질서로 파악”(196)할 것을 제언한다. 거주 이전에 가해지는 조닝 등을 폐지하고, 도리어 "다양하고 변화 가능한 용도"(196)를 위해 도시공간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 계획을 막아둔다면, 도시 지역의 다양성을 배태시킬 수 있다. 또한 로컬 갈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조닝 등의 사전 계획이 사라진 도시공간에서 '실제 쓰임새'가 보다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지구설정을 통한 조닝 폐지는 도시민의 유대와 연합이 로컬의 성격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치도록 한다.     


  "규모가 큰 중심도시라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오늘날에는 갈등을 분산하거나 적어도 파편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생활방식의 차이가 많이 남아있다."(204) 세넷은 민족, 계급, 인종 등에 대해 '단순한 삶의 조건'이 아닌, 확산성을 가지며 상호침투하는 복잡 요인이라고 논한다. 이를테면 세넷은 67년도의 디트로이트 폭동 등을 '단지' 인종적 현상이라고 가정하고 봉합했던 대중적 담론의 오류를 지적한다. 세넷에 따르면 이 폭동 등에서 포착된 ‘스스로를 불태운’ 자기파괴성은 자기 힘의 행사, 즉 진정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못하고, 그 장소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세넷에 따르면 반대로 생존을 위해 대면해야 할 때의 인간은 자기파괴로 나아가지 않는다. 즉, "스스로 통제할 책임을 부여한다면, 이런 적대가 표현될 수 있으며 두 집단 모두 생존하기 위해 서로에 관해 무언가를 알지 않고서는 각자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5) 도시공간의 차원에서는? 세넷에 따르면 도시 구조를 ─ 혹은 도시 구조를 통해 ─  대결과 갈등의 복잡성을 증대시킨다면, 이는 공격의 수위를 최소한 '상호 생존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이는 사랑이나 순수와 같은 초월적 '충동'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영향을 미치는 사회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참여에 바탕을 둔 돌봄이다."(206) 그렇기에 생존의 문제를 (재)전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도시적 요인이 ‘도시로서의 생존의 공동체’의 (구조적) 조건이 되는가? 첫째 인구밀도이다. 여기서 세넷은 로버트 파크와 시카고학파의 논의를 참조해 많은 숫자의 밀집은 ‘일탈’, ‘특이성’을 (보호의 의미로서) 가리는 장막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적 의미의 마을, 혹은 메트로폴리스의 외곽확장적 공간구성일 교외에서와 달리 도시 ‘내’에서는 공동체 스케일의 틀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섹슈얼리티, 민족적, 보헤미안적, 세대적 하위문화는 조밀한 도시 지역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이 포착된다.

  도시와 같이 대규모의 조밀한 공동체가 ‘통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인구의 불안정성과 관련이 있다. 제인 제이콥스를 비롯한 당대의 ‘대중적’ 도시 담론은 공동의 유대와 이웃주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넷에 따르면 역사적, 인구학적 차원에서는 반대에 가깝다. 제이콥스가 주장했던 ‘따뜻한 결합’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제이콥스가 지목했던 것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 지면에서 세넷은 자신이 제이콥스식 ‘따뜻한 결합’의 윤리적 가치를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이는 무엇보다도 조밀한 도시 안, 그리고 조밀한 도시 간의 모빌리티의 지점과 관련된다. “도시 내부의 인구 이동은 교외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내부의 이동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빈도가 높은데, 이렇게 도시 내부에서 이동한 결과 촘촘하게 짜인 구조나 지역의 규칙이 시민들에게 미치는 힘이 약해진다”(209)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집적, 내지는 집적된 인간은 생존 공동체 작동에 필요한 다양성 및 불안정성을 매개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불안정성으로 인해 대면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세넷은 이에 대해 물론 ‘옛날 방식’의 공동체와 공동체 행동으로의 결합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응답한다. 대신 세넷은 대신 미국 도시의 소수민족 게토의 사례로부터 다양성과 불안정성의 조건 하에서도 직접적 대면의 결합이 장려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 게토는 어떤 기관도 자급 능력이 없었기에 다양한 집단과의 접촉점을 필요로 했고, 실제로 도시구조적 차원에서 접촉점을 가졌다. 혹은 접촉점에 해당했다. 세넷은 사전 계획의 철폐가 이와 유사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논한다. 사전 계획의 철폐로 도시민은 생존을 위해 경계 너머에 눈길을 돌려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사전 계획의 철폐로 동질화되어있던 캠퍼스타운이 이질화될 수 있으리라 논한 세넷은, 이어 사람들이 “‘행정’이나 ‘학생운동’, ‘공동체’ 등의 편리한 허구를 넘어 사고를 확장”(211)하리라고 예견한다. 이처럼 권력의 분산은 “같은 구역에 살거나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접촉의 연쇄”(211)를 필요하게 하며, 이 때 다양화된 사람들의 협력망은 추상화가 아닌 특수화를 겪게 된다. 

  즉, ‘도시로서의 생존의 공동체’의 두 번째 구조적 조건은 ‘다양한 접촉점’이다. “조밀하고 다양한 공동체에서 생존을 위한 다양한 접촉점을 만드는 과정은 균질적인 소집단의 언어로 표현된 사고의 경계에 파열을 일으킨다.”(213) 그리고 세넷에 따르면 이 파열을 이루어낼 수 있다면 (파크를 위시로 한 시카고학파와 제인 제이콥스가 대도시 공동체에서 관찰된 것처럼) 범주들이 상호 침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호 침투는 소수민족이나 노동계급보다는 도리어 풍요로운 계층의 삶의 일부에게서 포착된다.     


  이에 세넷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의 방향을 논한다. “도시계획에서 밀도 증가가 중앙 관료제의 권한 제한과 연결되면, 도시 차원의 행동을 위한 기회에서 이처럼 다양한 접촉 영역이 나타날 것이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필요성도 생겨날”(213)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실천방향의 ‘기법’은 무엇인가? 세넷은 먼저 자신의 기법이 체제를 무너뜨린다면 다양한 공동체가 자생적,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식의 공동체 사상가들의 견해와는 엄격히 부별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생겨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창조하고 생겨나게끔 자극해야 한다”(214)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획’은 소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된다. 이에 더해 세넷은 ‘체제’에 맞서는 안간힘을 쓰는 중이라는 식의 공동체주의 논의를 나이브하다고 지적한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역설을 논하며, 이 역설 상황에서의 변화를 위해서는 ‘적극적’ 방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계획, 어떤 방침을 제시하는가?

  첫째, 도시의 시각적 밀도를 높이는 것. 세넷은 미지의 접촉을 하는 경우가 적기에, 시각적 밀도를 높이는 식으로 부분들을 뒤섞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고층빌딩 만남의 공간, 파리나 피렌체의 대광장 등이 대표적 양식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세넷은 현대 도시의 타운하우스로 둘러싸인 광장을 예시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하고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밀도는 “같은 규범으로 규율할 수 없는 환경”(216)을 만들고, 이로 인해 도시민의 일탈과 특이성이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더욱이 모빌리티를, 즉 접촉점을 증대시킨다.

  둘째, 생활/노동/유흥 공간의 사회경제적 통합이다. (세넷은 미국의 경우 인종통합을 추가할 수 있다고 논한다.) 세넷에 따르면 이는 당대의 고전 좌우파 모두 반대해온 것이었지만, 그의 ‘신좌파’적 논리에서는 필요하다면 오스만 계획조차도 차용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도심 주민들은 이웃과의 이질성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세넷에 따르면 생활공간적 차원의 소셜믹스는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법”(218)을 익히게 한다는 지점에서 보완책인 동시에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논한다. 다만 여기에는 통합의 시도가 게토 주민들의 자아의식과 자존감을 파괴한다는 반박 역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은 ‘공동체에 의한 통제’, ‘탈중심화’, 그리고 ‘권력 이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세넷은 이들의 논리에 입각한 지방화가 본질적으로 권력 소재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탈집중화된 지방 권력 단위에서 “주민들의 관심을 끌며 이 차원에서 유일하게 행사하는 공동체 통제는 비정상인들을 억압하는 행위뿐”(222)이라는 것이다. 주거 개방 갈등, 학군 게리멘더링, (이 글이 쓰여질 당시에는 그 전조가 지목된) 게이티드 커뮤니티를 이와 같은 공동체주의적 공간구성의 문제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세넷은 그 대안으로 권력 ‘내부’의 민주화를 제시한다. 이는 그에 따르면 권력의 성격을 진정으로 바꿀 수 이는 방식이다. 가령 중앙 예산을 받은 지역에서 “돈을 왜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의 결정은 그 영향을 몸소 느끼게 될 사람들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223)는 식이다. 즉, 세넷에 따르면 “그 자체로 악인 것은 중앙 집중화된 구조가 아니라 이 구조를 너무나도 쉽게 적용하는 기계적인 용도이다.”(223) 짐멜에 대한 검토에서처럼, 관료제의 본질은 결국 이를 사용하는 방법에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시각적 다양화의 방안을 통해, 기계적 이미지를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활동을 만들 수 있다고 세넷은 논한다. 즉 이와 같은 세넷의 주장은 지방화나 어반빌리지(‘도시마을’)와는 구분된다. 그는 반드시 즐거운 친교가 아니더라도 대면 접촉이 공간구성과 이로 인한 도시민의 감정에 있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사회세계에 참여해야 한다는 감정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세넷은 보다 거시적이고 낙관적인(스스로도 유토피아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자평) 전망을 남긴다. “첫째, 도시계획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다.”(225) 이는 세넷의 최근 저서의 스트리트 스마트 논의와 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도시계획에서 통일성이 약화되는 만큼, 도시 생활의 사회적 성격이 강조될 것이다. 그 정치적 결과로서 세넷은 “둘째, 선출직 관료를 선택하는 데서 정치적 ‘이미’나 개성이 덜 중요한 요소가 될 것”(225)을 예견적으로 주장한다. 셋째, 이렇게 재조직된 도시는 곧 가족 집단의 능력에 도전하게 되기에, ‘가족 강화’의 흐름이 크게 위축될 수 있을 것이다.


Sennett, R. (1970). The Uses of Disorder: Personal Identity & City Life. 유강은 (역)

(2014). <무질서의 효용: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 서울: 다시봄.



2020년 5월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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