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마다 조금씩 순서도 다르고, 만드는 사람마다 비법이 다르겠지만, 대개 가정에서 소소히 즐기는 베이킹은 저 비슷한 모양새다.
주걱의 끝에서 느껴지는 까슬까슬한 설탕이 부드러운 버터에 서서히 섞여들어갈 때부터 이상하게 코끝이 짜릿해 온다. 새하얀 밀가루를 고운 체에 받쳐 살살 흔들어주면, 금방이라도 눈썰매를 탈 수 있을 것 같은, 하얀 눈이 포슬포슬 내리는 동화속 세상이 펼쳐진다. 나도 그렇지만, 개구쟁이 두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은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뜨고 "엄마! 눈이 내려~!" 하고 귀가 떨어져나가게 소리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설렘과 기대, 그리고 아이의 상상력이 폭발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 행복을 누리기 전에 강렬한 현타의 시간이 있다.
그건 설탕옷을 입은 버터와 계란을 섞을 때인데, 버터가 계란과 잘 분리되기 때문에, 거품기를 아주 빠른 속도로 휘저어야 한다. 분리를 방지하기 위해 계란을 2~3번 나누어서 섞는 것이 좋은데, 이 순간을 위해 근육을 키운 것마냥(근육보다는 살이지만;;) 마음껏 근육을 자랑해줘야하는 타이밍이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휘저어야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데 미운 마음을 가지면 왠지 맛이 없어질 것 같아 마음놓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요즘에는 전동 거품기가 많이 보급되어 있어 팔근육을 이용할 일이 별로 없다. 근육 대신 살뿐인 내 팔뚝 때문에 나도 전동 거품기를 장만해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 홈베이킹을 하는 지인에게 1번으로 추천하는 품목이 되기도 했다.)
반죽을 마무리하기 전 아이들의 적극적인 참여 시간이 있다.
마음에 드는 토핑 넣기.
초콜릿, 견과류는 기본으로 하고 만들고자 하는 빵의 종류에 따라 바나나, 젤리 등 다른 토핑을 추가해도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물론이고, 평소 먹지 않는 견과류도 제 손으로 넣어주면 누구보다 맛있게 빵을 즐겨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이다. 특히, 쿠키는 아이 스스로 쿠키 모양을 만들고 토핑으로 꾸며주고 자기가 만든 쿠키는 자기가 먹으니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다.
반죽이 끝나면 빵틀에 유산지를 깔고 오븐에 구워내는 시간이 가장 맛깔난다.
사실 사먹는 빵이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있지만, 바로 이 시간 때문에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고 주방을 어질러가며 집에서 빵을 굽는게 아닐까.
오븐의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수록 약했던 냄새가 점점 구수하고 짙어진다. 파랗던 하늘을 점점 삼켜 온 세상이 황홀하게 붉게 물드는 저녁 노을처럼 온 집안 구석구석 빵 굽는 내음이 퍼져나가면 저 쪽 방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뛰어나와 오븐 앞에 모여든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전자파 뿜뿜하는 오븐 안을 이글아이가 되어 뚫어져라 쳐다보게 된다.
땡!
경쾌한 알람이 울린다.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오븐을 열면 180도의 뜨거운 김이 훅 하고 먼저 밀려나온다. 뒤따라 나오는 투박한 듯하지만 곱기도 한 갈색 빵이 나오면 코와 입이 간질간질하다.
이제 뜨겁게 달아오른 빵을 한김 식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보드라운 'God구운 빵'을 한 입 먹어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홈베이킹의 묘미다.
베이킹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과정 자체가 고단한 일일 것이다.
취미로 빵 한두 개 만드는 사람이야 즐겁겠지만, 모든 음식이 그렇듯 다양한 종류를 대량으로 하는 것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븐에서 빵냄새가 구수하게 울려퍼지는 순간은 그간의 고난과 노력, 시름과 걱정을 녹여 행복과 평안을 얻는 시간이다. 그 점을 사랑하기에 이땅에 수많은 베이커들이 있지 않을까.
사는 게 참 어렵다.
내 맘대로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은 세상이다.
삶이란 원래 그렇다.
하지만 지치고 피곤한 일상에도 때로 예쁜 꽃이 핀다.
내 삶을 위로하고 잠시 쉼표를 찍어줄 수 있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나의 쉼표는 독서, 음악, 그리고 베이킹이다.
짦은 시간 동안 자신의 통제력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적당한 노동과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 코와 귀와 입을 현란히 자극하고 뇌를 마비시키는 것이 이것만 한게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