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간 이민 2, 3세대의 작가가 그들의 또는 그들 부모의 힘겨웠던 삶과 역사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표작으로 ‘파친코’를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은, 조선을 떠나 하와이 농장으로 간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조선의 여인과 사진을 주고받아 결혼하여 살게 된 이른바 ‘사진 신부’와 관련된 1세대 이민자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사내에게 있지 않고 세 명의 여인에게 있다. 사진 한 장으로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며 더 나은 세계를 꿈꾸고,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한 소녀들이 결혼이라는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모순되고 거친 현실을 부정하고,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며 어른으로, 엄마로 성장해가는 스토리이다.
먼저,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 ‘버들’은 양반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어진 가정의 둘째딸이다. 그녀가 사진 신부가 되어 버들이 사진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가난이라는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것이다. 원하던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했을지라도, 그녀는 자신이 꿈을 키우고 선택한 것에 대해 평생 책임지며 살았다. 또 ‘부산 아지매’나 ‘개성 아주머니’처럼 출신 지역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싶어 했는데,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버들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버들은 훗날 딸이 간절히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을 허락하는데, 버들은 펄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을 것이고, 꿈이든 운명이든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어무이는 왜놈 없는 시상에서 살라꼬 내를 여로 보냈지만 내는 공부시켜 준다 캐서 온 기다. 돌이켜 보면 내는 내 시상 살라꼬 어무이, 동생들 다 버리고 이 먼데까지 왔으면서 딸은 내 곁에 잡아 둘라 카는 기 사나운 욕심인기라. 내는 여까지 오는 것만도 벅차게 왔다. 인자는 니가 꿈꾸는 시상 찾아가 내보다 멀리 훨훨 날아가그레이다. 그리고 니 이름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그라.” (395쪽)
버들이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파친코’의 선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순수했던 소녀 선자 역시 결혼으로 조국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여 온갖 핍박과 차별을 견뎌내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고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며 끈질기게 살아낸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멈출 수 없음을,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삶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선자와 버들은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 ‘홍주’는 조선에서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과부가 되었지만, 매사 조심하고 조신한 버들과 달리 자신에게 솔직하고 때때로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며 침체될 수 있는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통해 작가는 속시원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하고, 긴장을 완화하여 이야기에 리듬감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그런 역할을 홍주가 잘 해내고 있다고 본다.
“우리 난중에 호항에 모여 살자. 사람 죽는 순서는 모른다 카지만 나이로 치면 송화 신랑이 제일 먼저 갈 기 아니가. 그라모 그때는 젊은 신랑 얻어가 재미지게 살그라.” 홍주가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버들도 함께 모여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라모 다음은 성길 아배 차롄데 니도 새 시집 갈 기가?” 버들이 웃으며 물었다. “하모, 인생사 삼세판이라 카는데 가야제.” 호기롭게 외치던 홍주가 성길을 보며 말했다. “아이고메, 성길아, 미안타. 몬 들은 기로 해라.”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휑하니 비어 있던 집 안을 가득 채웠다. (249쪽)
마지막으로 송화는 어린 시절 무당의 손녀이자 미치광이의 딸이란 이유로 돌팔매를 맞지만 버들이 어려운 순간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버들과 송화는 서로 돕고 연대하며 삶을 이어간다. 버들은 송화의 도움이 없이 살지 못했을 것이며, 송화 역시 버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구제되었고, 송화의 딸을 버들이 거두어 살렸다.
송화는 끼니마다 색다른 걸 만들어 버들에게 먹이려고 애썼다. (중략) “이제 보이 나 살라꼬 니를 델꼬 온 기다. 내, 요새 니 덕에 산다 아이가.” 버들이 꺼칠한 얼굴로 말했다. 송화가 아니면 입덧에 시달리는 자신을 누가 이렇게 챙겨 줄까 싶었다. (198쪽)
그리고 이들의 연대는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소 독립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교민 사회의 분열과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자금을 댄 사람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가족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낸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태완, 버들, 홍주, 줄리 엄마, 개성 아주머니로 살아나 모두 긴밀히 연대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건’이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1인칭 시점으로 바뀐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독자를 제3자에서 당사자로 변화를 주어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화자인 ‘펄’은 세 여인이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결과이자 과정의 증거이다. 펄은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충격에 빠지지만 결국 자신을 낳아준 엄마 송화, 길러준 엄마 버들, 지지해준 이모 홍주에게 인사한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라고. 즉, 송화, 버들, 홍주는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간 역사의 증인이자 우리 모두의 엄마인 것이다. 작가가 제목을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로 만든 것 역시 이 이야기가 한 여인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여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며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 이 말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민족, 단일 민족이라는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다문화사회로 빠르게 진입해왔다. 우리 사회에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땅으로 이주해 온 여러 ‘사진 신부’들이 함께 살고 있다. 문학은 과거의 삶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같은 민족간의 연대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 간의 연대로 확장되어가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결혼 이주민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자기 가족과 집과 나라를 떠나는 일이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온 그들이 낯선 언어와 환경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든지 다 알기 어렵다. 결혼 이주민 여성들과 연관된 안 좋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100여 년 전 사진 신부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버들과 홍주, 송화 이야기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399쪽)
각자 도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작품이 특히 울림을 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개개인의 독립적 삶이 아니라 그들이 연대할 때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그 끈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