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언 Jul 20. 2023

책을 수집한다는 것

고서 수집 이야기 1.

노마만리 2층 서가

오후의 따뜻한 햇살 아래 녹아내릴 것 같은 편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책 속에 빠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멋진 서가가 갖추어진 도서관이나 신간이 가득 찬 대형 서점을 산책하듯 거닐며 반짝거리는 책등을 어루만지는 것은 어떤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은 솜사탕처럼 포근하고 달콤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뿐인가. 책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책 읽는 시간은 어지러운 머릿속의 잡념을 덜어 내는 여유를 줄 수도 있으며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통해 불안했던 마음의 안정을 기대할 수도 있다. 어떤 책은 날카로운 이성의 칼끝을 예리하게 다듬는 형형한 기백을 주기도 한다.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기다리던 책이 담긴 택배 봉투를 뜯을 때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책을 하나 둘 사다 보면 어느새 책꽂이는 가득 차고 만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펼쳐 든 책이 즐거웠던 혹은 그렇지 않았던 오늘이 남긴 미련이듯 밤늦은 시간까지 밀어를 함께 나누던 책들은 한때 사랑스러운 연인이었지만 이제 새로운 만남을 위해 작별을 준비하는 추억일 뿐이다. 열병처럼 뜨거웠던 기억도 새로운 책과 함께 바람에 흩어진 아스라한 환영이 될 것이다. 작은 방을 가득 채웠던 낡은 책들은 박스에 담겨 떠날 것이고 책이 있던 빈 공간은 새로운 책으로 채워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 많은 사랑을 담기에 우리가 지닌 방은 너무 좁다. 


책을 좋아하기는 쉬워도 책을 수집하는 일은 즐거움만큼이나 희생이 따르는 별개의 분야이다. 우선 수 만권의 책을 사 모을 수 있는 재력과 수 만권의 장서를 보관할 서가를 갖추는 것부터 여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좋아서 시작한 수집이 골칫덩어리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책을 둘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귀한 책을 찾기 위해 탐색하고 그러한 책을 만났을 때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힘들게 수집한 책들의 운명은 열어보지 않을 슬픈 박스에 담긴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닐 것이며 비좁은 집은 낡은 책으로 가득 찬 헌책방처럼 황폐할 것이다. 수집가로서 평생에 한번 만나기 어려운 귀한 책을 소장할 기회는 아차 하는 순간 사라지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독서가가 아닌 수집가에게는 현실적인 타협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책을 수집할 수 없기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누구나 아는 고가의 희귀서만을 목표로 삼아 수집품을 정리하던가 수집가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나 수집가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특정 분야의 책을 집중 수집하여 독특한 장서를 꾸미는 것이 좋다. 사실 장서의 수준은 얼마나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몇 권 안 되는 자료라도 어떤 것을 소장하고 있느냐가 결정한다.


대부분의 초보 수집가처럼 나 역시 처음에는 귀하다는 책을 사 모았다. 귀하다는 표현이란 주관적이어서 나에게는 귀할지 몰라도 남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내가 수집한 것들 역시 절대적으로 귀한 자료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한 것들이었다. 


자료를 수집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수집품의 양도 늘게 마련이다. 자연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 관련 자료와 1970년 이전 북한에서 발간한 책들로 수집품을 한정하면서 내 장서를 크게 정리했다. 지금은 5,000점이 넘는 북한 자료를 소장한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특색 있는 장서를 갖추었다고 자부한다.


책을 수집하면서 얻게 되는 희열은 환상적인 책이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을 때이다. 세상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때는 귀한 책들이 알음알음 거래되었다. 이름 높은 수집가들은 재능 있는 나까마와 거래하면서 그들이 수거해 온 책 더미에서 귀한 책들을 낚아 올렸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아서 오프라인 서점들을 대신하여 코베이와 같은 인터넷 거래사이트를 통해 책과 각종 자료들이 거래된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을 통하면 귀한 책을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을 헐값에 살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거래 내역이 축적되면서 그 가치에 맞는 가격이 형성되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수집가들에게 귀한 책을 저렴한 가격에 만나는 행운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낡은 책은 정찰제가 아니기에 우연찮게 어디에선가 귀한 책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 순간을 대비해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아니면 지금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내가 가진 책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자. 1990년대 후반 수 십만 원에 불과했던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가 2000년대 들어 시집 가격이 폭등하면서 지금은 수 천만 원을 호가하고 있지 않은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