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수집 이야기 2.
책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될까? 가격이 있으려면 우선 희소해야 하며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발간된 책 중에 중고교 교과서에서 언급될 정도의 책은 최소 수천만 원에서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조선후기 한적들의 경우 불과 몇 만 원에 거래될 정도로 가격이 헐하다. 한문으로 쓰여 독서인구가 적은 데다가 유통되는 책의 수량이 생각보다 많기에 그렇다. 물론 역사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된 책이라면 수천만 원을 넘겨 거래되기도 한다.
한국전쟁 이전 발간된 근대 서적들의 경우 도서 수집가들의 집중적인 수집 대상이다. 특히 근대문학이나 대중문화와 관련된 책들은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이중 한용운의 『님의 침묵』(1억 5100만 원), 김소월의 『진달래꽃』(1억 3500만 원), 백석의 『사슴』은 억대의 가격에 거래되는 고가의 책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저명한 시인들이 쓴 근대 희귀 시집이나 교과서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책 중 문화재급 가치를 지닌 책들은 가격이 수 천만 원에 이른다.
이런 고가의 책들은 만나기조차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소장하는 것은 수집가의 영예와도 같다. 나는 수 천만 원에 달하는 백암 박은식 선생의 저서를 몇 번이나 만났다. 그중 1914년 발행된 『안중근』 초판은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평생에 한번 만져 볼까 말까 한 귀중서를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소장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수집가로서 여간한 행운이 아니다. 돌아보면 백암은 나의 수집 인생에 있어 대단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하다.
망국의 기로에 선 조국의 운명을 바꾸고자 노력했던 백암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인 1911년 5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서간도 환인현으로 건너가 윤세복이 세운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노구의 지식인에게 독립운동이란 총칼을 들고 눈보라를 헤치며 만주벌판과 백두의 산악을 헤치는 풍찬노숙의 나날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었다. 동창학교에서 백암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다양한 저작을 집필하였으며 이는 학생들의 독립의지를 고취하는 교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언론계에서 힘차게 휘둘렀던 필봉을 거두어 비슷한 처지에 있던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동지의 언어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고 이에 대한 도움을 기대하는 절절한 글을 썼다. 그의 문장은 중국의 신문에 소개되었다.
백암의 대표적 저작들은 동창학교를 떠나 상해로 활동지를 옮긴 이후 발간된 『한국통사』, 『안중근』,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와 같은 조선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책들이다. 일제 하 백암의 저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유통될 수 없었기에 현재 국내에 소장된 책은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해방 후 중국에서 돌아온 망명객들의 짐 속에 들어 있던 몇 권의 책이 국내에 남은 전부였다. 이들 책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출간될 수 있었고 그 덕에 백암은 민족주의역사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일찍부터 추앙받을 수 있었다.
중국의 고서점 사이트 중 가장 유명한 콩푸즈를 통해 중국에 유통되는 책들을 검색해 구매하다 보니 운이 좋게도 중국에서 발간된 백암의 저서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수집한 백암의 저서는 『한국통사』(대동편역국, 1915)였다. 국가 최대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국회도서관 서울대도서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지 않은 책이자 박물관 중에서도 독립기념관 등 몇 곳에서만 수장하고 있는 문화재급 서적이다.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이란 필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콩푸즈에 올려져 있던 『한국통사』는 사진도 없이 간단한 정보와 가격만 적혀 있었다. 수년 전에 게시된 것이라 실제 파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문의를 해본 결과 아직 판매되지 않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책이 진본인지 영인본인지 조차 가늠이 안되었기에 판매자에게 상태 확인을 위한 사진을 부탁했다. 판매자는 귀찮은 듯 이 책이 다른 지역의 창고에 있으니 사겠다고 약속한다면 며칠 후 가서 책의 상태를 찍어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 판매자가 사진을 찍어 보냈고 받은 사진을 보니 박은식의 필명 태백광노 저 『한국통사』가 맞았다. 아쉽게도 100년이 넘은 낡은 책인지라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표지는 부러진 채 떨어져 있었고 페이지 곳곳이 산화가 진행되어 비스킷처럼 부서져 있었다. 그나마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체로 쓴 한국통사라는 제목은 또렷이 남아 있었기에 떨어진 표지를 수리해 붙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모습이라 생각했다.
『한국통사』는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던 한양대에 유학 중이던 중국인 학생 유우를 통해 구입할 수 있었다. 분실 위험 등으로 택배로 책을 받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중국으로 가서 책을 가져오기로 하고 우선 유우의 부모님께 책을 받아 보관해 달라 부탁했다. 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한국통사』를 가져오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남경에 여장을 푼 나는 유우의 가족들과 만나 그간 콩푸즈를 통해 구입한 책을 인계받고 감사를 표했다.
숙소에 돌아와 가장 궁금했던 『한국통사』를 꺼내 살펴보았다.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상태가 나빴다. 책장은 산화가 심해 책을 펼칠 때마다 바짝 마른 종이는 쉽게 부러졌다. 나는 가능한 책을 펼치지 않기로 하고 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머릿속에는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것은 책을 가장 잘 보관할 수 있는 곳에 넘기는 일이었다.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책임에도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드물었기에 가능하면 상징적인 곳에서 보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조차 이 책을 소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책이 더 망가지기 전에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보내기로 마음먹고 그쪽에 전화를 걸어 수집 의사를 물었다. 일반적인 경우 박물관에서는 자료수집 기간이 아니면 자료 수집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지 않지만 그 책이 백암의 『한국통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내 연락을 받은 국립중앙도서관에는 곧바로 책 구매를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보통 수집 기관에서는 전문가들을 모아 감정평가회의를 열고 그들이 책정한 가격을 판매자에게 알려주고 판매 여부를 확정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 가격을 알려주었다. 그들이 평가한 금액은 감정평가회의를 위해 모인 평가위원들에게 나눠준 회의비 정도밖에 안 되는, 내가 제시한 금액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적은 금액이었다. 물론 책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지만 국가 문화재급 서적을 형편없는 가격에 매도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좋은 마음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매도하기로 한 생각을 바꿔 제대로 수리 후에 제 값을 받고 팔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책을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책을 수집만 했지 제대로 고쳐 본 적이 없기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도서수리업체들을 알아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표구로 가장 유명한 인사동의 낙원표구사를 찾아가 도서 수리가 가능한지 물어봤다. 낙원표구사의 이호우 선생은 낙원표구사가 자리한 건물 3층에 고서복원하는 곳이 있으니 그쪽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3층에 올라가 보니 한국고서복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두꺼운 철문으로 굳게 닫힌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어 안쪽으로 들어서니 한창 복원 중인 신문들과 책이 쌓여 있었다. 통일부 북한자료실에서 의뢰한 북한의 자료들이었다. 한국고서복원의 표창술 선생은 직접 특허출원을 했다는 고지재생처리장치를 보여주며 이곳에서 다양한 책과 신문 등 종이로 만들어진 자료들을 복원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가져간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를 보고서는 이 귀한 자료를 어떻게 구했냐며 훼손 상태가 심하긴 해도 얼마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보다 온전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통사』의 수리를 맡겼고 책은 표창술 선생의 한국고서복원에서 보다 온전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내가 지니고 있던 귀한 책들 중 수리가 필요한 책은 표창술 선생의 도움을 받아 복원하였다.
꽤 큰돈을 들여 복원했던 백암의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지금 소장하고 있지 않다. 2017년 서울옥션을 통해 나전칠기 명인 김진갑 선생의 “동태 나전 칠 구름 용무늬 화병”을 매각하기 위해 출품 문의를 한 적이 있었다.(이 화병은 지금 서울공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때 서울옥션에서는 근대 서적 경매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며 내가 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출품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무렵 나는 경매에 내 소장품이 출품되어 거래되는 것 자체를 흥미로워할 때라 10여 권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냈다. 서울옥션에서는 그중 박은식의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하나로 묶어 출품하겠다고 했다. 나는 3.1 운동 100주년을 앞둔 다음 해에 경매를 진행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지만 담당자는 여러 박물관에서 3.1 운동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구입하고 있는 지금이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적기라며 올해 경매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담당자의 말이 맞았다. 이 세 권의 책은 2017년 3월 열린 서울옥션 메이저 경매를 통해 3,8000만 원의 가격에 낙찰되어 현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