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수집 이야기 3.
한때 『한국통사』 외에도 백암과 관련한 저작들을 여럿 소장하고 있었다. 강점 이후 3.1 운동까지 독립운동의 피맺힌 역사를 기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심지어 두 권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이 책 역시 100년의 역사를 견뎌온 낡은 책인 데다가 저렴한 종이로 인쇄되어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한국통사』와 마찬가지로 한국고서복원에서 수리해 가지고 있다가 서울옥션을 통해 경매에 내놨다. 그중 한 권은 『한국통사』와 묶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갔고 다른 한 권은 지방의 한 박물관으로 갔다. 아마 울산박물관 소장본이 그것인 것 같다.
이외에도 조선의 몰락과 안중근의 이토 암살을 다룬 학림냉혈생(鶴林冷血生)의 「영웅루」는 한때 백암의 저서로 알려져 있었다. 이 작품이 수록된 상해 광익서국 발행『회상국사비영웅루전집』(繪像國事悲英雄淚全集) 역시 서울옥션을 통해 경매되었다.(1911년 발행의 「영웅루」는 “계림냉혈생”, 1914년 발행본은 “학림냉혈생”으로 표기되어 있다. 박은식의 작품이 맞다면 상해로 온 후 계림냉혈생에서 학림냉혈생으로 이름을 바꿔 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문판 『독립신문』 몇 점은 경매가 아닌 박물관에 직접 매도한 백암 관련 유물이다.
중국이나 일본에 흩어져 있는 북한 관련 자료들을 사 모으는데 백암의 저서를 팔아 벌어들인 돈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빠른 시간 안에 꽤 괜찮은 북한자료 수 천 점을 갖춘 장서를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귀하지만 남들이 눈여겨보지 못한 백암의 저작들을 만난 수집가로서의 행운도 있었다.
현재 내게 남은 백암의 저서는 『한국통사』를 발간한 상해의 대동편집국에서 나온 『안중근』(1914) 한 권뿐이다. 이 책은 국내에 몇 권 남아 있지 않은 희귀서이다. 현재 국내에는 내가 소장한 『안중근』을 비롯해 5점이 안 되는 책이 알려져 있다. 가장 먼저 국내에 소개된 것은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맞아 TV쇼 진품명품에 소개된 『안중근』이다. 이 책은 표지와 목차 세 장이 탈락된 불완전 본으로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 2023년 6월 코베이 삶의 흔적 경매를 통해 1,500만 원의 가격에 임시정부기념관이 낙찰받은 것과 한 인터넷 골동품점에 1,300만 원의 가격에 판매한다고 올려진 것 정도가 현재 국내 남아 있는 전부이다.
백암이 「안중근전」을 쓰고 이를 책으로 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1911년 가을 중국 남방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펼쳐졌다. 철도 국유화 조치에 반대하던 성도지역 보로동지회가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무창의 정부군이 성도로 급파되었다. 정부군이 무창을 비운 사이 혁명파가 무창을 점령하고 민주공화정을 근간으로 한 중화민국을 선포했다.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는 급속하게 번져 1912년 초에 이르면 남부 14개 성이 청조에서 독립을 선언해 버린 상황이었다.
1911년 겨울을 서간도 지역인 환인현 동창학교에서 보낸 박은식은 세계정세가 급변한다고 생각하고 신해혁명 발발로 혁명적 분위기로 들끓고 있는 중국의 심장부로 들어가 그곳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는다. 1912년 봄 박은식은 신규식이 활동하고 있던 상해로 떠났다. 박은식과 마찬가지로 대종교인으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던 신규식은 신해혁명이 발발한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손문이 이끄는 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 혁명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후 박은식은 신규식과 만나 교민들의 구심체가 될 단체를 조직하기로 한다. 1912년 7월 상해지역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가 설립되었다. 동제사의 총재가 된 박은식은 중국의 공화혁명을 돕고 조선의 독립을 준비했다. 이 시기 원세개가 혁명의 과실을 빼앗아 가는 등 혁명과 반혁명의 혼돈이 계속되자 동제사는 중국의 혁명가들과 보조를 함께하기 위한 비밀조직인 “신아동제사”를 결성했다. 박은식을 비롯한 상해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1913년 원세개의 독재에 반대하여 일어난 2차 신해혁명에 중국의 혁명가들과 함께했다. 혁명의 행방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는 상해의 중국동맹회 핵심 인사들과 같은 목표를 위해 서로 돕고 격려하는 혁명적 동지가 되었다.
박은식은 중국혁명의 와중에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중국의 혁명적 상황을 목도해서인지 일제를 타도하고 들어설 새로운 나라는 군주정이 아닌 민주공화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독립 이후 나라를 이끌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만들어 그곳의 졸업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이 역시 중국동맹회 소속 문인들이 중심이 된 남사(南社)의 교육기관이자 유학 알선 기관이기도 했던 환구중국학생회의 일정한 영향이 있었다.
이 당시 중국 혁명의 지도자들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을 의인이라 칭송하였다. 중국의 신문에는 안중근 이야기가 연재되었고 여러 학교에서는 안중근의 거사를 토대로 한 연극이 공연되었다. 중국인들에게 안중근은 신해혁명의 한가운데서 혁명사상과 민주공화정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뜨거운 의지를 체현한 인물로 그려졌다. 박은식은 안중근 순국 3주기가 되는 1913년 3월 26일 열린 추도회를 계기로 중국의 지식인들과 혁명에 몸을 던져 참여하는 젊은이들에게 안중근에 관한 이야기와 조선망국의 사정을 보다 자세히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안중근 전기를 집필했다. 「안중근전」이라 이름 붙은 이것은 박은식이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이라는 이름으로 썼으며 1914년 『안중근』이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발표되었다. 이 책에는 「안중근전」 이외에 중국의 혁명가들이 쓴 안중근을 흠모하는 필적과 문장을 소개하고 있어서 안중근을 매개로 한 한중연대의 견고한 인연을 확인할 수 있다.
상해 대동편집국에서 발간한 『안중근』은 오랫동안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책이었다. 1928년 상해의 조선영화인 정기탁이 안중근을 모델로 한 “애국혼”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안중근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의인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지만, 박은식이 쓴 『안중근』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정전과도 같은『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우리와의 교류가 끊어진 중국 발간 서적들이 오랫동안 국내에 소개될 수 없었기에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히 재개되고 나서야 비로소 『안중근』의 실체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안중근 관련 전기의 발굴에는 큰 역할을 한 인하대학교의 윤병석 교수는 1989년 장춘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의거 8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 후 연변대학을 방문해 그곳에서 표지를 비롯해 앞 뒤가 몇 장씩 낙질된 창해노방실 저 「안중근전」을 발견했다. 우리에게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을 발견하고는 이를 복사해 국내에 들여와 이 작품의 실체에 대해 고증하기 시작했다. 이후 윤 교수는 「안중근전」의 저자 창해노방실이 백암 박은식임을 밝혀냈으며 이것과 별개로 「안중근전」이 수록된 서적의 완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1992년 윤 교수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타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학 및 제1회 비교언어학회에 참석하여 그곳 사회과학도서관 고려사범학교 미정리 문헌을 열람하였는데 뜻밖에 백암의 「안중근전」이 수록된 대동편집국 발행 『안중근』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표지와 목차를 비롯해 12면 정도를 확보할 수 있었으나 뒷부분은 연변대학 소장본과 마찬가지로 낙질이었다. 결국 뒷부분 10여 면은 얼마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소장본을 확인하여 보완할 수 있었다. 이로써 「안중근전」이 수록된 『안중근』 전체의 모습이 복원될 수 있었다.
국내에 소장처가 확인되는 4권과 윤병석 교수가 완본을 찾기 위해 열람했던 연변대학 소장본, 알마타 사회과학도서관 소장본,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소장본 외에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책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안중근』의 경우 1910년대 양지 중 저가의 갱지로 인쇄되었기에 10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산화가 심하게 진행된 상황이고 항산화 처리를 하지 않은 경우 현재까지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윤병석 교수가 30여년 전 해외에서 발견한 책들 모두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다행히 국내 소장본의 경우 대부분 수리가 되었으며 항산화처리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중국의 오래되었지만 장서가 전산화 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도서관에 일부 남아 있을 가능성 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것이며 상태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혹여 대동편집국에서 펴낸 『안중근』을 발견하게 된다면 무조건 구매하길 권한다. 세상에서 몇권 남지 않은 귀중서를 소장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눈으로 본 가격이 이 책의 최저 가격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