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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예술협회의 영화제작

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6.

by 한상언

1924년 부산에서 닻을 올린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해의 비곡>과 <총희의 연>, <신의 장>, <촌의 영웅> 등 네 편의 영화를 제작한 후 일본인 주주 사이의 갈등으로 문을 닫게 된다. 이 회사의 핵심 배우인 안종화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안종화 일행’이라는 이름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제작한 필름을 가지고 조선인 배우들과 함께 경상도 지역 순회 흥행을 다닌다.


하지만 지방 순회 흥행은 큰 성과가 있지 않았다. 인원이 많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든 대신 수입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6년 안종화는 ‘안종화일행’의 깃발을 내리고 서울로 돌아온다. 이 무렵 서울에는 부산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먼저 서울로 떠났던 이경손이나 이규설, 주인규, 나운규 등도 영화제작에 나서며 그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1926년 10월 나운규가 만든 <아리랑>의 공전의 히트를 한다. 조선영화가 관객들 사이에 인기를 끌자 1927년 봄, 우미관 앞에서 사진관을 하던 이우가 개인재산을 털어 넣어 영화회사를 설립하겠다고 나선다. 배우로 유명한 안종화를 비롯해 영화감독 이경손, 카메라맨 니시카와(西川秀洋)가 이우와 함께 조선영화예술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최서해의 <홍염>을 영화로 만들어 일본에 수출할 계획을 밝힌다. 하지만 이우가 내놓기로 한 사재는 아버지의 재산이었고 이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그의 부친이 노발대발하면서 영화제작사의 설립이라는 원대한 꿈은 무산되었다. 이우는 영화 한 편 정도를 만들 수 있는 필름을 제공하기로 약속하면서 구겨진 체면을 차렸지만 조선영화예술협회는 간판만 달려 있을 뿐 유명무실한 상태가 된다.


일본을 다녀온 윤기정과 심훈은 안종화를 찾아 영화인들의 모임인 영화인회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조선영화예술협회의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안종화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인회가 조직되자 파리만 날리던 사무실이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화인회 설립 이전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찾아온 김유영과 백하로가 안종화를 돕기 시작했다. 얼마 후 서광제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영화를 배우려는 신인들을 연구생으로 모아 영화교육을 시작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20명을 정원으로 한 연구생 모집에 8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이중 교육 수준이 높고 영화에 대한 상식이 높은 사람들로 20명의 연구생이 선발되었다. 기존 회원인 김유영, 백하로, 서광제 이 외에 강호, 한창섭, 민우양, 임화 등이 연구생으로 이름을 올렸다.


연구생들은 꽤 큰 간판이 달린 6조밖에 안 되는 일본식 방 한 칸에 모여 수업을 받았다. 이곳은 연구생들의 사무실 겸 연구실이자 합숙 공간이기도 했다. 작은 공간에 20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활기가 넘치는 것 이상으로 뜨거웠다. 이곳에서 영화연출법, 연기법, 화장법 등 영화제작의 실제는 안종화가 맡아 가르쳤으며 문학 개론, 영화미학, 시나리오 창작법 등 이론 수업은 윤기정과 김영팔, 이종명 등이 맡았다. 이때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주요 연구생들은 윤기정의 추천으로 카프에 가입했다.


연말에 가까워지며 연구생들의 연구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는 연구생들의 졸업을 기념하여 이우가 제공한 필름을 가지고 김유영과 진혜순 주연의 <제야>(除夜, 7권)와 <과부>(寡婦, 2권)를 영화로 만들 준비를 한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이끌고 있던 안종화가 맡기로 했으며 조연출은 연구생 중에 학업 성적이 좋은 김유영과 강호가, 그 외 배역은 연구생들이 각각 맡아 참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연구생들은 안종화에게 프롤레타리아 계통의 작품을 만들자고 했다. 누군가 제목을 '이리떼'라는 뜻의 <낭군>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안종화는 연구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주일 후까지 시나리오를 작성을 마무리지어 로케이션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했다. 머리를 싸매고 시나리오 <낭군>의 집필에 들어갔지만,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도록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 사이 윤기정을 비롯한 카프에 가입한 연구생들은 안종화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이들은 안종화를 몰아내고 연구생들이 중심이 된 영화제작을 꾀하기로 한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독회가 있었다. 독회가 끝나자 안종화는 스태프와 배우들을 선정하고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는 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뒤숭숭한 게 이상했다. 이때 임화가 안종화에게 오늘 밤 회합이 있으니, 사무실로 출석해 달라 이야기했다. 연구생들이 무슨 불만을 가지고 있나 보다 생각하고는 그날 밤 회합에 참석했다.


회합은 조선영화예술협회 대표인 안종화에 대한 성토대회였다. 연구생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윤기정이 안종화에 대해 경리부정과 연구생 조경희에 대한 추행, 예술성과는 동떨어진 작품을 집필했다는 이유로 제명을 선언했다. 결정은 일방적이었다. 안종화는 자신이 이끌던 단체에서 쫓겨났으며 이우가 마련해 놓은 필름도 이들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이우가 제공하기로 한 필름을 확보한 이들은 안종화 원작의 <이리떼>의 제작을 폐기하고 새로 조직한 위원회를 통해 영화제작을 준비했다. 새로운 작품의 제목은 <유랑>이었다. 원작은 이종명, 각색은 김영팔이 담당했으며 제작은 윤기정이 책임졌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영진으로 정해 <아리랑>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유랑>의 제작자인 윤기정은 영화의 스태프와 배역을 정했다. 어린 연구생 중에 연출에 재능이 있던 김유영과 강호에게 공동 연출을 맡겼으며 주인공 영진 역은 임화, 나머지 연구생들에게 각기 배역이 주어졌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제작비였다. 필름은 확보했지만 카메라도 빌려야 하고 촬영된 필름의 현상비, 제화비 등도 없었다. 대부분 호떡 한쪽도 먹을 수 없는 극심한 가난에 있었다. 다행히도 경제적으로 윤택한 윤기정과 부친이 전당포를 운영하던 서광제가 부족한 제작비를 부담했다.


촬영은 엄동의 1928년 1월에 시작되었다. 윤기정은 제작자의 입장에서 숙소비와 식사비 등 진행비를 아끼기 위해 로케이션 장소를 추적양의 고향인 남한산성의 산성마을로 정했다. 삼사십리의 길을 도보로 걸어 남한산성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영화를 만들었다. 한 무더기의 젊은이들이 영화를 찍는다고 돌아다니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좋지만은 않았다.


제작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강호가 다른 출자자를 구해 나타났다. 그는 <유랑>이 아닌 다른 작품을 제작하겠다고 주장했다. 윤기정은 고민에 빠졌다. 가뜩이나 영화제작의 경험이 일천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촬영팀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영화가 한 편이라도 더 만들어진다면 그 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결국 촬영팀을 둘로 나누기로 한다. 강호를 중심으로 한 촬영팀은 남향키네마라는 이름으로 영화제작을 준비하여 강호의 고향 진주로 떠났다. 이로써 <유랑>은 김유영 단독 연출로 확정되었다. 새로운 영화 <유랑>을 만드는 과정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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