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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 이후 카프영화란?

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7.

by 한상언

이종명의 원작을 김영팔이 각색한 영화 <유랑>은 주인공 영진(임화 분)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영진은 피폐한 농촌의 삶을 바꿔보려 야학을 운영한다. 방랑을 떠나기 전 알고 지내던 순이(조경희 분)와 사랑하지만 마을을 장악한 지주(서광제 분)는 소작인의 딸 순이를 자기 바보 아들(추용호 분)과 결혼시키려 한다. 영진은 지주의 횡포에 맞서 싸우지만 결국 순이의 가족과 함께 정든 마을을 떠나 또다시 유랑의 길에 나서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유랑>의 원작자 이종명은 훗날 “촬영상 기교라든지 배우들의 분장 동작이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다들 처음 만드는 영화이다 보니 결국 완성도에 문제가 많았다. 기술과 경비 부족으로 강호가 연출하기로 한 <암로>는 아예 제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유랑>을 제작하면서 얻은 교훈은 이후 제작되는 영화는 신인들 위주로 만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영화인 중 진보적 가치를 지닌 영화인들을 합류하여 더욱 완성도 높은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유랑>은 1928년 4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극장 측에서는 흥행을 위해 “향토정화”, “눈물겨운 사랑의 로맨스!”라는 문구로 영화를 소개했다.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 유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광고에 드러내지 않는 대신 로맨스로 포장했지만, 대단한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단성사에서 영화 상영이 끝난 1928년 4월 어느 날,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남산 잔디밭에 모인 조선영화예술협회 회원들은 이 단체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전문적인 영화제작단체인 서울키노를 조직하기로 한다. 서울키노에서는 추적양(추용호)이 돈을 내서 어둠의 거리라는 뜻 <혼가> 제작을 준비했다. 이 영화는 <유랑>과 마찬가지로 김유영이 연출을 맡았고 임화와 추적양이 출연했다.


진주로 내려가 남향키네마를 설립한 강호 일행 역시 5월 21일부터 <암로>의 촬영에 착수했다. 촬영 준비만 4-5개월이 걸린 것이었는데, 촬영이 끝나고도 현상과 편집 등 후반작업을 마무리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윤기정은 <암로>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도왔다. 훗날 강호는 “그 원작 및 편집에 있어서 윤기정을 위시한 카프 선배들의 절대적인 방조를 받”았음을 밝혔다.


서울키노에서 제작한 김유영의 <혼가>와 남향키네마에서 제작한 강호의 <암로>는 해를 넘긴 1929년 1월 26일 단성사에서 공개되었다. 강호의 <암로>에 대해 카프 출신의 영화평론가 서광제는 몇 장의 그림엽서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혼가> 역시 비슷한 수준을 넘지 못했다.


1927-28년 사이 영화 청년들을 규합하여 영화 활동의 토대를 마련한 윤기정은 카프 연극부의 조직에 관심을 기울였다. 카프 연극부는 불개미극단 이후 활동을 멈춘 후 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프에서 공연하려는 작품이 극본 검열에서 통과되기 어려웠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러한 상황을 카프에서는 아동극을 통해 해결해 보고자 했다. 당시 카프의 영향 하에 있던 아동잡지 『별나라』의 자매 단체인 앵봉회가 그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카프 소속 영화인들이 만든 <암로>와 <혼가>가 단성사에서 상영되고 있던 1929년 2월 5일 경성방송국에서는 단성사 변사 우정식이 “영화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영화를 설명하고 가수 유경이가 <혼가>의 주제가를 부르는 등 카프 영화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날 우정식의 “영화이야기”에 이어 앵봉회의 방송극 <어머니의 사랑>이 전파를 탔다. 이분옥, 김희옥, 이정수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이 방송된 이후 앵봉회에서는 본격적인 공연 준비에 나섰다.


앵봉회는 안준식이 운영하던 아동잡지 별나라사의 후원으로 조직되었다. 윤기정은 송영과 함께 각본부를 맡았다. 그 외 무대의장은 임화, 김용환, 음악부 맹오영, 선전부는 안준식, 박세영, 최병화가 책임졌다. 1929년 3월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첫 번째 공연에서는 송영 작 <자라사신>(1막)과 박세영 작 <소병정>(1막)이 공연되었다. 이중 박세영의 <소병정>은 노동자를 의미하는 소병정들이 의좋게 살아가는 복사동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마을에 감화원에서 도망 온 복만이라는 소년이 찾아와 복사동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 선량한 소년으로 개변된다는 이야기이다. 감화원이 아닌 복사동과 같은 사회에서만 인간이 개변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이상과 염원을 담았다. 참고로 윤기정이 참여한 앵봉회는 염군사나 불개미극단이 실현하지 못한 대중 공연을 성공시킨 최초의 카프의 연극 단체이자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의 전통에 있어 가장 앞자리에 있는 극단으로 그 의미를 지닌다.


1929년 봄의 분위기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할 때이다. 이는 코민테른 12월 테제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당시 코민테른에서는 조선에서 당 재건을 위해 인테리 중심의 조직 방법을 버리고 공장이나 농촌으로 들어가 노동자를 모아 적색노조를 만들고 빈농을 모아 적색농조를 만드는 식으로 조직 활동을 하여 탄탄한 토대 아래에서 당을 재건하라는 식의 지령을 내린다. 이러한 방침에 맞춰 연극, 영화인들도 농촌과 공장으로 들어가 조직 활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었는데 가장 먼저 주인규와 남궁운, 김형용 등 함흥 출신 영화인들이 원산총파업이 한창인 원산으로 가서 원산 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원산영화공장을 설립하여 원산 주민들을 위안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이들은 고향 함흥으로 가서 신흥영화공장을 설립하고 영화 제작을 추진했지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때 서울에 있던 윤기정은 카프 서무부를 맡아 카프의 살림을 책임졌다. 또한 각지의 행사와 강연에 주요 연사로 무대에 섰다. 대표적인 경우가 1929년 5월 수원공회당에서 열린 카프 수원지부 문예강연이었다. 박승극이 주도한 이 문예강연회에서 윤기정은 박팔양의 “근대예술사조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 후 무대에 올라 “당면의 예술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윤기정의 뜨거운 목소리에 청중들은 열광적인 호응을 보냈다. 윤기정이 강연대에서 내려오고 주최 측에서 폐회사를 하는 도중 임석 경관이 호루라기를 불며 폐회사를 중지시키고 청중들의 해산을 명령했다. 성난 청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밭 가는 농부의 아리랑은 토지와 장리가 걱정이고, 제사 공장 처녀의 아리랑은 시집갈 밑천이 걱정”이라는 가사의 「수원 아리랑」을 합창하며 임석 경관의 해산 명령에 저항했다.


수원에서의 경험은 윤기정에게 뜨거운 인상을 남겼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했으며 보다 명확하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향해 있었다. 그해 여름을 앞두고 동경의 카프 소속원들인 이병찬, 안막, 한재덕 등은 여름방학 기간 동안 조선 순회강연 및 연극 공연을 추진한다. 윤기정은 박영희, 임화와 함께 이들이 주최하는 강연회의 연사로 참여하였다.


윤기정은 강연회의 연사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닌 카프가 갖추지 못한 연극, 영화 부문에 있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민은 깊어졌고 그간 제작한 세 편의 영화를 돌아봤다. 카프의 젊은 영화 청년들이 제작한 영화들이 극장에서 상영되어 관객들을 만났으나 나운규의 <아리랑>이 가져온 것과 같은 신선한 충격과 대중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의욕은 넘쳤으나 경험 미숙과 기술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여전히 조선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카프의 젊은 영화 청년들이 이들 기성 영화인들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과 고충을 담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기성의 영화인 중 진보적 가치를 함께 하는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고향으로 떠났던 김태진(남궁운)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아리랑>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뿔 빠진 황소>를 연출한 영화감독이면서 카프 소속의 후배들이 만든 <혼가>에 흔쾌히 출연해 준 인연이 있었다. 그를 카프에 끌어들이게 해 그를 통해 기성의 영화인과의 결합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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