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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설립

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8.

by 한상언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원산을 떠난 주인규, 김태진, 김형용 등은 그들의 근거지인 함흥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원산총파업의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된 변호사 이인을 제작자로 세워 1929년 2월 신흥영화공장을 조직하고 <연애와 종>, <충견의 사> 등의 작품을 제작할 계획을 세운다.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맞춰 노동자들이 많은 함흥을 근거지로 영화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무엇이든 부족한 지방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노조를 조직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결국 그해 4월, 주인규가 영화공부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다며 영화제작 대열에서 이탈하며 흐지부지 되었다.


국경을 넘은 주인규는 영화 유학을 대신하여 노동운동에 헌신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노동조합과 관련한 활동을 전개한 그는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나뭇단 사이에 프로핀테른의 "10월 서신"을 국내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문건은 1930년대 노동운동의 실천적 지침이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규는 가명으로 조선질소비료회사에 위장취업하여 한동안 노조활동가로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함흥에서 영화 활동을 추진하던 김태진과 김형용은 주인규가 빠진 후 별다른 진척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와 영화 활동의 재개를 준비했다. 효제동 247번지에 여장을 푼 이들에게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의 전기를 꾀하고 있던 카프의 윤기정과 임화, 김유영이 찾아왔다. 윤기정은 <암로>와 <혼가> 제작 이후 침체한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영화운동을 이끌 전위 단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각은 김태진과 김형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태진이 함흥에서 만들었던 신흥영화공장에서 “신흥”이라는 단어를 떼어 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조직하기로 합의한다.


이 날의 만남은 발기인대회가 되었다. 이들은 신흥영화이론의 확립, 엄정한 영화비판과 연구, 가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영화제작 등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조선영화예술협회와 서울키노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과 기성의 영화인들을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가입시켜 12월 14일에 창립대회를 열기로 한다.


창립대회 역시 김태진과 김형용이 머무는 효제동에서 열렸다. 중앙집행위원으로 윤기정을 비롯해 김유영, 나웅, 임화가 선입되었다. 또한 실무를 담당할 상무집행위원으로 김유영과 백하로가 임명되었으며 서무부에는 백하로, 촬영부 김유영, 연구부 나웅, 석일량, 출판부 윤기정(윤효봉), 임화(최성아)가 맡았다. 영화 현장에 뜻이 있던 김태진과 김형용 등 함흥에서 온 영화인들은 집행부에서 빠졌다. 윤기정 역시 카프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연결시키는 일이 중요했기에 실무에서 벗어나 출판부를 책임지며 기관지 『영화가』의 발행을 준비하기로 한다.


1929년의 마지막은 여느 해와 달리 연말의 들뜬 분위기와 어수선한 시국으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이 출범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체포된 뒤숭숭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12월 30일 아성키네마에서 영화인 망년회가 열렸다.


이날 망년회는 신년 특별 영화로 <젊은이의 노래>가 조선극장에서 개봉될 예정인지라 그 영화의 관계인들과 신흥영화예술가동맹원들이 함께 하여 시작부터 잔칫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술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불만이 쏟아져 나오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비판은 주로 신문사 영화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에 쏠려 있었다.


영화인들을 흥분시킨 일은 『중외일보』의 정인익이 술자리에서 여배우 조경희의 양말을 강제로 벗긴 후 그것을 찾으려거든 찬영회 사무실로 오라고 해 갔더니 강제로 입을 맞추려 한 사건이었다. 뒤늦게 자리에 참여한 나운규는 흥분한 사람들을 부추겼다. 나운규의 거친 목소리에 다들 팔을 걷어붙였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이끌던 윤기정 역시 찬영회 회원들의 만행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특히 11월 『중외일보』 지면에 정인익이 쓴 연재기사는 조선영화인들을 모욕하는 것이었기에 이에 대해 준엄한 항의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모인 50여 명의 영화인을 4개의 조로 나누어 각기 역할을 분담해 주었다. 이원용이 한복 조끼를 벗어 깃발을 만들었다.


31일 새벽 1시, 30명 정도 되는 첫 번째 조가 화동 중외일보사로 쳐들어갔다. 신문사 안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찬영회 회원인 최상덕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화인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구타를 가했다. 그리고는 인쇄소로 들이닥쳐 신년호를 발행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가고 있던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멈춰 세우고 기물을 파손했다.


최상덕을 구타한 후 흥분한 영화인들은 전 『매일신보』 기자로 찬영회를 이끌고 있던 광화문통의 이서구 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인지라 나운규가 조용히 그를 불러냈다. 영문도 모르고 밖으로 나온 그를 유도 선수 출신 이원용이 들어 던졌다. 새벽 4시쯤 숭이동으로 달려간 영화인들은 조선일보사의 안석주와 동아일보사의 이익상의 집을 습격하였다.


날이 밝자 폭력행위에 참여한 영화인들이 체포되었다. 폭력행위에 가담하지 않아 체포를 면한 영화인들은 또다시 아성키네마에 모였다. 정인익이 중외일보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곳으로 향한 이들은 정인익을 구타 후 조선영화인들을 모욕한 기사를 취소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찬영회원들이 이서구의 동양영화사에 모여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화인들은 곧장 동양영화사로 몰려갔다. 몸을 피했던 윤봉춘이 달려와 찬영회의 김을한과 협상을 시작했다. 피해 당사자인 조경희가 정인익의 만행을 증언하자 찬영회원들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윤봉춘은 이들에게 조선영화를 욕보인 것에 대해 사죄하고 그 온상인 찬영회를 해산하라고 주장했다. 결국 찬영회는 영화인들에게 사과하고 단체를 해산하기로 하고 체포된 영화인들을 조속히 석방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 한다.


영화감독 홍개명을 비롯해 나웅, 남궁운, 이원용, 김형용 등 총 5명이 검사국으로 보내졌고 나운규, 윤봉춘, 이규설, 임운학, 한창섭, 이진권, 안경석 등 검거하지 못한 7명은 서류만 검사국으로 넘겨졌지만 찬영회에서 선처를 부탁하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원들이 주축이 된 소위 “찬영회 사건”은 스스로 영화노동자라 부르던 영화인들이 거둔 하나의 승리였다. 카프 소속의 영화인뿐만 아니라 조선영화계에 활동하고 있던 많은 수의 영화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되었다. 이들이 대오를 지어 밤거리를 행진하며 “신흥영화예술가동맹만세”를 고창하였고 찬영회원들에게 “부르주아의 기관신문, 총독부 어용신문 기자들”이라 지칭하며 “우리들의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연구에 방해되는 너희들을 말살할 것”이라는 식으로 엄포를 놓았다. 이 날의 경험은 1930년의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활발한 활동을 예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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