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9.
찬영회 사건으로 신문기자들의 사과를 받아 낸 영화인들은 홍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신문사 영화 기자들과 소원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안석영처럼 찬영회 회원 몇몇은 카프 소속이었기에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이끌던 윤기정은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신문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소속의 여러 영화인은 신문사의 중요 필자였기에 특별한 이유 없이 조선영화를 매도하여 영화인의 반감을 살 필요가 없었다.
각 신문에서는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이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보냈다. 1930년 3월 18일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서 주최한 두 편의 조선 영화, <꽃장사>와 <회심곡>에 대한 합평회는 영화인과 신문기자 사이의 갈등이 별 탈 없이 봉합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행사였다. 특히 이 합평회는 그 내용이 신문에 그대로 보도되었는데, 『조선일보』 외에 영화인들의 공분을 샀던 『중외일보』에도 같은 내용이 그대로 수록되었다. 이는 특기한 일로 영화인들에게 보내는 신문사 기자들이 보여준 배려였다.
합평회의 좌장을 맡은 윤기정은 합평을 이끌면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특히 안종화가 연출한 <꽃장사>에 대해서는 ‘봉건적, 퇴폐적 작품’이라며, 내용적 측면에서 여자가 부호의 집 하녀로 있을 때 정조를 유린당한 후 축출당하였다는 것이 부르주아에 대한 조그마한 폭로이지만 주인공이 공장에서 쫓겨나 아무 목적의식 없이 개인행동으로 흐른 것은 불쾌하며 엄정히 비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견은 코민테른 「12월 테제」에서 강조한 민족개량주의자들을 근로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적용한 것이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원들이 신문 지면을 이용하여 기성 영화인에게 가한 비판은 이미 <아리랑 후편>에서부터 시작된 상황이었다. 나운규는 방종에 가까운 행동과 방탕한 생활 태도로 자신이 이끌던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산하며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때 단성사에서는 재기를 노리고 있던 나운규에 주목했다. 나운규라는 이름값과 영화적 재능을 기대하고 있던 단성사에서는 나운규의 성정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나운규에게 이구영 연출로 제작하는 <아리랑 후편>에 출연하는 대신 <철인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해줄 것을 약속한다.
1930년 2월 <아리랑 후편>이 개봉되자 찬영회 사건에서 함께 움직였던 나운규에 대한 윤기정을 위시한 서광제, 남궁옥 등 신흥영화예술가동맹원들이 비판을 가했고 이필우, 안종화, 나운규 등의 반론이 이어졌다. 나운규로 대표되는 조선영화계의 민족개량주의자들과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식의 신흥영화예술가동맹원들의 평론 활동은 1930년 5월 들어 카프 중앙과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사이의 갈등으로 큰 전환을 맞는다.
「12월 테제」의 영향으로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선택한 카프에서는 1930년 5월 카프 중앙을 튼튼히 하고 각 지방 조직을 확대하여 지방에서의 활발한 연극, 영화 활동을 보장하는 식의 조직 변화를 꾀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능한 역량을 총동원하여 카프 중앙의 기능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카프에서는 기술부를 신설하고 그 산하에 각 장르를 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카프영화부 역시 기술부 산하로 들어갔다. 대신 카프영화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외곽조직인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해산하고 대신 그 소속원들을 카프영화부로 합류시키고자 했다. 또한 평양을 시작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각 지역 지부 역시 카프의 지방 지부로 합류시켜 지방의 영화제작 능력을 강화할 계획도 세운다. 이미 찬영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남궁운이 1930년 2월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지부 설치를 위해 평양으로 가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평양지부의 장원섭, 평양청년동맹회원이자 평양노동연맹 검사위원 현익겸 등을 중심으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평양지부를 조직한 상황이었다.
윤기정이 주도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해산과 카프영화부로의 전환 결정은 1930년 4월 20일 개최된 중앙위원회에서 주요 의제로 채택된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다음 날 열린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총회에서 김유영, 서광제 등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한다. 결국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조직원들은 해산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갈라졌다.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카프영화부의 책임자 윤기정이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탈퇴하고 김유영, 서광제 등은 카프를 탈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카프의 제작 역량 강화 조처가 카프영화인들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자, 기술부와 연극부의 책임자 김기진과 미술부 책임자 안석영이 중재에 나섰다. 이들은 양측 사이의 의견을 수렴 후 기존 김유영, 서광제 등의 카프 탈퇴 결정은 취소하고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해산하며 이를 대신할 조직으로 카프 직속으로 서울키노를 부활시키는 내용의 중재안을 내놓았다. 양측에서는 이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 카프 영화부 내부의 갈등은 일단 봉합된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해산 문제로 불거진 갈등은 해결되었지만, 이는 잠정적인 것으로 카프 영화부 내부에 두 세력이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카프 영화부를 주도하고 있던 윤기정과 임화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전위로서 카프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시 말해 조직 논리에 충실한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영화주의자에 가까운 김유영과 서광제는 프롤레타리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조직 논리를 뛰어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 실천가 쪽에 가까웠다.
이 무렵 <꽃장사>를 연출한 안종화는 조선예술영화협회에 필름을 제공했던 이우 그리고 안석영 등과 엑스키네마를 세우고 안석영의 시나리오 <노래하는 시절>을 영화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카프 직속의 서울키노와 안종화와 안석영 등이 중심이 된 엑스키네마가 설립되자 서울키노의 김유영, 이효석, 서광제 엑스키네마의 안석영과 안종화 등 총 5명이 시나리오 발표 및 연구를 진행할 계획으로 1930년 5월 26일 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조직한다.
씨나리오라이터협회에서는 그 첫 번째 사업으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회원들이 이어 쓰는 형식의 연작시나리오를 『중외일보』 지면에 연재하기로 한다. 제목은 「화륜」이었으며 각 회차마다 서울키노에서 해당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연재물의 삽화처럼 배치하였다.
1930년 7월 19일부터 시작된 연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통영의 유지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화륜」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김유영, 서광제 등 서울키노의 구성원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종화가 집필을 포기하면서 4명이 나눠 쓴 시나리오를 서광제가 촬영용 시나리오로 정리하였고 연출은 김유영이 맡기로 하고 제작에 들어간다.
카프영화부의 책임자 윤기정은 서울키노가 통영의 삼광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화륜>은 카프의 조직 활동과 무관한 분파적 행동이라 판단했다. 특히 카프와 무관한 씨나리오라이터협회는 카프의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에 도전한 행위로 보았다. 서울키노를 카프 직속 영화단체에서 배제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영화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