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12.
카프 제1차 검거 사건으로 감옥에서 나와 감시 상태에 놓인 윤기정은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점포를 관리하며 문필 활동에만 전념할 뿐, 더 이상 카프영화부 활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카프영화부의 다른 멤버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지지 마라 순이야>를 만들기 위해 광주로 내려갔던 김태진과 이규설은 함흥으로 돌아가 감옥에서 나온 한설야와 함께 길안든영화사를 세웠다. 강호와 한재덕은 평양으로 가서 영화제작을 계획했다.
지방에서의 영화제작은 쉽지 않았다. 함흥의 김태진과 이규설은 길안든영화사를 주인규와 황운에게 맡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시기 강호도 서울에 왔다. 윤기정을 대신하여 카프 영화부를 책임진 이들은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키노와 청복키노로 나뉜 카프의 영화제작 조직을 통합하여 그 역량을 확대할 계획을 세운다.
김유영과 서광제가 빠져나간 후 이동식소형극장과 메가폰으로 이어지는 서울키노의 멤버 중 추민, 나웅 등이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32년 12월 김태진, 이규설, 강호, 추민, 나웅 등이 중심이 되어 동방키노가 조직된다. 이들은 검열로 인해 제작될 수 없는 영화를 대신하여 소위 지상영화라는 것을 신문에 발표하고 일본의 프로키노와의 연계를 통해 국제적인 영화운동에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이러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카프영화부의 기관지 격인 영화신문 『영화부대』를 발간하였다.
집체작 「도화선」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기관지 『영화부대』 3호가 인쇄에 넘겨진 1933년 2월, 동방키노의 사무실인 장사동 198번지 행랑방으로 종로서 고등계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곳에 있던 이상춘, 김태진, 강호 등이 체포되었으며 일본에서 발행된 『우리동무』, 『영화구락부』, 『적기』 등 불법출판물이 압수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의 기관지 『영화구락부』를 조선 내에 배포하려 시도한 소위 ‘영화구락부 사건’으로 불린다. 동방키노의 주요 멤버들이 체포된 가운데 다행히 몸을 피한 추민이 「도화선」을 마무리하고 기관지 『영화부대』 3호를 발간하였다. 이것으로 동방키노의 활동은 마무리되었다.
카프 직속 극단인 신건설 또한 ‘영화구락부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1932년 여름 설립된 극단 신건설은 각본 검열에 통과되지 못해 공연하지 못하다가 그다음 해 1월 진용을 정비해 재출발을 추진하였다. 창립작으로 준비한 신고송의 <수양단>, 권환의 <주생원> 등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여 오토 뮤러의 <하차>, 집체작 <지옥> 등을 김승일 연출, 정하보 무대로 공연했다. 공연이 마무리되자마자 이상춘, 강호, 김태진 등 동방키노와 신건설에 참여한 멤버들이 ‘영화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긴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갔던 신건설은 1933년 11월, 무라야마 토모요시가 각색한 레마르크 작 <서부전선 이상 없다>(나웅 연출, 이상춘 미술)(5막 16장)의 공연을 준비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본정의 일본인 극장인 경성연예관을 대관한 신건설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카프연극부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카프 작가, 예술인들을 총동원하였으며 진보적 학생연극의 회원들을 연기자, 조명 조종자, 효과, 대도구, 소도구 담당자로 참여시켰다. 이 공연의 무대는 영화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이상춘이 불기소로 석방되어 맡았는데 큰 극장 무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2층 규모로 설치하였는데 공연 중 무대장치가 무너지면서 관객들이 무대 장치를 일으켜 세워 공연을 마무리짓기도 했다.
극단 신건설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4월 인천 애관에서 재공연을 펼쳤으며 5월에는 왕십리의 광무극장에서 공연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신건설 공연에 참여했던 조용림의 가방 안에 불온 문건이 들었다는 이유로 금산에서 체포되었고 곧바로 신건설 소속 단원들인 나웅, 이상춘, 장철기, 장병창 등 간부들에 대한 검거가 이루어진다. 다음 달에는 김욱, 전평, 이소웅, 임정환, 한효 등도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카프 소속원들 대부분이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이미 1934년 2월 카프중앙집행위원 직을 사임한 윤기정은 8월 25일 직장인 남대문통 4 정목 21번지 홍경오포목점에서 일하던 중 본정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다음 날 종로경찰서에서는 백철과 임화의 부인 이귀례를 검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본정서에 체포된 윤기정은 27일 기차에 실려 전주서로 이송되었다. 이미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기영과 송영도 같은 기차를 타고 함께 전주로 이송되었다.
카프를 탈퇴한 박영희와 김유영 등을 포함하여 총인원 400여 명이 체포된 소위 전주사건으로 전주경찰서 유치장은 만원이었다. 윤기정은 이기영, 송영 등과 함께 정읍경찰서로 옮겨졌다가 심문을 위해 다시 전주경찰서로 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다. 일제 경찰의 야만적 고문으로 함흥의 김승일과 신건설사의 장병찬이 사망하였다.
해를 넘긴 1935년 1월, 전주서에서는 연극을 통한 적화선전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윤기정을 포함하여 카프의 간부급 인원 및 신건설사의 중심인물 총 23명을 공판에 회부하였다. 1935년 5월 체포를 면한 임화가 카프의 정식 해산계를 제출하면서 카프는 문을 닫았다. 윤기정은 이 소식을 감옥에서 들었다.
10월에 열린 공판에서 검사는 “사회주의에 공명하여 사상의 실현을 획책한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윤기정은 “처음 부르주아문학 서적을 읽기 시작한 것이 알지 못할 사이에 좌익서적을 읽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이미 4년 전에 사상전환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된 것과 가정사정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날 재판정에서 박영희는 그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였고 향후 종교생활을 하겠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대부분의 카프 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4회 공판에서 검사는 윤기정에게 박영희, 이기영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12월에 열린 최종 판결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윤기정은 1년이 넘는 수형 생활을 마치고 12월 17일 전주 감옥을 나온다.
전향을 선언하고 나온 문학인들은 감옥 안에서 구상하던 작품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윤기정 역시 단편을 써서 발표했다. 전향 후 첫 작품인 「자화상」에서는 팔지 않으려는 그림을 도난당하는 이야기를 썼다. 양심 혹은 신념을 도둑맞은 작가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이후 몇 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펜을 들어 작품을 쓰기에는 흥미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글을 발표했다. 감옥 밖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한 해 정도가 지난 1938년 전향자로 구성된 사상보국연맹이 결성되었다. 윤기정은 현제명, 박영희, 고경흠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간사로 선임되었다.
전시 하에 글을 쓰는 것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참하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윤기정은 더 이상 글을 발표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거부 한택수가 운영하던 성북동의 고급요릿집 음벽정을 1939년 2월 10일 문승우, 박시양, 정겸석과 각각 5천 원 씩을 투자하여 합자회사로 만들어 지배인으로 일했다. 더 이상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합자회사 음벽정은 1년여 만인 1940년 5월 해산하기로 했으며 윤기정은 청산인이 되어 7월 청산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