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행 일기 6
월요일이다. 직장인이나 학생이 가장 싫어하는 요일은 단연코 월요일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심지어 여전히 그렇다. 회사를 그만둔 지 벌써 6년이 지나가는데도. 월요일이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오래가는 것 같다. 그런 내가 짧은 기간이지만 학생이 되었고 월요일은 더 부담스러워졌다.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는 것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부터다. 잠시 월요일이 좋아질 뻔했지만, 대신 오리엔테이션과 함께 두려운 스피킹 테스트가 있다. 오리엔테이션은 학교와 수업 관련 이야기 그리고 태리타운에 대한 소개와 몇 가지 조심해야 할 사항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조심해야 할 것들이 흥미로웠는데, 예를 들면 지역 공동체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했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길을 건널 때 신호를 잘 준수할 것,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 것 같은 정말 기본적인 이야기, 그리고 맨해튼에 놀러 나가서 무슨 나이트클럽 이런데 함부로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마흔이 넘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듣자니 진짜 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대면으로 하는 게 아니라 덜 긴장되려나. 스피킹 테스트는 줌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나처럼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이야 자가격리가 없지만, 백신 접종을 받지 않은 일부 학생들은 자가격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한다고 한다. 4명의 학생이 한 조가 되었고,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테스트를 받는 형식이었다. 매도 처음에 맞는 게 낫다고 처음에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깨달았지만 정말 다행히도,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들었다. 유럽에서 온 학생이었는데, 굳이 왜 영어를 배우러 왔나 싶을 정도로 그 어떤 질문에도 척척 답을 해냈다. 앞사람이 이렇게 기를 죽이고 나니 그다음 순서로 하기는 곤란했다. 나 말고 손을 든 두 번째 지원자는 첫 번째 학생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유창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두 명. 매너 좋은 남학생이 내게 순서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나는 마지막에 하겠다고 했다.
세 번째 학생의 테스트가 끝나고, 드디어 나의 순서가 왔다. “앞의 학생들 질문들을 들으니까 꽤 어려운 것 같아요. 벌써 떨리네요.” 하고 일단 너스레를 떨었다. 내겐 좀 쉬운 질문을 달라는 일종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선생님은 내 뜻을 헤아렸는지, 아니면 내 실력을 눈치챘는지, 앞의 학생들에 비해 좀 무난한 질문들을 던졌다. “당신의 만트라를 지키면서 사는 게 중요한가요?” “한국의 요즘 이슈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질문이 있었는데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믿는 만트라가 있는지 모르겠고, 오징어 게임과 bts를 예로 들면서 한국이 문화의 중심이니 어쩌니 그런 이야기를 했다. 끝나고 나니 얼굴이 좀 빨개져 있었다.
저녁 늦게 반이 확정되었다. 나는 A, B, C 중에서는 높은 레벨인 C였지만, C 안에서는 낮은 레벨이었다. 스피킹 테스트를 좀 더 잘 봤으면 올라갔을까, 아니면 그전에 본 리딩이나 리스닝이 부족했을까.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뭐, 어디에 속하든 내가 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잘하는 학생들하고 있으면 기죽어서 한마디도 못할 수도 있으니 다행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본격적인 수업이 내일부터 시작된다. 기념으로 컵라면을 하나 꺼냈다. 따뜻한 라면 국물은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효과가 있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사실 영어 수업이라 서라기보다는 나보다 훨씬 어린, 어쩌면 조카뻘, 더 싫지만 자식뻘인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하니 그게 떨렸다. 게다가 얼마만의 학생 신분인가. 떨린다기보다는 설렌다는 게 더 어울리는 상황 같기도 하다.
수업 시간표를 보니 화요일엔 오전 수업이 없었다. 오후 1시까지 내게 숨 돌릴 여유 시간이 생긴 셈이다. 동네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 같아서 학교에서 조식을 챙겨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러 내려가기로 했다.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커피집, coffee labs에 갔다. 이곳에서 연수했던 학생들이 베스트로 꼽기도 했고, 실제 리뷰에서도 이 커피집의 평점이 가장 놓았다. 진한 커피 향에 이끌려 들어가 보니 주인아저씨가 원두를 볶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커피 음료의 종류도 엄청 다양했고, 굿즈도 팔고 있었다. 맨해튼에 비해 여유로운 태리타운의 커피집은 종업원도, 손님들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단골인 것 같아 보이는 손님과 주문받으면서 대화도 나누고, 내게도 양해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또 느긋한 미소를 보였다.
주문 과정은 스타벅스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커피 내리는 일에는 프로다운 속도감이 느껴졌다. 워낙 유명한 커피집이다 보니 분명 자부심이 있을 터. 그 자부심만큼 커피 맛도 엄청 좋았다. 실내에서 마실까 하다가 밖에 벤치가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가을이지만 아직 여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어서 햇살이 따뜻하다. 따뜻하다 못해 눈이 부셔서 5분 정도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다음에는 독서를 하며 커피 한 잔 들이켜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의 인기가 남달라 실내에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다. 참새방앗간 같은 이곳에 동네 주민들이 덜 오는 시간대를 공략해야겠다.
태리타운 동네는 한적했지만, 그렇다고 적막한 곳은 아니었다. 꽤 인기 있어 보이는 그리스 음식점, 타코 음식점, 피자 가게 그리고 결국 가보진 못했지만 한식당도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태권도장도 있었다. 세븐 일레븐과 CVS도 있었는데, 번갈아 가며 자주 들르게 될 곳임을 직감했다. 슈퍼마켓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도대체 여기에는 뭘 파나 궁금해서 이리저리 구경했는데, 결국 물이랑 요거트만 하나씩 샀다. 학생 신분인지라 좀 아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점심은 슈퍼에서 산 요거트로 간단히 때우고, 첫 수업 강의실로 찾아갔다. 문법 수업이었는데, 선생님이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맨 앞은 좀 부담스러워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이십 년 전 같으면 맨 뒤로 갔을 테지만, 요즘엔 눈이 잘 안 보여서 앞자리에 앉기는 해야 되기 때문이다.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은 칠판에 구글 클래스룸 주소를 크게 적었고, 거기로 들어가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교재와 노트 그리고 필통을 챙겨 온 나는 어쩌란 말인가. 심지어 필통에는 연필, 펜, 형광펜, 지우개까지 이것저것 정성스레 담아왔다. 20년 전에나 필요한 준비물이었을까. 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모두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갖고 있었고, 능숙하게 자판을 두들기며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갔다. 당혹스러운 나의 눈빛을 읽은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려 했다. 나는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눈이 안 보여서 둘째 줄에 앉았는데, 선생님 필기 잘 보려고 둘째 줄에 앉은 건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이 내 눈을 자극한다. 그리고 내 자존심도 자극한다. 클래스룸은 여긴데, 무슨 구글 클래스룸으로 또 들어가라는 건지. 오늘날의 수업이란 이런 것이구나… 현타가 온다.
첫 수업을 어쨌든 마쳤다. 영어가 어려운 게 아니라, 인터넷 활용이 어려웠던 수업이었다. 나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긴 한데, 이런 최첨단? 시스템을 이용하는 수업이 아닌지라, 참 낯설다. 꺼내놓은 노트와 연필이 그렇다고 쓸모없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노트북이나 아이패드에 바로 답을 쓰고 수정했지만, 그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종이에 답을 쓰고 고쳤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잘 활용했다고 해야 할라나. 나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미래까지 바라볼 여유가 없는 학생이기도 했다.
첫 번째 수업과 두 번째 수업 사이 10분의 여유가 생겼고, 나는 방으로 뛰어가 아이패드를 챙겼다. 두 번째 수업부터는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어…라고 결의를 다진다. 과연 신무기를 챙긴 고인물은 이번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