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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Jun 02. 2023

나의 n번째 고향

15시간 가까이되는 여정 끝에 드디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차례대로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들. 변하지 않은 역 벤치의 모양, 뒷 건물의 벽돌색, 그리고 건너편 식당 간판의 그림까지. 순서대로 확인하고 나니 움츠려 있던 어깨 근육이 느슨해졌다. 무사히 도착했다고 가족 카톡방에 인증사진을 보내고 (아주 오랜만에) 구글지도의 도움 없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어때? 고향 간 기분이 좀 드나?"


엄마의 답장을 보고 멈춰 서서 주변을 다시 돌아보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아, 이런 게 고향 온 기분이려나


고향 물어보는 질문이 난감하던 때가 있었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는데, 나는 태어난 곳에서 자라지 않았고 자란 곳도 여러 곳이고 자란다는 시기는 정확히 언제인지... 어느 곳을 고향이라 부르기에 늘 자격미달 같았다.


그런데 다 커서 1년밖에 살지 않았던 하이델베르크를 감히 고향이라 불러도 될까?


해답을 찾는 데 네이버 국어사전의 도움을 받았다. 사전이 제시하는 고향의 세 가지 정의 중 마지막 정의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이렇게 생각하니 고향이 더 이상 복잡하지 않았다.


이제 정답 없는 검열의 과정은 건너뛰고 마음이 느끼는 대로 고향을 생각해보고 싶다.

철학자의 길에서 만난 양 떼

하이델베르크는 나에게 유럽에서의 고향인 것이다. 유럽 와서 처음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그곳에서 나는 정말 더 자랐다. 이 작은 마을에서 사계절을 꼬박 지나면서 너무 더운 날엔 선풍기 바람 쐬러 잠시 들릴 수 있는 이웃집이 생겼고, 어디에 있는 길모퉁이에 가면 박쥐가 보이는지, 어느 카페의 티슈가 가장 예쁜지를 알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다 보면 어디서든 반가운 얼굴을 마주치곤 했는데, 그렇게 작은 순간들이 하이델베르크가 고향일 수 있는 이유겠다. 고향을 새로 정의하니 내 삶에 여러 개의 고향이 존재했다.


미화되는 기억 때문이려나, 수많은 첫 경험이 새겨진 모든 장소들이 애틋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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