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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Nov 15. 2022

추어탕 먹기 딱 좋은 날

뚝배기 속 걸쭉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갖다 댔다. 오므린 입술로 뜨거운 공기를 호, 하고 불어 식힌 후 입 속으로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따끈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빠른 손놀림으로 국물을 떠서 부지런히 입 속에 넣었다. 건강한 맛과 향이 식도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며칠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이제야 살 것 같다.      


“크으, 좋다 좋아. 이 맛이야.”     


추어탕 국물은 가스 불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여전히 보글보글 끓고 있다. 적갈색 국물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를 바라보며 언제부터 이렇게 추어탕을 좋아했었나, 생각에 잠겨본다.   

  



찬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추어탕이 떠오른다. 감기 기운이 있거나 피곤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처음부터 추어탕을 좋아한 건 아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아빠는 추어탕 외식을 자주 제안했다. 추어탕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추, 자로 시작하는 그 음식이 영 탐탁지 않았다. 추하다, 와 어감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못생긴 맛이 날 것만 같았다. 아빠는 기다랗게 꿈틀거리는 미꾸라지탕을 어떻게 먹는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까다로운 엄마가 미꾸라지탕을 먹기 위해 순순히 따라나서는 건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그걸 어떻게 먹어요? 징그럽잖아요.”

“괜찮아, 미꾸라지가 눈에 보이지 않게 다 갈려져서 나와.”

“뭐라고요? 미꾸라지가 다 갈려서 나온다고요? 윽..”

“왜? 얼마나 몸에 좋은 음식인데.”

“난 안 갈래요.”     


여러 번의 추어탕 제안을 여러 번 거절했었다. 멸치, 뱅어포, 고등어, 갈치 등 뼈 채 먹는 생선부터 웬만한 생선 종류는 가리지 않고 잘 먹으면서 같은 어류인 추어탕은 왜 그리 거부감이 들었던 건지. 한데 아기를 키우며 체력이 떨어져 있던 어느 날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추어탕의 건강한 맛에 눈을 뜬 거다. 그날 나는 미각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생애 첫 미꾸라지탕이 입으로 들어온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부추 넣고 들깨 넣어서 먹어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로 자른 부추를 몇 젓가락 집어넣고 들깨가루를 솔솔 뿌린 후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국물을 떴다. 작게 벌린 입으로 조심스레 숟가락을 비집고 넣었다. 음,, 응? 생각했던 것보다 맛이 나쁘지 않다. 혀끝에서 뼈 해장국 국물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육개장 국물 맛과도 비슷한 것 같았다. 확실한 미각을 느껴보기 위해 몇 숟가락 더 떠서 입으로 넣었다. 으응? 이때까지 먹어본 탕 종류와 비슷하지만 명징하게 다른 구수함이 따라붙는다. 풍미가 깊고 감칠맛이 남다르다.           


“어떠냐? 괜찮지? 몸에 좋은 음식이야. 많이 먹어라.”

“먹을 만하네요.”     


계속 거부해오던 굳은 곤조 때문인지 맛있다, 는 말이 쉬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분명 맛이 있었다. 긴 대답 대신 맛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천천히 음미하며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진한 국물 맛이 온몸을 휘감고 내려간다. 국물을 떠먹을수록 추어탕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이런 깊은 맛을 모르고 오해만 하고 있었다니, 추어탕 입장에선 억울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추어탕의 추, 자는 ‘가을 추’와 ‘고기 어’가 합쳐진 모양새인 ‘미꾸라지 추’에서 비롯되었단다.      


특히 가을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는 가을 보양식으로 손꼽히는 식재료다. 미꾸라지로 만든 음식은 추어튀김도 있다. 추어탕을 먹으면서 추어튀김과 함께 곁들인 적이 있는데 씹히는 식감이 괜찮았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무궁무진한 미식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게 된다. 어릴 적 못 먹었던 음식을 비로소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인생의 깊은 맛도 더불어 알아가는 중이다.    

        



“생일인데 뭐 먹으러 갈까?”     


생일날 먹고 싶은 음식 역시 추어탕이 떠올랐다. 마침 늦가을에 태어나 추어탕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베프와 나는 추어탕을 먹으러 갈 때마다 “추어탕 먹기 딱 좋은 날씨”라고 입을 모으며 얼마 만에 먹는 추어탕인지 손으로 꼽아본다.         


우리가 함께 가본 추어탕 집은 세 군데 정도가 있는데 처음 가본 곳을 가장 좋아한다. 그곳은 다른 추어탕 집과 차별화된 곳이다. 소면, 돌솥밥, 굴젓이 함께 나오는데 추어탕 한 그릇을 싹싹 비운 후 누룽지 돌솥밥 위에 굴젓을 올려먹는 맛이 기가 막히다. “외국인들은 이 맛 정말 모를 거야”라는 말과 함께 두둑하게 배를 채우며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나간다.      


장소가 어디든 좋아하는 사람과 추어탕 한 그릇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호호, 불어가며 먹는 보양의 맛은 몸 건강뿐 아니라 마음 건강까지 챙겨준다. 올 겨울 얼마나 자주 추어탕을 먹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생각만으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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