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조할인 May 30. 2024

[패스트 라이브즈] 후기

이미 지난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품는 다정한 온기

<패스트 라이브즈>는 유년 시절 단짝이던 나영과 해성이 나영의 캐나다로의 이민으로 인해 헤어졌다가 20여 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12살에 갑자기 헤어졌다가 12년 뒤 우연히 SNS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접하게 되고, 다시 12년이 지나 마침내 서로를 마주하며 지난 긴 세월을 곱씹는 이 영화는 많은 감정들을 섬세한 각본과 연출, 연기로 담아낸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지나버린 세월과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을 몰아치는 회한의 감정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에는 서로가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현재의 순간을 긍정하는 태도 때문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다른 삶을 살면서도 같은 순간을 공유하는 교차점이라면, 그 순간을 포착하여 같은 삶을 걷는 평행선으로 만든 것이 연인일 것이다. 비록 이번 생에서는 그 순간이 엇갈려 서로 간은 연인으로 맺어지진 못했지만, 그랬기에 지금의 나로서는 존재할 수 있었다고 영화는 말한다. 지나버린 세월을 붙잡은 채 그 시간 안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인연을 긍정하는 영화의 태도가 사뭇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영화가 와닿았던 다른 이유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새로운 이름과 삶을 개척해 나가는 나영, 아니 노라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노라는 남편인 아서과 이야기할 때는 노라로서 영어로 말하지만, 해성을 만나 이야기할 때는 나영이처럼 한국어로 말한다. 그녀는 한국을 떠나면서 나영이로서의 삶은 한국에 남겨두고 온 것처럼 말하지만, 아서는 노라의 한국어 잠꼬대를 들으면서 노라 안에 지금도 분명히 나영이가 존재함을 느낀다. 그가 다가갈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나영의 존재가 해성과 공명할 때 비치는 아서의 묘한 소외감이 영화의 재밌는 포인트다. 


비록 나는 노라처럼 이름을 바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처럼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삶을 일궈가고 있기에 그녀에게 많이 공감이 되었다. 고향의 친구들은 옛날의 내 모습만을 기억할 테고, 현재의 친구들은 최근의 내 모습만을 떠올리겠지만, 그 두 개의 모습 모두 하나의 나다. 이처럼 영화는 지난 세월과 비어버린 감정을 타인과의 추억을 통해 떠올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머리와 입에서 떠도는 생각과 말을 반추하며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이 세밀한 감정을 섬세히 그려내는 각본과 연출도 좋지만, 무엇보다 표정만으로도 세월을 머금은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감탄스럽다. 


도파민과 사이다로 점철된 요즘 콘텐츠들 사이에서 (비록 미국 작품이긴 하지만) 이런 잔잔하고 여백으로 찬 영화를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영화의 빈 시간들을 관객들의 감정선으로 채워가는 것이 마치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 같은 2000년대 초반 한국 멜로 영화들을 떠올리게도 만들었다. 이처럼 삶 속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만약'의 순간들을 미련이 아닌 이전 생과 이번 생, 그리고 어쩌면 다음 생의 인연으로 남겨두는 영화의 여운이 꽤 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다음 소희]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