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디 공책 Jun 10. 2020

어쩌다 F룸에 갑니다

불문의 공간



어쩌다 보니 그 공간의 문 앞에 서있었다. 4층을,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고 F층으로 부르는 것처럼 나는 그곳의 이름을 F룸이라고 불렀다.





약속 시간이 다가온다. 서둘러 집문을 나선다. 다행히도 집 근방 정류소에 버스가 도착한다. 버스를 탄다. 버스가 출발한다. 아직 약속 장소까지 두 정거장이나 남았지만 마음은 이미 F룸에 있다.





"하차입니다". 삐이익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린다. 내린다. 걷는다. 계단을 오른다. 건물이 보인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화장실에 간다. 거울을 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진다. 그 문 앞에 선다. 서성인다. 미간을 찌푸리며 문 손잡이를 잡는다. 조심스럽게 돌린다. 문이 열린다.





F룸에 들어간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시계를 본다. 아직 약속 시간이 아니다. 불문의 공간에 정적이 흐른다. 언제나 그렇듯 카메라로 핑곗거리를 만든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관없다. 시간만 보낼 수 있다면 괜찮다. 다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시원한 물을 찾아 문을 나선다. 그가 보인다. 눈이 마주친다. 인사를 한다. 그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시원한 물과 함께 F룸에 들어간다. 문이 닫힌다. 이제 시간이 다할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대화가 오고 간다. 그가 질문을 던지면 듣고 있던 이가 대답한다. 질문과 질문의 흐름에, 어떤 이유로 봉인된 시간이 거꾸로 간다. 감정의 뚜껑이 열리자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이 빠진다.





F룸에서 한 노예를 발견한다. 그 노예의 이름은 억압이다. 폭력이다. 관계이다. 눈을 들고 다시 그를 본다. 긴 시간 동안 자라온 사슬을 이제서야 마주한다. 그의 말소리가 들린다. 짧은 시간 동안 공격적이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오히려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다시 약속을 정한다. F룸을 나선다. 바람 한 점 없지만 시원하다.





어쩌다 보니 그 공간의 문 밖에 서있었다. 4층을,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고 F층으로 부르는 것처럼 나는 그곳의 이름을 F룸이라고 불렀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골목에 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