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캥거루 May 04. 2019

엄마의 이력서

  요즘은 조금 호사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창 생산성을 뽐내야 할 시기에, 어쩌다보니 회사에서 보내주는 장기연수에 뽑혀 한적하게 대학교에서 널럴하게 영어공부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홉 시 십분, 외대앞 역에 내리자마자 사이렌 오더로 커피를 하나 주문한다. 오늘은 역에 어설픈 친구들이 많은 걸로 보아하니 개강을 한 모양새다. 조잘조잘 거리는 새내기들을 뚫고 주문한 커피숍에서 시크한 마라토너처럼 커피 한잔을 채어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들어간다. 또 늦었다. 하이 한마디 날리고 구석진 창가 자리로 가서 턱을 괸다. 이리저리 딴생각을 하다 지쳐서 졸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수업이 끝나 있다. 네시 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온다.


  저번 주는 대낮에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여기저기 혼자 쏘다니다 귀가했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뭐가 또 피곤했는지 한산한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집에 왔다. 운동이나 가야지. 운동 전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타이즈와 새로 산 반바지에 후드를 걸치고 한 손에는 셰이크 통 귀에는 이어폰, 머리에는 비니를 눌러쓰고 센터로 갔다. 웜업을 하고 익숙하게 벤치를 잡았는데, 한 세트 돌리고 나니 힘이 빠져버린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운동을 너무 쉬어서 중량이 많이 쳐졌구나 싶다. 시간도 많으니까 오늘부터 다시 운동 제대로 해야지. 이래저래 한 시간 반 정도 코어를 골고루 조졌다. 무리했는지 힘들어서 쭈그려 앉아 샤워를 했지만 기분은 개운하다.


  저녁은 토마토와 계란을 비벼먹었다. 

  방에 들어와 엄마가 내준 숙제를 펼친다. 저번 부주터 엄마가 이력서를 써달라고 했다. 소방서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같이 일을 하자고 한다고, 엄마도 주말에 심심하니 가서 같이 용돈벌이나 하고 싶다고 한다. 나는 보내기 싫었지만 또 그럴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써주기로 했다. 


  자리에 앉아 하얀 화면에 엄마의 인생을 주욱 써봤다. 일남 오녀중 차녀, 고졸. 무역회사에서 사회생활 시작. 결혼 후 시집살이. 시누이 둘에 치매 오신 시어머니. 남편과 20년간 학원을 운영하다 정리. 복지관에서 배식 봉사하다 조리사 일 시작. 7년 간 조리사. 쓰고 나니 괜히 울컥했다. 이렇게 기구한 엄마 인생에 나는 과연 도움이 되는 존재였을까, 적어도 이제는 그래야 할 텐데. 나는 한글자 한글자 힘을 쥐어짜 눌러친다. 정갈한 타이핑이 누가 봐도 슬픔을 뒤집어쓴 아들이 대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마침표를 찍었어도 결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마무리해 냈다. 


  아무튼 엄마의 선택이니, 모쪼록 우리 엄마 잘좀 부탁드립니다. 소방관 아저씨들. 



작가의 이전글 주말2 -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