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캥거루 May 04. 2019

팀장님

좋은 상사와의 인연에 대하여

 나는 철도원이다. 일반기업에서 도망치듯 철도 공공기관으로 이직해, 역무원으로 근무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이직 초기 공기업의 여유로움을 한창 누리면서도 한편으론 반복적인 역무 업무에 지루함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한 때였다. 그즈음, 마침 본부에서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나는 그걸 또 덥석 물어버렸다.


 면접을 보기 위해 일단 오라는 전화에 찾아간 본부 사무실은 입구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칸칸이 파티션 위로 올라온 검은색 머리들과 혹여 마주칠까 봐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만에 맨 넥타이는 너는 다시 회사원이라고 목을 조르며 알려줬다. 복도를 지나 회의실로 갔다. 그곳에는 누가 봐도 공공기관의 직원 같던, 삼촌뻘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그가 눈을 들고 쳐다보며 던진 첫마디를 아직 기억한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라니, 오라고 할 수도 있지 뭘 당신이 미안까지야. 그분은 워드, 엑셀 잘하나요 등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는 종류별로 답을 했다. 끝내 당장 다음 주 월요일부터 본부로 출근하라는 말을 듣고 역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나보다 먼저 도착한 인사발령 문서를 봤다.


 본부 부서로 올라오면서 이전의 여유는 사라졌고, 나는 다시금 특이할 것 없는 회사원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조절할 수 있을 만큼의 바쁨이었다. 전 직장에서의 압박감과 피로 훈련에 단련되어 큰 힘듦은 없었다. 그리고 특히나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 온전히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내게 미안해하던 그분 덕분이기도 했다. 000처의 손석희, 본부의 수석 팀장, 소속장이 네 다섯 번 바뀌는 동안 누구도 놓아주질 못하는 능력자, 완벽한 직장인의 표상이었다. 가끔 튀어나오던 코털만 빼면 외모 또한 완벽했다.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공문 하나 작성할 줄 모르던 신입사원을 마우스 클릭 하나하나부터 가르쳐 줬고, 그 가르침은 정석에 가장 가까운 방법이었으니 시작이 참 좋았다.


 본부 생활은 매끄럽게 흘러갔다. 소속장들이 여럿 바뀌고, 사상 최장의 파업 기간, 보고서로 같이 밤을 새우기를 여러 번 그와 함께 갖가지 일들을 함께 헤쳐나갔다. 그 기간은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밤을 함께 보낸 사람이었다. 팀원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가고 바뀌고 하는 동안 우린 원래 그곳에 박혀있던 것처럼 그대로였고, 내 자리는 T자형 팀 배치의 끄트머리에서 팀장님과 더 가까운 자리로 옮겨졌다. 1년, 2년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야 좀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어떨 때면 팀장님이 내게 의지하는 일도 있었다.


 연말, 정기 인사발령을 앞두고 소문이 돌았다. 본부 근무 경력 10년 차 이상 팀장의 강제 순환전보 소문이었다. 당연히 그도 대상이었다. 일에 치여 건강도 안 좋아지면서 그 자신도 내심 현장 역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해 왔었다. 다만 눈에 밟히는 건 오로지 나였을 것이다. 아직 어린 자식을 더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 나를 여기로 데려올 때 처음 뱉은 그 미안하다는 말이 다시 나오기 직전임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처럼 나 또한 ‘당신이 미안하긴 뭘 또, 충분히 가르쳐주고 챙겨 줬는데.’ 라는 말을 삼키며 그냥 모른 체했다. 여러 번의 송별회에서 취해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같이 택시에 구겨져 가기도 하고, 고꾸라지길 몇 번 끝에 어영부영 보내드렸다. 홀로 취하신 날 “우진아 인마” 하며 갑작스러운 전화가 올 땐 있었어도 낯부끄러운 안녕의 메시지를 주고받진 못할 성격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굳이 유난스런 안녕과 감사의 메시지 없이 소란스러운 송별회 뒤로 몰래 헤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팀장님이 없는 첫날이었다. 그분의 자리에는 새로운 분이 앉아있었다. 오전 내 서서 가벼운 소개와 인사와 여러 가지 현안보고를 했고, 그때만 해도 그냥 그런가보다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내 자리에 앉아 일하다 습관처럼 “팀장님” 하고 부르며 고개를 돌렸을 때,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무언가 실수 아닌 실수를 한 낯섦을 느꼈다. 연초 월요일이다 보니 일이 늦게 끝났다. 책상 서랍을 잠그는 중 아래 서랍에 조그마한 상자가 보였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뺀 자세로 잠깐 생각에 잠겼다. 파란 리본으로 쌓여있는, 만져보니 딱 봐도 남성용 올인원 화장품 같은 그런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끌끌거렸다. 일 빼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시골 출신 아저씨가, 쭈뼛거리며 들어간 백화점 1층에서 “젊은 남자 화장품 어떤 게 좋을까요?” 하며 순진하게 점원에게 모든 걸 맡기고 받아온 결과물. 가지고 돌아와 혼자 나오신 주말에 내 서랍에 넣으면서 당신은 약간의 미소를 지으셨을까 아니면 나처럼 끌끌 거리셨을까.


 가방에 담아 챙겨 나오며 큰 숨을 들이쉬는데 유난히 시원했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전화를 걸어 팀장님 별일 없으시냐 겨우 하루 간의 안부를 묻는다. 뭘 그런 걸 또 사놓으셨냐 내가 던진 말에 그분은 쑥스럽게 더 못 챙겨줬다고 또 미안함을 말한다. 나는 차마 그때 말은 못했지만, 나는 마냥 고마우니 이제 미안해하시지 말고 건강히만 계셔라 정 팀장님. 정 역장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