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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min Yun Mar 01. 2018

일상은 '디자인'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Designer A to Z> 작업 후기



2017년 12월 25일 탄생한 책, <Designer A to Z>


늘 고민한다.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일까. 나는 내가 만들어낸 디자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완성의 상태에서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계속 돌봐주고 키워주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돌보고 키우는 과정에서 더 나은 방식은 없었을지, 더 경제적일 수는 없었는지, 건너뛰고 넘어간 부분은 없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나의 것은 '좋은' 디자인이 되지 못한다. 좋은 것을 만든다는 것은 내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좋은 디자인들은 여백을 지닌 작품이라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는 그의 작품을 통해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맞는 말이다. 디자인 프로세스를 밟을 때, 스스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작업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무언가를 집어넣게 된다. 한 가지 디자인을 둘러싸고 생겨나는 무수한 걱정들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만들어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덕지덕지 붙은 과잉 장식은 관람자가, 사용자가 그들의 생각과 해석을 덧붙이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디자인은 길을 잃어버린다.


예전 나의 작업들 중에도 그런 것들이 많았다. 당시 만족하고 넘어갔던 것들 임에도, 다른 수많은 경험 후에 마주하니 새로운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는 꽉 찬 작업인 것이 적지 않었다. 그래서 언젠간 말 그대로 비어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고, 2017년 12월 25일 <Designer A to Z>라는 이름의 작업으로 그 바람을 작게나마 행동으로 옮겨 보았다. 2017년은 내게 참 바쁜 한 해였다. 바쁜 개강과 과제들, 외부 작업과 산학, 광고 회사에서의 인턴까지. 많은 것들을 쌓아나가느라 스스로 정리하고 비울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비움의 시간은 새해가 오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연말이라는 것이 늘 그러하듯 비움은 또 다른 채움을 위한 준비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쌓아나간 것들을 아귀가 맞게 다시 배열하며 여백을 찾아나가다 보니 문득 다른 이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의 궁금증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여백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 싶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서로의 일 년이 어떤 방식으로든 각자에게 동질감을, 고마움을, 용기를 그리고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것을 느끼게 해 준다면 더없이 좋겠다 싶었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많은 것을 디자인하는 내 주변 12명의 사람들을 '디자이너'라 칭하고 그들에게 알파벳 A부터 Z까지 총 25개의 질문을 보냈다. 질문과 함께 자유로운 사진도 한 장 첨부해주길 요청했다. 그것 말고는 어떤 제한 사항도 붙이지 않았다.


받은 답변들은 A5라는 판형 아래 자유롭게 배치했다. 그리드도 질서도 없었다. 그리고 함께 받은 이미지는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게 주인의 이름을 지우고, 비트맵으로 원본을 가렸다. 모든 것은 독자의 생각이 들어갈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책은 크게 간단한 프로젝트의 개요와 12명의 답변, 작업 후기로 구성되어 연말이 되기 전 답변을 해준 11명의 친구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나를 포함해서 12명이었으므로 11명의 추가적인 답변만 받은 셈이다) 그들이 새해가 오기 전에 서로의 일상에서 다양한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처음으로 창작자의 가이드를 없애고 독자의 방식대로 길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나에게 의미가 깊다. 작업이 끝난 지 약 두 달 여가 지났고, 그 사이에 만난 친구들의 후기를 통해 작업의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그들 덕에 가능했다. 책을 만드는데 함께 힘써준 이들에게 지금까지도 너무 고맙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새해를 보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각자의 일상을 멋지게 디자인하고 있을 그들이 새롭게 쌓아나갈 것이 여전히 궁금하고, 또 그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질 무수한 여백들을 알고 싶어 진다. 작년 나의 작업이 그랬듯 다른 무언가가 기회가 되어 우리가 또다시 서로를 공유하며 성찰할 시간이 또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간 우리 모두가 세상을 '좋은' 방식으로 디자인하는 '좋은' 디자이너가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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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의 답변을 갈무리하며 우리라는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우리를 디자이너라는 단어로만 함축하기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질서도 없고 그리드도 없는 책이에요. 책을 읽으며 우연히 내 앞장에 혹은 내 옆에 서게 된 다른 이의 일상이 서로 얼굴 조차 모르는 우리를 이렇게도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음을 생각해준다면 이 작업은 크리스마스의 재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 같아요.  


제가 직접 만나서 전해드리는 분도, 그 맘을 담아서 우편으로나마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분도. 다음에 어디선가 오늘처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모두."


-책에 수록한 제작후기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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