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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경 Oct 23. 2018

만약 내가 사랑하게 된 것이 신이 아니면 어떡하죠

퀴어 그리고 퀴어영화





   넌  신이구나!   



 ‘신’이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죽기전, <셰이프오브워터>의 존재에게 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존재를 사랑했던 여자는 죽다가 살아났고 또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는게 셰이프오브워터의 이야기. 사랑의 모양은 다양하고 또 그래서 수많은 사랑의 모습을 다루다가 나온 것이 올해 초의 영화 <셰이프오브워터>다. 투머치인포메이션은, 언제나 업데이트가 한발짝 늦은 필자는 이제야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퀴어 영화들


 사랑의 모양이 다양한 만큼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도 다양한게 당연한데, 세상에는 사랑의 모습이나 대상에 대한 어떠한 기준이 있다. 아주 냉정하게도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 것들은 아류로, 또 QUEER로 분류되어버린다. (우리말로 ‘이상한’이라는 뜻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찍어 놓은 게 ‘영상’이다보니 영화 혹은 드라마 등엔 곧잘,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곤 한다. 유명한 퀴어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해피투게더> 그리고 올해 초의 <콜미바이유어네임>이 그 예시다. 또 '셰이프오브워터'도 사랑하게 된 대상의, 보편적이지 않은 외관 덕분에 주인공들이 고생을 하게 되니 QUEER(이상한)으로 분류되는 사랑의 셰입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퀴어로 분류되는 것들을 보며 한 인간이 느껴온 것들>



 퀴어 영화를 볼때마다 느껴왔던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뭔지 모를 동질감인데 <해피투게더>였나 <콜미바이유어네임>이었나 혹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였나, 그 수많은 퀴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영화들을 볼때마다 마음이 몽글거렸다.



외계인이라도 괜찮지만, 결국엔 여자였던 은찬


 퀴어 영화는 언제나 어떠한 장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바로 ‘고민’이다. 특히 한국의 드라마에서 많이 보았을 법한 클리셰인데 ‘넌 남자잖아. 그런데 왜 네가 좋지?’하는 식이다. 또 보통 한국의 드라마에선 상대방이 ‘사실 난 여자야’하는 식으로 끝맺곤 한다. 각설하고, 필자는 이제 이런 장면에 대해서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젠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이 글에선 필자가 이런 ‘불평’의 감정에 이르게 된 생각과 그 경로를 역추적한다.






<감정을 고민해야 할 설움>


He's hot, but...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의 로스 겔러의 아내는 레즈비언이었다. 그녀가 로스에게 사랑을 느꼈다면 아마 ‘바이섹슈얼’로 불려야 마땅했을테지만 그 말이 당시에는 유행하지 않았던건지, 로스에게 캐롤이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이 명확한건지 시트콤의 내내 그렇게 불렸다. 프렌즈들은 로스를 레즈비언과 결혼했다고 놀렸다. 그들을 마음깊이 애정하긴 하지만 그건 잘못됐다.


 QUEER들은 격리조치를 받는다. 사회적으로, 수많은 개별적 관계에서도. ‘너 레즈야?, ‘너 게이야?’하는 식이다.. 미국이야 혐오범죄라는 카테고리에 묶일까 쉬쉬하는 분위기라곤 해도, 걘 게이같아하는 형용사가 상용되는 시대다. 시대였고 시대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마 ‘시대일 것이다.’


 그런 시대가 자꾸 영화들에 특정한 고민들과 장면을 집어넣는다. 넌 이쪽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알려질까봐 겁이 났어. 넌 X 성별이잖아. 이 장면들을 포함시키지 않는 퀴어영화는 현실감이 떨어진다, idealistic한 영화다 소리를 들을테지만 그런 소리를 해야하는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결국엔 사랑인 것을>


아휘와 보영



 <해피투게더>의 아휘와 보영을 보며 필자의 관계가 아닌가 고민한다. 평균을 내어 일상속에서 이론을 뽑아내길 좋아하는 필자는, 오랫동안 연인 관계에 대한 지론을 세워 왔는데 그 중 하나가 모든 관계엔 피수용자와 수용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보영과 아휘의 관계도 그랬다. 잡힐듯 말듯 도망가는 보영의 모습과 묵묵히 있다가 떠나버리는 아휘도, 필자의 지론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따. 아델과 엠마도, 티모시와 올리버도 그렇다. 다들 똑같은데 ‘넌 여자잖아’ ‘넌 남자잖아’해야한다. 결국엔 사랑인 것을.


 모든게 사랑인 것을, 자꾸 누구의 사랑만 QUEER로 분류되고 정상에서 거세되는 세상이다. 아마 앞으로도 많은 영화를 보게 될텐데, 왓챠플레이는 또 다시 그들의 사랑을 퀴어 영화로 분류하겠지. 그럼 ‘이상한’으로 분류된 그들을 지탄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어떡하지. 셰이프오브워터의 장군처럼, 남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 또 그가 폭력적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티모시와 올리버


 셰이프오브워터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다시피, 신이었다. 그는 총을 맞아도 상처를 손으로 닦아내면 되었고, 누군가의 지탄의 총알에 죽어버린 애인은 살려내면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과 성소수자의 애인은 신이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비상한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 속의 인물처럼 누군가를 살려낼 정도의 능력은 아니더라도 쏟아지는 비난, 그리고 눈치를 견뎌내고 무시하고, 누군가와 사랑을 위해 엄청난 용기를 내야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 같다. 이런 사실은 아주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감성을 따르는데 다른 누군가의 이성을 만족시켜야 하는게 필수인 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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