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일어날 지도 몰라, 기적> _ 고레에다 히로카즈
요즘의, 우리는 ‘쓸모’에 참 관심이 많다. 이 ‘쓸모’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가장 강력한 가치판단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쓸모없는 사람, 우리는 그런 평가가 도저히 받고 싶지가 않다. ‘멋없다’, ‘재미없다’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쓸모없다’라는 말은 왠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쓸모’에 대한 강박이, 그리 멀리에서부터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주변에는 언제나, ‘쓸모’에 관한 강요가 존재해왔다. 강요에 의한 강박,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 안돼!’, 뭐 그런 것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라는 자그마한 꼬마들이 나와 기적을 위해 여행을 떠나고, 무언가를 바라는, 한 영화에서 스쳐가듯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도 때론 필요하지
이 말이 멋지게 들린 것은 비단, 그 대사를 뱉은 사람의 외면이 예술가스럽고, 멋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말 그대로 ‘쓸모없다’고 여겨진 ‘쓸모없는 것’들의 편을 들고,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어버린 문장이기에 그러하다. 물론 오다기리 조가 잘생긴 것도 맞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배역이 던진, ‘쓸모없는 것’들에 관한 새로운 담론에 기대어, 이 글에서는 ‘쓸모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먼저 일러두자면,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에 관한 글’이 될 것 같다.
1-1. 아이들의 말
아이들의 말은, 분명 어른들의 그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곤 한다. 유독 그들의 말에는 ‘아무말’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또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똥 혹은 방구와 같은 단어들의 반복이 그러하다.
이 영화 속의 아이들의 말도 그랬다. 흘러가듯, 생각난 대로 뱉어지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말들이 더, 이 영화를 보며 웃음 짓게 만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때론 그리 중요하게 들리지 아이들의 말들은, 종종 무시가 되곤 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말을 일단,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해두어도 좋을 것 같다.
1-2. 음악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가장 쓸모없게 여겨졌던 것은 음악이었다. 돈을 만들지 못하는, 그래서 아내에게 쓸모없다고 구박받던 형제의 아버지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렇다.
멋들어진 기술, 새롭고 유능한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과학보다도, 소설이니 그림이니 하는 것들은 무시 받고 예쁨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딴따라와 같은 많은 예술가에 관한 무시의 말이나, ‘예술의 길’을 가는 누군가에게 주어졌던 우려나 경시의 말들이 그 근거다.
1-3. 잔잔한 것
왠지 잔잔한 것은 쓸모가 없게 느껴진다. 휴식과, 혹은 잔잔함과, 유려하게 흘러가는 그러한 것들은 왠지 의미가 없어보이고 또 그래서 필요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일본의 영화는 거진 잔잔하고 유려하게 흘러간다. 스펙타클한 영화들보다는, 꽤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영화가 많은 관객을 모으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일본 특유의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면, 이런 잔잔한 분위기는 꽤 재미가 있거나 볼만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잔잔한 영화나, 그런 것들은 '휴식'과도 같다. 또 이 휴식과 같은 비어있고 의미없는 시간들은, 꽤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꽉꽉 무언가가 들어차있지 않은, 그런 잔잔한 시간들은 '변화의 움직임'을 야기해왔다. 다른 영화로의 전환이라던가, 휴식시간의 삭제라던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쓸모 없는 것들은, 종종 결국 누군가에 의해 삭제가 되어버리곤 한다. 쓸모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말은, 음악은, 그리고 휴식시간은 무시당하고 없어지게 되버리곤 한다. 사실 이게 맞긴 하다. 무용한 것보단 유용한 것이 더 대우받고 무가치한 것은 없어지는게, 더 논리에 맞고 이치에 맞아 보인다.
하지만, 이 논리에 맞아보이는 말도, 결국엔 틀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철학과 맞는 것으로 여겨지던 생각들은, 고쳐지고 다시 쓰여지고 또 뒤집어졌다. '쓸모없는 것'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쓸모 없는 것은 쓸모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쓸모 없는 것은 없다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없음'이 때로는 쓸모 있기도 했다. 휴식시간은 때론 비어있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을 더 유용하게 만든다.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또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할 때엔, 그만큼의 휴식도 필요하다’더라.
또 쓸모 없는 것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곤 한다. 아이들의 말엔, 때론 철학이 있다. 그 아무 뜻 없어 보이는 말들은, 종종 우리 어른들의 심금을 울리고 깨달음을 주고 무언가를 묵직하게 던진다.
또 음악을 포함하여 ‘예술’은, 다른 무언가의 가치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기에 더 높고 훌륭한 것을 이뤄내곤 했다. 니체 또한, ‘진리’라는 것에는 ‘예술’만이 닿을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쓸모없는 것들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결국, ‘쓸모’라는 말은 정말 ‘쓸모가 없다’. ‘무용하다’라고 이름 붙인 것들도 이렇게나 ‘유용’한데 굳이, 둘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쓸모’와 ‘무용’이라는 말은 정말 없어져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사용하자면 “쓸모에 관한 가치판단과, 그 단어가 정말 쓸모가 없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보면 쓸모없는 ‘기적’이라는 믿음의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성장했다. 그가족보다는 ‘세계’를 선택하고, 또 죽음을 덤덤히, 그리고 멋있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터무니없고 어쩌면 무용할지도 모르는 ‘기적’이라는 단어가, 모두를 발전시키고 어딘가로 진전시킨 것이다.
영화 밖의 현실에서, 우리 모두는 종종 ‘무용함’을 느낀다. 보다 뛰어난 사람이 지천에 깔리고, 또 SNS라는 것으로 그 빼어남을 생방송으로 지켜볼 수 있는 이곳에서 이러한 경험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쓸모없는 것’도 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적이라는 단어나, 아이들의 말이나, 음악이나, 혹은 비어있는 시간들이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은 쓸모가 있다.
어쩌면 쓸모 없을지도 모르는 이 '글자'들에서도, 영화의 제목처럼 조그만 기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생각과 선입견에,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버렸으니 말이다. 또 이러한 새로움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 언제나 대단한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발견만큼이나. 그래서, 아마도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기적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 작은 기적이다.
또 그래서, 이 영화 밖의, '쓸모'가 무지하게도 중요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쓸모없음의 쓸모'와 '쓸모없다는 말의 쓸모 없음'을. 글의 끝에서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하며, 발견을 마친다. 작은 위트로 봐주시길.
우리에게
<진짜로 있을지 몰라, 엄청난 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