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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경 Oct 30. 2018

'케빈'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제목과는 달리 '케빈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다. 똑똑하고 못된 아들 '케빈'을 양육하면서 어머니가 느끼는 절망과 현실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케빈은 없어도 케빈의 어머니는 있다.



We need to talk about Kevin




 그래.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케빈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았다. 그렇다면 케빈은? 이번 연구에서는 케빈에 대하여 다루어 보려고 한다. 영화의 원제처럼.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We need to talk about Kevin)  그의 한마디 말을 중심으로 한다.


  


한 마디 '말'을 중심으로 하는 것에 관하여


 '말'은 발화자의 생각과 심리를 대변한다. 생각 없이 던진 말이라고 해도, 그것에는 어느정도의 의도와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영화에서의 '말'은 더더욱 중요성을 갖는다. 대사는, 그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직접적 단서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케빈의 심리상태에 대한 실마리를 '한 마디'에 응축해 놓았다.
  



 이번 기록은 '케빈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의 '한 마디 말'의 해석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았다. 또한 그의 처지와 심리에 대한 편견없는 해석을 위해, 그의 '싸이코패스'적 성격은 배제하여 분석하였다. 논문형식이라는 딱딱한 그릇을 빌려왔지만, 그 속은 어렵지 않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조금이라도 부담감을 덜었으면 좋겠다. 미리 고백하고 싶은 것은, 케빈이라는 인물이 필자보다도 훨씬 똑똑하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많이 부족해도 예쁘게 봐주시길 부탁드리는 바이다.




 한마디 '말'  





 구조에 대한 분석


 문장이 꽤 복잡하므로, 그 구조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3분류의 사람이 전제되어 나타난다. 먼저, TV 밖의 사람들이다. 케빈 주변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며, ‘다수’로 환원하여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TV 속의 사람들이다. 첫 번째 분류보다 적은 사람 즉, ‘소수’가 이에 속한다. 마지막은, ‘TV 속 사람들이 보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두 번째나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TV라는 매체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TV 속의 TV라면? 그 수는 더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결국 케빈은 다수와 소수가 지켜보는, 극소수의 ‘특수한 부류’라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




케빈의 이야기


� 페르소나


페르소나 :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함.



 '그의 말'에 언급된, TV 속 TV의 사람과 케빈은 페르소나를 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TV 속 사람들 또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TV 속에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TV에 나오는 모습은 꾸며진 것 ,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케빈 역시 페르소나를 쓰고 자신을 꾸미는 아이였다. TV 속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가 언제나 그리고 평생동안 연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케빈은 좋은 아들 좋은 아이를 연기했다. 그의 주변 사람 중에 어머니는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유일인 조차 케빈을 사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케빈에게 인생은 악순환이었다.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꾸며야 했으며, 유일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본 사람조차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은, 그가 언제나 피부로 느끼며 살아온 냉정한 현실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것은 누구에게나 뼈아프게 아픈 것이다.



  

� 이질적 존재



 TV 속 이야기가 왜 흥미로울까.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실과 다르기때문에 그렇다. 공간적으로나 내용으로나. 케빈도 우리와 같지 않다. TV와 그 점에서 공통적이다. 주변과 이질적이라는 것.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케빈 본인이었다. 케빈은 자신을 'TV 속 TV 속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우리네와 다르고 또 다르다는 것이다.



 '다름'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성질은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냐에 따라 문제점이 될 지 아닐 지가 결정된다. 케빈의 다름은 주변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이 것을 논하기 이전에, 아마 그 '주변'의 범위를 엄마에게만 한정시켜야 할 것 같다. 케빈의 본모습을 아는 인물은 그녀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케빈의 '다름'은, '다름'을 넘어선 '틀림'이었다. 케빈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의사 혹은 남편에게 말하던 장면이 그 근거가 된다. 사랑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보다는 '사실 전달' 혹은 '그로 인한 자신의 고통 전달'의 목적에 의한 행동에 더 가까웠다.



 케빈의 세상은 '나와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융화될 것인가 본모습을 드러내고 외면받을 것인가를 언제나 고뇌해야하는 어렵고 외로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언제나 그는 '이질적 존재'였다. 말그대로,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게하는 세상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마치며


 케빈은 한마디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을 영화로 그려본들 좋은 내용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불우했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의 어머니를 비난하자거나 나빴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필자 또한 모성은 선천적 본능이 아님에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녀의 현실에서, 케빈은 너무나 벅찬 존재였음을 인정한다. 얼마나 힘들었을 지 감히 주제넘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범죄에 정당성을 부여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고,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았다. '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만 끌고온 캐릭터치고는 너무나도 아프고 아픈 손가락이다. 스크린 너머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으로써, 그가 겪어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케빈의 현실과 처지는 너무나도 어린 아이에게 잔인한 것들 뿐이었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말이다. 또, 그에 대해 말해야만 했다. 영화제목처럼,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제야 좀 후련하다. 영화가 끝난 후부터 계속 필자롤 괴롭혀온 케빈을 영화에 묻어놓고 다른 것을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길고 우울한 사고과정을 거쳤다. 이젠 노트북을 덮으며, 지구 어디엔가 존재하는 케빈과 비슷한 누군가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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