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민경 May 24. 2018

<이터널 선샤인>, 이별은 왜 고통스러운가

나라는 여과지를 빠져나간 작품들 02


자꾸만 궁금해지는, '왜 이별은 고통스러운가'에 관하여.


사실 영화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사람이고, 궁상맞게도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 본인의 사랑이야기를 떠올린다. 사람이라면 다 그런것이 아닌가. 무언가 공공연하게 ‘괜찮다’고 인정받은 영화를 보고 싶어 택한 것은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션샤인’이었고, 수많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이터널 선샤인의 소재는 흥미롭게도 ‘이별 그 후의 치료법’에 관련한다.


 먼저 영화 속 내용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의 것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별에는 수많은 종류의 치료법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더 슬픈 것을 보고 감정에 깊이 빠져버리며, 또 누군가는 행복하고 긍정적인 것을보며 아픔을 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그 어떤 치료법보다도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기억 지우기’


 기억을 지우다니, 이게 무슨 해괴한 방법인가. 그들도,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힘을 들이는지 보아왔을 것이 아닌가. 그들의 선택은, 영화가 꽤 흘러간 지점부터 조엘이 깨달은 것처럼, 현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바보같은 선택을 저지르며 이별은 그만큼 힘든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별은 왜 이렇게나 아플까? 왜 바보같이, 주인공들이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만들만큼, 헤어짐은 ‘아픈 일’일까? 그것도 인생을 살면서 겪는 여러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인데. 왜 그 일은 이렇게나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고, 누군가의 눈물을 쏙 빼버리고, 또 어떤이는 ‘이제 다시 사랑안해’라는 절규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게 할까? 이 글은 그에 관한 고찰이다.


 아마 우리는 남은 시간동안 이별을 몇번이고 더 겪어야 할 테니까. 우린, 아프게 되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만 한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럽기 위해. 이유를 아는 아픔은 그렇지 않은 아픔보다 조금은 덜 아프지 않나.



    하강하기에


이별과 가장 관련이 깊은 감정은 '사랑'이며, 이는 꽤 비현실적인 감정이다. 디즈니에서, 진정한 사랑의 키스가 죽은 사람을 살리고, 인어가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바치는 설정은 비단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랑에는 그만큼 '비현실'적인 성질이 있다.


헤어짐은 비현실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현실로 하강시키는 일이다. 볼빨간 사춘기라는 가수들의 노래처럼 ' 별빛을 쏟아내리고 은하수를 만들어 어디든 날아가게' 할 정도의 상승의 감정에 있던 누군가를, 차갑고 담백한 현실의 세계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마음을 다치고, 온도에 놀라고, 또 그 차이에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이별의 속성은 '하강'이다. 소위 표현하듯 '구름 위에 있는 듯'한 기분에 살던 사람들을, 차가운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오도록 한다. 사랑을 통해 상승한만큼, 사람들은 딱 그만큼의 고통을 느낀다. 따뜻한 저 높은 곳의 세상에서 차갑고 축축한 현실의 세계로의 회귀는 아프다.





    소중한 것을 잃는 일이기에


이별 이전의 상태는 '연애'의 상태이다. 그리워할 '연', 사랑할 '애', 즉,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곧,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상태'라는 말과도 통용한다.


 하지만 이별이란 무엇인가. '서로 갈리어 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잃는 일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잃는 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슬픔을 야기하는 일이 아니던가. 우리는 펜 하나를 잃어도 꽤 작은 슬픔과 우울을 느껴왔다. 있던 것이 없어지고, 함께 하던 것이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부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 잃는 것이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별은, '잃는 일'이기에, 심지어 그 대상이 '소중한 것'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강제적이기에


이별이 하는 일은,  <이터널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워주던 회사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다. 연인 관계 속에서 나누어 오던 추억과 감정들을 모두 지우고 없애어 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내 말 들려요? 기억 지우기 싫다고요!"라고 목을 놓아 외치는 조엘의 절규에도, '이별'은 냉담하다. 우리의 머리 속을 샅샅이 뒤지고 찾아내, 모든 것을 그리고 기억을 없애도록 그리고 지워내도록 한다. 추억과 감정, 그리고 행복했던 모든 순간을 잊어버리도록 강제한다.


영화 속의 그 회사는 주인공이 자고 있는 그 사이에 손수 기억을 지워주지만, 현실적인 이별은 우리도록 그 기억을 지워버리도록 '강제'하기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별한 후에 기억을 다 지워버리는 버튼이 있다면 좋을텐데, 현실은 참 냉담하다.


 인간은 자유를 지행해왔다. 강제란 언제나 우리에게 벗어나야할 무언가였다. 하지만 '이별'은 다르지 않은가. 그 원인이나 결과나 모두 우리가 '잊어버려야만 함'을 알려주고 그 상황을 강제한다. 헤어진 이상 우리는 그 과거의 사람의 기억을 더이상 갖고 살 수가 없다. 나를 위해, 그리고 그 사람과 상황들을 위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별은 고통스럽다.


  

지금까지 이별이 아픈 이유에 대해 적어보았다. 이별은 하강이기에, 잃는 일이기에, 또 강제적이기에 아팠다. 이별이 왜 아픈 것인지 궁금해서 적어보긴 했지만, 이별이 왜 아픈 일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음의 이별이 아프지 않을 것 같지는 않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누린 만큼 우리는 그만큼 아플 것이고, 상승한만큼 곤두박질 칠 것이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에서 클레멘타인은 사랑을 다시 시작하자는 조엘에게 '난 완벽하지 않아. 당신은 곧 날 거슬려할테고 난 당신을 지루해 할거야'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조엘의 대답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Okay'였다. 괜찮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마음껏 아프고 말겠다. 이별의 아픔을 보여주던 영화의 마지막이 '괜찮아'였던 것 만큼. 이별은 그만큼 아파도 괜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그 전의 애정과 관계와 추억들은 괜찮은 것이기 때문에, 그 괜찮은 것들을 이별의 '아픔'이 두려워 포기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좋은 사랑은 그 애정들은, 마땅히 그 아픔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처럼 잘 어울려 보이는 사람을, 필자는 만날 수 있을까.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필자는 지금 조엘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바라고 있는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그만 글을 줄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봄날은 간다>, 보내주어야만 하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