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ish Gambino의 'This Is America'를 보고
차일디쉬 감비노라는 가수의 인기가 뜨겁다. 그의 노래는, 그의 뮤비는, 또 그의 목소리가 유튜브로 티비로 아니 어느 미디어로든 뜨겁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필자 또한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다.
그 뜨거운 열광의 눈길을 받는 노래의 제목처럼, 그는 노래 속에서 미국의 지금 모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것이 미국이다'. 다양하고 많은 해설을 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필자가 그것을 조금 간추려 말하면, '흑인의 인권에 대한' 그리고 '흑인의 엔터테인먼트엔 열광하며 그들의 인권에는 신경쓰지 않는 문화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꽤 어둡고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가 이만큼이나 사랑을 받고 또 관심을 받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뜻을 담고 있는 그릇이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엔터테인먼트가 사회의 문제를 가려버린 현실'을 풍자하는 목소리가 '사회의 문제를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표현해 냈다.
무튼, 그의 노래가 말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흑인의 문화를 사랑해 온 것 같다. 가깝게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뜨거운 인기를 자랑했던 '쇼미더머니'나 '고등래퍼'의 프로그램이 보여주던 것은 모두 '힙합'이었다.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다른 예시도 있다. 댑댄스, 슛댄스, 혹은 더기. 그 춤과 문화의 근간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우리는 정말 감비노의 말대로, 그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사랑해왔다. 그들의 엔터테인먼트는 모두의 문화에, 수많은 유행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지구는 그들의 문화를 사랑할까. 힙합부터 블루스, 재즈 그리고 알엔비의 장르에 이르기까지, 왜 그 많은 모든 것들은 유행을 하고, 사랑을 받으며 대중적인 무언가가 되어있는가. 지양해야할 단어인, '흑형'과 '흑누나'라는 말에 조차 그 근간에는 그들을 향한 동경의 뉘앙스가 들어있지 않은가. 표현 방식이 잘못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차일디시 감비노의 노래와 그 목소리와, 춤과 몸짓에 빠져버려 몇 일 째 그의 작품에 시선을 떼지 못한 사람의 궁금증을 이곳에 들고 왔다. 왜, 그들의 문화는 많은 애정을 받고 유행이 될 만큼 우리에게 매력적인가.
다름에 대한 동경
이 문화가 세계적으로 애정을 받고 있는 데에는, '다름에 대한 동경'이 있다. 다른 것은 매력이 있다. 나와 완전히 같은 사람은 재미가 없다는 어이없지만 이해는 되는 연애의 진리와 같은 것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필자가 몇년 전 영어로 읽은 글귀에는 '인종에 대한 차별과 선입견이 없었다면 혼혈의 사람은 더 많이 존재했을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모의고사 EBS 지문이었다.
이 문장의 말대로 다르다는 건, 근본이 다르다는 건,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 조금씩 다르다는 건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 악기와 움직임이 일어나는 근육이 다르다는 것은 신기한 것이다. 그들의 문화에 대한 동경은 근본적인 다름에 대한 선망에 근거하는 것이다. 같은 모양새지만, 그 성질이 조금씩 다르다는 건 보기만해도 신비롭고 매력적인 것이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
또한, 흑인 문화에 대한 애정에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의 감정이 기저하고 있는 것같다. 박진영이라는 우리나라의 유명 엔터테이너이자 프로듀서는 한 가수에 대해 '우리나라 유일의 흑인의 소울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칭찬의 말을 곰곰히 되짚어 보면, 우리 나라에는 흑읜의 몸짓과 무언가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뿐이라는 소리이다. 분명 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전문가의 소견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즉, 그들의 문화가 꽤 구사하거나 내재화하기에 어려운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던 단어대로, 그들의 무언가에는 ' soul'이라는 것이 담겨있다. 영혼이라는 말로도 번역되는 이 것은, 그들이 구사하고 만들어 온 문화 자체에 깊숙히 박혀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또 그들만의 문화의 정수인 이 '영혼'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그 향유의 개방성과는 반대로 구사에 있어서는 폐쇄성을 갖는다. 그 영혼이라는 것은 참 갖기가 어렵게, 켜켜히 쌓이고 쌓인 그리고 그 대대로 전해진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 불가능성에 의해 우리는 그들의 문화에 더욱 매력을 느껴왔다.
자연스러움과 자유에 대한 지향
옛날부터, 우리는 자연에 대한 지향이 있었다. 언제나 자연스러운 것은 선의 범위에 속했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좋은 것이었고, 도시의 생활보다는 자연에서의 생활이 건전한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 비슷한 자유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일제강점기 시기에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애썼고, 자유가 없던 사람들은, 식민지 국가들은 언제나 자유를 지향하고 싸우고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과 자유로운 것을 지향한다.
흑인의 무언가가 지금껏 지향해온 것들은 무엇이었는가. '짜여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재즈에서, 또 힙합에서, 그들은 소위 '프리스타일'이라고 불리우는 자유형식을 지향하며 자유로워 왔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을 사랑하는 인간들의 입맛과 지향점에 딱 맞는 형식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글의 시작에 있었던 차일디시 감비노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지던 '그루브'로 불리는 것들이나 그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바이브'의 움직임들이나 모두, 언제나 자유를 찾아 항해하는 우리네 성향을 저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창작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창작물들과 문화들은 참 매력적이다. 그것들은, 그들과 같고도 조금은 다른 우리들에게 불가능해보이기도 하고, 달라보이기도 하며,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어서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바코드'를 들으며, 같은 장르의 노래들을 만들어내며 그들이 남기고 만들어내고 창조해낸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10대들이 힙합에 열광하는 건,
힙합이 자유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인 것 같아요."
- 김하온
비단 10대만인가, 필자의 나이대도, 또 앞에 더 큰 숫자를 달고 있는 사람도 그렇다.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우스운 일이다. 향유자들은,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창작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창작자의 창작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수용해오면서도 말이다.
흑인 문화의 시작은, 핍박과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이자 위안이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힙합을 포함한 많은 흑인 문화의 장르들은 그 정신을 이어가며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다. 그렇게도 창작자의 상황을 떼어놓고 보는 것이 어려운 창작물은, 수용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현실적 부조리의 이야기가 배제되어 넘어 들어갔다. 차일디쉬 감비노의 비판대로, 자유를 향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들이 '어느 곳'에서 자유를 찾는지를 묻지 않았다.
" I'm so cold like, yeah. I'm so dope like yeah. We gon' blow like yeah."
(난 이렇게 멋져, 난 이렇게나 끝내줘. 우린 이렇게 난사할거야.)
엔터테인먼트에 시선을 뺏겨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회 문제에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켠 그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마 지금 감비노의 음악이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문화의 향유자들의 뒤늦은 반성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가 비꼰 것은 'America'의 흑인들의 현실이었지만, America를 벗어난 세상에서의 우리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일디쉬 감비노는 흑인 노예제 존속을 외친 군인들과 같은 바지를 입고, 짐 크로의 행동을 따라하고, 총을 쏘고, 슛댄스를 추며 '이게 America야'라고 했다. 그렇다면 'Korea'는 어떨까. 'This Is Korea'에선 누가 춤을 추고, 어떤 포즈를 취할지, 또 무슨 내용이 담길지 궁금해 졌다. 뭐가 한국일까. 또 다른 궁금증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
What is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