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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밤의 새벽별 Jun 15. 2021

어떤 시각기억상실증

그곳에 가면 반드시 잃거나 잊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간단한 안내사항이 전달된다.  

    

  - 이곳에서 지내다보면 점점 눈이 멀게된다. 시각에 대한 기억도 함께 상실된다. 그리고 왠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은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막연히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희박한 확률로 다시 눈을 뜨게 되면 ...      


희박한 확률이 주는 눈부신 보상은 늘 그렇듯 매력적인 법이다. 모험심 강한 용감한 영혼들이 기꺼이 발걸음을 내딛는다. 입장과 동시에 안내사항도 망각의 안개 속에 가려진다.    

     




거미와 장님  

        

후끈한 태양 볕을 등지고 어둠 속을 더듬어

마침에 봉우리에 다다른 장님이

나무 그늘에 뉘어 앉는다.

     

언젠가 신은 그를 어리석고 오만하다 하였다.

어리석기에 오만한 것인지

오만하기에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리석기에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잊은 것인지

오만하기에 장님이 된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다.  

   

무명(無明) 속에서

홀연히 작고 검은 무언가가 곰실거린다.     


눈부신 허공 한복판에서 조용히 곰실거리는

작고 검은 생명체의 비행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빛에 익숙해진 두 눈에

투명한 실이 반짝이다 사라진다.

반짝이다 사라진다.     


어느덧 투명한 실에 석양빛이 맺히고

작고 검은 생명체의 비행도 종착에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에 안착하는 순간,

    

어둠 속에 감겨있던 장님의 심장이 눈을 뜬다.

얼어붙은 심장이 녹아내리며

투명한 실들이 빛처럼 뿜어져 나온다.  

   

하늘로 땅으로

꽃과 나무, 바위와 절벽 아래로     


무수히 뻗어나간 투명한 실을 타고

크고 여린 생명체가 찬란한 비행을 시작한다.







생(生)의 경이를 볼 수있는 눈은 가슴 속에 있다.

그 눈은 보는 순간 느끼고, 느낄 수 있어야 보인다.

    

이 곳에서의 삶이 한 해 한 해 쌓이다보면 삶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것들도 쌓여간다.

이런 편견, 저런 고정관념, 강요된 가치관, 아집과 정신없는 분주함...

그리고 여린 가슴은 험난한 세상을 겪다 보면 이리저리 감정의 상처를 입고서 너덜너덜해지거나 딱딱하게 굳어지기 십상이다.

     

노력과 기적 사이 어느 틈엔가, 오랫동안 감겨있던 눈이 띄였다.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른다. 어릴 적 숨쉬듯 자연스럽게 느끼던 것과 같지만 무언가 더 깊고 소중하다.   

   

거미와 거미 안팎에 있는 투명한 신비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 거미를 자연스럽게 거미만의 방식으로 살게 하는 신비로운 무언가가 나에게도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육체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무음이 아님에도 고요한 자연 속에서 가만히 느껴본다. 내 안에 흐르는 생의 신비를.

그 흐름에 나를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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