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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밤의 새벽별 Sep 05. 2021

작가의 삶과 그의 작품이 모순될 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부모님을 여읜 어린아이가 체로키(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중 하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산에서 살아가면서 자연과 교감하고 체로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나가는 일상을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1976년에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판매 부진으로 얼마 안 가 절판되었지만, 작가 사후 다시 주목받아 1991년에는 ABBY(전미서점상연합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책)상을 수상하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 2위에 오르기도 하며 전 세계 각국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영어 원제는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지만 한국어판의 제목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숲의 모든 생명들과 형제자매가 되어 필요한 것 이상을 취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나날,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무이든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 조용한 배려와 감사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랑, 물질주의적이고 편협한 면이 있는 백인의 삶의 방식과 대비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화롭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과 영혼의 풍요로움, 때로는 한가롭고 때로는 사건 사고가 가득한 이야기들이 울고 웃게 만들며 주는 감동... 읽다 보면 정말 영혼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 책을 참 좋아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글을 쓰려고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야기를 쓴 저자가, 미국 백인 사회의 잔혹함과 위선을 체로키의 삶과 대비시켜 소설에 그려낸 저자가, 실은 백인우월주의자였으며 인종차별로 유명한 테러단체 KKK단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책 속 저자의 할아버지가 어떤 때는 참 지혜롭다가도 어떤 때는 유치하고 좀 과한 감정을 드러내던 모습, 군데군데 투박한 묘사들, 건장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2-3년 만에 별다른 일도 없이 갑자기 쇠약한 모습으로 그려지다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던 부분이 의문스럽고 아쉬웠었는데, 사실을 알고보니 어쩌면 그건 이 작가의 실체, 그리고 이 책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2020년 8월 2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방송 영상

 

 1992년 기자 다나 루빈이 밝 바에 따르면, 작가의 이름 포리스트는 가명이고 본명은 아사 카터(Asa Earl Carter)로, 체로키 혈통아니고, 그가 조부모와 살았다던 테네시주 산속 마을에는 체로키족이 거주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그는 앨라배마주를 떠난 적도 없다고 한다. 1956년에 아사 카터는 테네시 주의 클린턴에서 12명의 흑인 학생이 백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반대하여 분리정책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그가 조직한 그룹과 영향을 받은 폭도들이 흑인들을 공격하고 잔인하게 살인하는 등 폭동을 벌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KKK단의 한 집단을 이끄는 리더로 활동했으며, 악명높은 인종차별주의 정치인 조지 월리스와 함께 일하며 주지사에 출마한 그의 연설문을 도맡아 쓰기도 했다. 40대 중반 무렵 앨라배마주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후 텍사스에 정착하여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심지어 자식들을 조카 취급하기도 하며 포리스트 카터(Forrest Carter)로 개명했다. 책이 출간되었던 1976년 뉴욕타임즈에서도 의혹을 보도한 바 있었지만, 본인은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소설 출간 당시 포리스트 카터와 아사 카터의 주소가 동일하고, 생년월일도 일치하며, ‘포리스트’라는 개명 이름은 그가 광적으로 흠모하던 KKK단의 창립멤버 ‘네이선 포리스트(Nathan Forrest)’와 이름이 같다. 결국 그의 부인이 포리스트 카터가 아사 카터가 맞다고 인정했다.   



  한국어 개정판이 2014년에 나왔으나 작가 소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체로키 할아버지가 있었고 작가를 ‘작은 나무’(책의 주인공 이름과 같음)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실화 바탕’이라는 명확한 표현만 빠진 채 실제 삶에 바탕을 둔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아사 카터로 밝혀진 이후 논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어떤 면에서 독자에 대한 기만일 수 있고, 실화 바탕이 아닌데도 마치 실제 체험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착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에 관하여 사실과 다른 이미지와 관념을 갖게 하기도 한다. 미 도서관 협회 의장은 이 책에 관해 "미국 원주민들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고정관념만을 사용했을 뿐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가 들썩였던 일이 충분히 경과된 후인 2014년에 한국어 개정판을 냈다면, 작가에 대한 소개를 사실에 맞게 적고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한 게 아닐까. 판매와 마케팅적인 이유로 그럴 수 없다면 개정판은 내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삶이 그의 작품과 모순될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밖으로 표출되지 않더라도 다양한 모습과 상충되는 마음들을 자신 안에 담고 있기 마련이다. 독립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를 잔혹하게 고문하던 경관이 딸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밖에서는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 집에서는 가정폭력을 일삼기도 하며, 현실에서는 추하기 그지없는 일들을 저지르는 예술가가 작품만은 아름답게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며, 인생은 그런 아이러니를 품으며 우리에게 복잡한 감정과 질문들을 던진다.


 나도 글이라는 것으로 작품을 빚어내려는 길을 가려는 이 시점에,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저자 관련 논란은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만든다. 현실이 어떠한가와는 별개로, 나의 철학과 지향은 작가의 삶과 작품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작품이 작가의 일부이듯, 작가의 삶도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긴다. 인간이기에 어느정도 모순과 결함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타인과 사회에 도를 넘는 해를 끼치거나, 작품에 담긴 가치와 지나치게 상충되는 삶을 살았다면, 나는 그 작품을 재고할 수밖에 없고 내 안에서 그것은 빛이 바래버린다. 안타깝고 씁쓸하게도, 나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책을 더 이상 전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 만약 저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자신이 차별했던 약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면 달랐겠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비겁했다.  

   


저명한 작가인 Sherman Alexie는 이렇게 말했다.

 "분명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 책이 한 백인우월주의자의 죄책감이 담긴 로맨틱한 속죄는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백인우월주의자의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을 치유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극찬과 함께 오랜 팬이었다고 밝히며 TV쇼에서 이 책을 소개했던 오프라 윈프리는 카터의 진실을 알게 된 후,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자신의 추천 책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이 책을 읽어도 더 이상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고, 한 사람이 양면성을 지닐 수는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며, 책장에서 이 책을 치워버려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영하 작가는 방송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소설가를 대체하기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가가 죽음, 사랑, 시련의 고통을 썼을 때 독자들은 그 글을 쓴 소설가가 자신들처럼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자신들처럼 그런 것들을 겪으며 사는 인간이기에 공감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방대한 학습을 통해 잘 만든 소설을 써낼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AI가 쓴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차게 식는다. 인공지능은 죽지 않고, 사랑하는 이가 죽는 고통과 그 상실감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감정을 흉내냈을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렇게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의 삶과 그 작품의 모순이 지나치게 클 때, 나의 마음은 차게 식어버리고 만다. 나의 경우 그림이나 음악보다는 소설일 때가 더 파장이 크다. 감정 이입도 더 많이 하고, 글을 읽고 상상하며 일부 공동 창작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술은 틀에 박힌 사고를 벗어난 보다 자유로운 영역, 깊고 섬세한 감정의 영역과 연결되며 일어나는 창조이다. 그러다보니 진부함을 벗어나거나 억압적 관념을 깬다는 핑계로 과도하게 타자에 대한 배려나 공동체의 선을 해치기도 한다. 예술하는 사람은 자유롭고 유연해야 한다며, 영감과 뮤즈를 위해서라며, 자신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풀어헤치기도 한다. 창작의 힘이 되어주기도 하는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거친 야생마들에 휘둘려 작가 자신의 삶이 균형을 잃고 피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거장이라고 불릴만한 예술가들 중에 그의 작품만큼이나 좋은 삶을 산 사람도 많다. 시대와 운명의 풍파로 고통과 결핍을 겪었을지라도,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허락되는 부분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 예술가들의 작품이 나는 더 가치있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는 다짐하게 된다. 혹여 남은 인생 여정이 험난하여 삶이 힘겹고 푸석거리게 되더라도, 최소한 위선과 모순이 극심한 부끄러운 창작자가 되지는 말자고. 조금 더 바랄 수 있다면, 나의 삶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며 예술일 수 있도록 하루하루 창조해 나가고 싶다. 이런저런 결함과 굴곡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내고 싶다. 내가 만든 작품들이 그러한 삶의 반영이자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나의 글이 누군가의 영혼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깊고 진실한 삶을 살고싶다.   

   

 오늘 나는 인생 단면의 축소판 같은 일을 겪었다. 좋아하던 소설의 감상을 쓰려던 계획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어 전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고, 나의 내면세계의 일부가 배신과 상실을 겪게 되었다. 소중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 휑한 자리에, 한소끔 더 깊어진 인간에 대한 이해 한 스푼, 삶과 창작에 대한 다짐 한 스푼을 넣고 토닥여본다. 그리고 그동안 미뤄왔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시작해 보기로 한다. 소설도 더 많이 읽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또 가슴에 품고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작품을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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