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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Apr 07. 2024

영혼이 풍선이라면

밤 아홉 시 사십육 분이 되었을 때 그것이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늦지 않은 시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종일 많이 걸었는데 걷고 보니 나의 걸음 수는 만 천 보였다. 어제의 걸음 수는 천 보였다. 어제보다 만 보를 더 걸었다. 어제는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 평소에 머리가 자주 아픈 편은 아닌데.... 갑자기 많이 아팠다. 병원에 가 봤자 딱히 뭐가 있겠어?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병원까지 갈 수 있으려면 지금보다는 덜 아파야 했다. 너무 아파서 일어설 수가 없었으니까... 누워있다가 통증이 조금 줄어들었을 때 병원에 갔다. 하지만 계속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 같아서 헛구역질을 했다.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는 가다가 몇 번 주저앉아 쉬었다. 병원이 집에서 가깝다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애매하게 아플 때, 구급차를 타기에는 무척 민망할 정도로 아플 때, 병원까지 스스로 걸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아프고 힘들 때는 걸을 수 없으므로 길에서 그냥 주저앉아 한동안 쉰다. 그럴 때 누군가 쉽사리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는 무척 아파 보이는 행색을 하고 그냥 길에 앉아 있는다. 그래도 어제는 엄마가 옆에 있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아플 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자유롭게 쓰는 것... 자유롭게 헤엄치듯이 써본지가 조금 오래되었다고 느낀다.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면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안타까워할 것이다. 쓰는 건 그냥 너의 자유지. 잠을 잘 때 어떤 자세를 하고 자든 네 자유인 것처럼.... 물론 안 좋은 자세도 있겠지만..... 


귀여운 동물 영상을 찾아보았다. 어제는 내내 누워서 잠을 자거나 잠에서 깨어 핸드폰을 보거나 밥을 먹거나 그리고 누워 있었다. 해달.. 해달을 보다 보니까 푸바오가 나왔다. 얼마 전 푸바오가 중국으로 가던 날에 다들 길에서 멈추어 서서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ㅎ님이 와서 무슨 일 있냐고 무슨 큰일 난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어제 내내 누워서 본 것은 푸바오의 서사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이었고 푸바오가 다 지나간 다음에야 나는 약간의 궁금증이 들어 그 이야기를 훑어본다. 나의 감흥은 약간 늦다. 대체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얼마 뒤면 재개발로 사라질,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동네에 갔다. 동생과 함께.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 살던 주택가는 그대로, 옆집도 앞집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거기 살던 또래의 꼬마들... 꼬마들은 이제 다들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지. (아니, 살아있니? 살아있을까?) 아파트는 낡아 가고 오래된 고목나무들만 더욱 커져서 아파트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너희들도 다 갈리고 뽑히겠지. 그렇게 곧고 크게 자란 나무가... 아깝다. 아직 남아있는 그 광경들을 모두 눈에 담고 왔다. 이상하지...... 과거는 늘 그렇게 어딘가 쓸쓸하고 아프고 수치스러워서 남몰래 감추고 싶은 광경이다. 늘이라고 하는 건 좀 너무했나. 


경로당에 가면 유쾌한 할머니들이 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도 유쾌한 할머니들은 다 좋다 좋다고 한다. 나는 늙어도 절대 그렇게 유쾌한 할머니는 되지 못할 것 같은데... 애써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신경질이나 안 내면 다행이다. 유독 까칠한 할머니가 한 명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다. 그 할머니는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해 온 몇 년 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했다(보통 할머니들은 다들 똑같은 대본을 받은 사람들처럼 똑같은 말로 반응하기 때문에). 쳇, 젊어서 좋겠다... 

젊으면 좋은가... 좋긴 하지. 자고 일어나면 보통 멀쩡해지니까. 손을 베여도 자고 일어나면 리셋한 것처럼 나으니까... 정말 너무 좋다.... 


언니는 만약에 휴직하면 뭘 하고 싶어. 남의 욕망 남의 의욕이라도 베껴 오고 싶다는 동생의 질문에 생각을 해 봤지만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왜냐면 당장 휴직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휴직하면 뭐 하지.... 일단 오전 시간에 요가를 다니는 건 좋을 것 같다. 밤이 아닌 시간에 , 해가 떠 있을 때, 햇살을 받으면서 요가를 하는 건 정말 산뜻하고 행복할 것 같다. 그렇다고 주말에... 하는 건 싫고 꼭 평일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산뜻하다. 

그리고 자격증 따기... 그런 건 성취감을 주니까. 그리고 뭐 하던 거 계속하지 않겠어... 글쓰기... 공모전 내기... 그것 말곤 딱히 뭐가 없었다. 

좋아하는 걸 더 많이 만들면 좋겠다고 말로만 그러지만 나는 뭔가를 좋아하기에는 늘 귀찮다. 좋아하려면 자세히 알아야 하는데 자세히 아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자세히 몰라도 뭔가를 좋아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좀 운이 따라 주어야 하고. 


내일은 오랜만에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  출장이 없어서 시간이 안 갈 것 같다. 그럴 때 사무실에서 낙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커피란 무엇인가.... 




늘 그렇지.... 나는 내 영혼을 직장에 두지는 않을 것이다.  힘들면 도망가. 도망가도 정말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 내 영혼은 한결 가벼워져서 더 멀리멀리로 둥실 떠나간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영혼을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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