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우울하고 예민하며 불만 많고 감흥 없고 재미도 없는 나는, 삶의 어느 장면에서는 놀랍도록 그런 모든 나에 대한 평가와 세상에 대한 두려운 시선을 거둘 수도 있다는 데 놀란다. 그건 몰입이고, 몰입의 순간에 내가 집중하는 것은 입동굴.
처음 만난 날의 반짝이는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여러 번 그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다리를 꼭 붙이고 얼굴은 환하게 웃고 손은 떨리는. 여전히 그 눈은 나를 보며 웃고, 흠뻑 쏟아지는 비를 맞는 식물처럼 나는 오래 여기에 머무른다.
어떤 날은 이상하고 낯선 세상 속에서 오직 너만이 가장 자연스럽고 투명한 공기가 되고
어떤 날은 날카롭게 또렷한 현실 속에서 오직 너만이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가 된다.
그럴 때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다 중요치 않다. 가볍게 떠오르고 마침내 잊힌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입동굴에만 집중하고 그것이 현재 내게 가장 충만한 것. 국어사전에는 입동굴이 없고,
어느 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한다. 꿈이 모두 끝난 아침이면 어리둥절하며 깨어나듯이. 내 꿈속의 사전에는 입동굴이 가장 먼저 적힌 단어이고, 다음날 눈을 뜬 나는 모든 것들이 다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너는 나의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고 사진첩에도 통화기록에도 문자 메시지에도 깨끗하게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사전에 입동굴이 없는 것처럼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다
어린 시절 기억하는 크리스마스의 꿈에는 달콤한 설탕으로 만든 핑크색 스푼, 손잡이 끝에는 별 모양이 달려 있는. 깨어난 뒤에는 그 스푼이 존재한 적 없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 공기처럼 익숙하든 꿈처럼 아득하든 현실의 너는 분명히 존재하는 입동굴을, 갖고 있다 심지어 나를 바라보고.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에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녹아 없어지지 않고 오래 살아 있는 설탕 스푼이 될 수 있을까. 깨어진 꿈이 아니라 현실일 수 있을까, 아주 오래, 내가 바뀌고 온갖 사건이 휘몰아친 뒤에도 여전히 입동굴인 채로. 입동굴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나 자신도 세상도 잊은 채로 보낼 수 있는 시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