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약 먹고 공부하기
남편의 눈을 맞추지 않고 피해다녔다. 남편이 제발 모르고 있기를 바라며. 알고 있다고 해서 기가 죽을 나는 아니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그런데 한시간 전, 크지도 않은 눈을 똑바로 뜨며 남편이 내게 다가왔다.
- 여보!
아. 올게 왔구나.
- 소아과에서 100불 고지서 온거 봤어? 도대체~
폭풍 잔소리가 쏟아질 시간.
아. 이럴까봐 오늘 소아과 가서 돈 빨리 내고 왔는데. 그 이메일이 남편에게도 갔구나. 잊어버리지 않고 체크도 잘 하지. 도대체 왜 저런것까지 다 체크를 하고 사는거야? 피곤하지도 않나.
100불. 약 13만원.
50불씩 두 번에 걸친 벌금이었다. 소아과에서 날아온.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소아과 예약을 해놓고 노티스 없이 안 간 탓에 24시간 이내 cancellation fee가 50불씩 붙은 것이다. 두 번이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이걸 읽은 언니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아 임수진 진짜 대단해. 너랑 살아주는 J가 대단한거야!)
그래. 지난주 예약 안 간건 기억이 난다. 화요일 오전 11시인가 딸내미 정기첵업 예약을 해놨는데 그걸 안 간 것이다. 분명히 열두번도 더 확인했고 전날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12시가 지나서야 정말 어이없이 갑자기 생각난 것이다. 이게 웬일이야 하면서. 그런데 고지서에는 두 번이나 안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6월에 한번 또 안갔다는데 그건 기억이 안난다. 내가 또 취소도 안하고 안간적이 있었던가?
어머나 세상에! 이럴 수가. 지금 캘린더를 체크해보니 6월 19에 '2:00시. 지나 소아과'라고 써 있다. 아. 내 기억속의 지우개. 아무튼간에 그리하여 나는 장장 100불. 13만원의 벌금을 소아과에 지불하고 온 것이다. 남편이 알기 전에 빨리 해결해 버려야지 했는데 그걸 알고 추궁해 온다.
남편의 깊은 한숨이 100미터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다.
- 여보, 요즘 약 안 먹지?
드디어 나왔다. 저 레파토리.
나도 먹고 싶었다. 약. 할 일이 많을 때에는 특히 먹고 싶었는데, 요즘 아이들 방학이라 왔다갔다 하다보니 정신이 없어서 못 먹었을 뿐이다.
사실 지난 주일까지는 일주일에 세번 정도 약을 꾸준히 몇 주간 복용했다. 그건남편이 먹으라고 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복용이었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한 이후 큰아이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 나도 도서관에 가서 몇 시간동안 책을 읽고 할 일을 하고 글을 썼다. 시험삼아 오랜만에 아침에 약을 복용하고 갔는데, 마치 책을 뚫고 들어갈 것 같은 집중력을 느낀 것이다!
나는 Miller library를 좋아한다. 집에서 가깝고 깨끗하고 2층에는 통창이 있는 꽤 근사한 책상과 소파가 잔뜩 있다. 단 하나. 그곳이 '영어책 도서관'이라는 결정적인 사실만이 아쉬울 뿐이다. 미국에서 도서관에 가면 나는 표지로 책을 읽는데 익숙하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럴지라도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 공부하는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통창의 햇살과 푸른 나무를 바라보며 공부하는 건 근사하다. 자. 약도 있겠다. 도서관에 갈 때 그래 한번 제대로 시도해 보자.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정신 바짝 차리고 눈뜨자마 ADHD약부터 챙겨 먹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집에서도, 또 일상에서도 약의 효과를 전에 느낀 적이 있지만 집중이 잘 되는 곳에 가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내 일에 열중하니 약의 효과가 백배쯤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아니다. '느껴졌다'는 건 적당치 않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사실 잘 몰랐다. 도서관에서 나온 후에야 아 그랬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 느낌은 그러니까, 공부만! 열심히 할 수 있게 해 준다기보다는 머릿속을 맑게 해서 무엇을 하든 굉장히 깨끗한 상태로 하게 해준달까. 그 시간에는 카톡을 해도 마치 박사논문쓰는 듯한 자세로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아. 그리고 나는 원래 약을 잘 안 먹어서 약발 엄청 잘 받는 체질이긴 하다. (이럴 때 이 말이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첫번째 느낀 점은 와. 대단하다. 몇 시간 동안 물 속에서 잠수하다가 나온 것 같아. 였다. 물속에서 깊은 압력 속에 있는 고요하고 빨려들어가는 느낌.
두번째 느낀 점. 아 이걸 고등학교 때 먹었어야 했는데. 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 도서관에 출근하던 나의 일과를 떠올려본다. 가서 만화책 한시간. 공부 시작 후에는 수학 문제집 찔끔. 과학 찔끔. 논술찔끔. 하다가 뭐했는지 모르고 돌아옴. 이 효율로 그때 공부를 했으면!
세번째 느낀 점. 내가 진짜 ADHD 맞는건가? (무한반복의 의심 속 가끔 드는 확신) 이렇게 약발이 잘 받다니? 그것도 지금 베이비용량이라고 했는데. 남편의 말이 진정 맞았단 말인가?
네번째 느낀 점. 그러나 이건 마법의 약은 아니구나. 내가 약을 열배를 먹고 집중력이 미친듯이 생긴다 해도 글 실력이 느는건 아니구나. 고등학교로 돌아가서 약을 먹는다 해도 과학이나 수학을 잘하진 않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앞에서도 묘사했듯이 머릿속의 투명한 방울들이 자꾸 커져서 머리를 맑게 해주는느낌은 사실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게 '기분좋은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기분이 좋은 느낌하고는 분명히 다르다. 만약에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면 내가 아침마다 열심히 찾아 먹지 않을까. 커피 마시듯이? 커피 마시는건 안 잊어버리고 매일 찾으니까 말이다.
<Dr. Hong과의 짧은 대화>
나 : 여보. 이 약은 딱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진 않아. 머리는 맑아지는데. 일의 능률은 확실히 오르고. 그런데 왜 기분이 좋아지진 않는거지? 나빠지는건 아니지만
남편 : 아. 나 백불 때문에 혈압올라.
나 : 대답해봐.
남편 : 기분이 좋아지려고 먹는 약은 아니니까. 좋아지는 사람도 있고 나빠지는 사람도 있어.
나 : 머리 맑아지는 거랑 기분하고는 상관없나봐
남편 : 우울증이 심한 사람에게 이 약을 쓰면 단기적으로 좋아지는 경향이 있긴 해.
나 : 그런데 여보. 나 ADHD맞나봐.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약발이 잘 받을 순 없는거지? 아닌가?아니어도 공부할 때 먹으면 누구나 효과를 보나?
남편 : 아니. ADHD없는 사람이 먹으면 능률이 오른다기보다는 부작용 생길 가능성이 더 많아
나 : 근데 강남에서는 공부 잘하는 약으로 막 먹는다잖아. 시험기간에. 그건 대부분한테 효과가 있다는거 아냐?
남편 :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 근거 없을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나 : 여보 생각이야 사실이야?
남편 : 내 생각에
나 : 의사가 그것도 모르고 '내생각에'라고 하면 어떡해
남편 : 정상인한테 (ADHD가 없는) 그 약을 먹이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하는 그런 실험은 가능하지 않아. 비윤리적이니까.
나 : 그럼 그런 연구결과가 없는거야?
남편 : 내가 알기론 없어
나 : 확실해?
남편 : ADHD가 는 사람한테 복용시키는 경우는 처음에 약을 만들었을 때, 그 약이 부작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야 하니까 실험을 할 때만 가능해. 그런데 그것도 안정성만 평가할 뿐 그 약이 효과가 있는지는 검사하지 않아. 대신 그 약이 남용되었을 때의 부작용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많아.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나 : 아하. 알겠어.
남편 : 아. 100불. 이렇게 맨날 줄줄 새는 돈이 너무 많아. 정말. 내일 꼭 약 먹어.
나 : 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