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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호수 Feb 13. 2024

고 서경식 작가님을 추모하며

어느 재일조선인의 죽음을 추모하며


지난 2023년 12월 19일. 서경식 교수가 별세했다. 별세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여전히 서경식 교수의 책 몇 권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소식을 몇 달 전, 서경식 교수의 책을 낸 출판사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작고하실 줄은 몰랐기에 황망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서경식 교수는 사실상 현실에 존재하는 그의 실재. 가 아니라 책 속에서 존재하는 실재. 였기에 내겐 크게 와닿을 것이 없기도 했다. 글 속에서, 책 속에서 어짜피 작가는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어제와 다름없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저자서경식출판창작과비평사발매2002.02.05.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책 속에서 그의 죽음은 또한 점점 더 느껴지기 시작했다. 꽤 많은 작품을 남긴 서경식 작가이기에 읽지 않은 다른 작품, 다른 강연 목록을 종종 찾아보곤 한다. 몇 개는 남겨두고 천천히 찾아읽는 즐거움을 일부러 맛보기도 했다. 아직 창창하실 나이이니 적어도 10년 20년은 더 작품활동을 하시겠구나 더 많은 목소리를 세상에 남기시겠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갑작스레 찾아들곤 하는 것이다. 새삼스레 그의 작품 목록이 소중해지며, 작가의 부재를 느끼게 된다. 이제서야 진짜 '추모의 글'을 쓰는 이유이다.


쓸쓸한 마음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인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주문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저자서경식출판반비발매2024.01.19.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경계인.

소수자.

이방인.

평생을 이런 수식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인식해온 서경식 작가. '수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구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원래는 모어여야 할 언어(조선어)를 이미 박탈당하고 과거 종주국의 언어를 모어로 해서 자라났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좀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고 이전에 갈기갈기 찢어진 동포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번민의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언어의 감옥에서> 가운데



                              <언어의 감옥에서>저자서경식출판돌베개발매2011.03.28.



하고픈 말을 인간의 언어로 백프로 전달할 수 없다는 데에서 인간은 모두 어쩌면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그러나 유난히 발달한 언어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모어를 박탈당한 죄로 평생을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나라'의 언어로 '조국'의 동포에게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던 작가에게는 더더욱 '언어의 감옥'이 숙명적으로 모순된 감옥이었을 것이다.언어라는 것은 무릇 역사, 문화, 사람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서경식 작가의 인생 자체가 모순이라는 감옥에 갇힌 삶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어쩌면 그는 이제서야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시절부터 평생을 정체성과 싸워오며 그 과정을 치열하게 글로 남긴 서경식 작가. 그 절망과 혼란은 형들인 서승, 서준식의 서대문 형무소 투옥으로 더 절정을 이루었고, 그는 개인적인 절망에 갇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부르짖는다.

세상의 소수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유없는 증오와 전쟁의 대가에 대해서, 남겨진 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한다. 그들의 고통과 기억에 연대하자고.


<시는, 문학은, 역사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시의 힘> 가운데



        <시의 힘>저자서경식출판현암사발매2015.07.05.



다만 자신의 역사와 개인적인 스토리에 머물지 않고 그는 시선을 들어 모든 소수자와 디아스포라들을 이야기한다. 그가 프리모레비, 파울 첼란 등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책을 쓰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식민주의와 국가주의를 벗어나 더 큰 '정의'를 구현하기를 바랐고, 끊임없이 <고통과 기억의 연대>를 부르짖었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기억의 투쟁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 기억의 투쟁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미술도 예술도 근대 국민국가로 들어서면서, 또 전쟁이라는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 기억의 투쟁에서 많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런 예술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타자의 고통이라든가 기억의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또 한 번 깊이 생각하셔서 지금껏 있어 온 표현 수단이라든가, 상투화된 문장을 넘어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 투쟁에서 이겨 내야만 한다는 지혜로운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중에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저자서경식출판창비발매2006.12.01.



       <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저자서경식출판철수와영희발매2009.01.26.



<나 자신도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로부터 "왜 귀화하지 않으세요?"라는 질문 - 그것도 선의가 담긴 - 을 받고 당황한 경험이 적지 않다. 이 물음에 나는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에 저항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답한다.>

<언어의 감옥에서>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 식민주의. 디아스포라. 소수자. 재일조선인. 홀로코스트. 시오니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과 박해. 고통과 기억의 연대.... 과거 식민지로서 오랜 세월을 박해받았던/ 우리 나라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서경식 작가는 우리가 단순하게 기억하고 있는 '피해의식'이나 '식민지주의' 등을 넘어서 더 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역사와 기억의 연대가 되기를 바라고 주장한다. 결국에는 그가 말하듯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다.



<이 일련의 글들에서 내가 다룬 화제는 다양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장을 들자면 그것은 '국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국민주의'란 사람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분할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부당한 차별에는 무관심한 듯 처신하면서 자신은 '국민'으로서 국가의 비호 - 그것은 또한 구속이기도 하다 - 를 받는 걸 당연시하고 의심하지 않는 심성을 가리킨다. '국민주의'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머조리티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 있다. >

'디아스포라의 눈' 중에서




        <디아스포라의 눈>저자서경식출판한겨레출판사발매2012.03.05.



그는 말한다. 끊임없이 이렇게 질문하는 자신에게 혹자들은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한다고.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물을 수밖에 없다고. 양쪽 사회에서 모두 고립되고 외롭다고 느끼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 온 서경식 작가.


<이토록 부당한 상황에 대해 이토록 당연한 주장을 하는데 대해 왜 리버럴하고 양심적인 일본 국민 다수는 침묵하고 늘 방관자로 머무는 걸까. 바로 그것이 내가 지난 20여 년간 끊임없이 던져온 의문이다. 나는 이제 슬슬 내 나이에 걸맞게 고독에 침잠하며 이런 글도 그만 쓰는 게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기에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눈> 중에서



      <디아스포라 기행>저자서경식출판돌베개발매2006.01.16.



향년 72세.

일생을 경계인으로서

길을 헤맸던 서경식 작가.  


그럼에도 감사한 일이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외침은,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글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에게 여전히 질문한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당연한 것을 다시 묻는다.

누가 그 기억을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기억의 투쟁에 우리는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중에서



그의 질문은 오랫도록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를 맴돌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질문을 받아 또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을지라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것만이 서경식 작가가 남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고 서경식 작가님을 추모합니다.   



* 서경식 작가님의 책을 읽고 싶다면

'시의 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내 서재 속 고전'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먼저 추천한다.



https://brunch.co.kr/@jjamlim52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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