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에 300만원하는 AMAN의 리조트를 다녀와서.
트루먼 쇼 라는 영화가 있다.
어쩌면
1998년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학부모가 되고 나서
올해 처음으로
다른 학부모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나는 폐쇄적인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나라는 사람은
인맥을 넓히기 위해
MBA를 하겠다는 의지보다는
MBA를 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MBA를 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한 편이다.
새로운 인물이
나의 인생이라는 영역에 들어올 구멍이
거의 없는데
아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나와 다른 인물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멋진 사람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들 투성이인 사람도 많았고
조금은 죄송하지만
막장드라마에서 나오는
개차반 같은 사람들마저
좆밥으로 만드는
참 후진 사람들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어떤 명품을 가지고 있는지 기억하면서
내 얼굴은 기억 못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알아내려고 안달이 난 사람도 있었다.
아,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
아이들이 한 학기를 같이 보내면서
늘 평화만 있지는 않았으리라.
누구는 누구를 괴롭히기도 했겠고
누구는 누구에게 잘난 척을 하기도 했겠지.
그런 일들을
알게 되는 부모도 있지만
아이가 집에 와서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이라
허허허 웃고 넘어갈 수밖에는 없다.
허허허 웃지 않으면?
고소를 해야 하나?
하지만 허허허 웃지 못하고
하나하나 다 따지고 넘어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선생님,
땡땡이가 우리 아이에게 이랬다고 하네요"
"슝슝이 어머님,
땡땡이가 우리 아이도 괴롭혔지만
슝슝이도 괴롭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제가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땡땡이가...."
이런 행동을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잘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아이들끼리 일어난 일은
아이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제일 쉽고
간단하고
깔끔하고
평화롭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어른이 개입하는 순간
모든 일은
확장이 되고
복잡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것.
그렇다고 내가 오은영도 아니고
"너무 사소한 것까지
부모가 다 해결하려고 하는 건
안 좋은 것 같아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오은영 박사가 그렇게 말한들
들리겠는가.
{시팡, 니 애가 안 당했다고
쉽게 이야기하니?}
라고 오히려 욕이나 먹지 않을까.
다시 트루먼 쇼로 돌아와보자.
트루먼의 인생은
너무나 평화롭기 그지없다.
모두가 트루먼을 사랑하고
트루먼을 보면 환하게 웃는다.
트루먼을 모르는 사람도
사실은 트루먼을 알고 있고
신기하게도 트루먼이 모르는 사람도
트루먼의 마음을 어찌 알고
그를 배려하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은 진행된다.
물론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긴 하지만
대부분 호의적이다.
부부 싸움을 하는 와중에
핫 초콜릿의 장점을 읊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땐 웃겼고
두 번째 봤을 때에는 소름 끼쳤고
세 번째 봤을 때 부터는 기분이 더러웠다.
어쨌거나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아주 평화롭고 완벽하다.
완벽했다.
누군가 트루먼을 괴롭히려 하거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주변에서 해결해 주거나
또는
"그건 옳지 않아!"
"그건 너무나 위험해!"
라고
조언해 준다.
어떤 시선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너무나 완벽하다.
그런 완벽한 인생이 사실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꽤나 소름 끼친다.
한 인간의 인생을
조작하고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하여
스스로를 가두게 했으면서
완벽한 세상이 아니었냐고 말할 때.
끔찍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완벽한 세상이었던 건
어떤 시선에서 보면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참 신기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 또한
가끔은
우리 아이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그 사람을 부숴버리겠다
는 생각을 할 때가 있긴 했으니.
물론 마음속으로만.
부글부글 거리고
개빡칠때가 있지만
내가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모른척하려고 한다.
아는척할 순 있지만
내가 평생 따라다니면서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척하는 거지
내가 바쁘고 무심한 엄마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부글부글 거리는 모든 일에
과하게 개입한 부모를
본의 아니게 보았다.
처음에는 정의감 있어 보였고
용기 있어 보였다.
그러다가
다른 부모에게도 연락해서
정해놓은 답지에
근거를 얻으려고 하는 모습을 봤을 때
후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다는 생각도
위협감을 준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저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평생을 저렇게 행동해도
별문제가 없었으니
저러는 거겠지라고 생각이 들면서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그러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의 스튜디오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개입을 해도
결국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음, 전문용어로 말하면
변수가 너무나 많고
그 변수를 하늘에 있는
그 어떤 신도 예상할 수 없다.
AMAN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사실 이런 비싼 리조트는 처음이었고
국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리조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쉬어야 하는지
배운 적은 없어서
새벽의 새소리와 물 흘러가는 소리와
적막함이 너무 어색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새로운 환경에
빠른 적응 쌉가능!
제일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조식을 먹으러 다녀와도
수영장을 갔다 와도
산책을 다녀와도
필라테스를 다녀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방 청소를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나갔다가 들어 오기만 하면
이불 정리가 되어있었고
번데기처럼 벗어놓은 옷이
이쁘게 잘 정리되어 있었으며
세수하거나 손 씻고 쓴 수건들은
치워져 있었고
새로운 수건이 이쁘게 포개져
체크인하고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에 씻고 나가면서
분명히 샴푸를 썼는데
찰랑찰랑하게
샴푸를 꽉 채워두었고
바닥에 먼지도 청소되어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시설은 별거 없지만
{물론 시설도 좋긴 하다}
서비스가 최고여서
아만 정키가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쯤
남편한테
"나에게 필요했던 건
이불 정리와 청소와 수건 빨래였나 봐.
나갔다 올 때마다
이불 정리가 되어있고
청소가 되어있고
수건 빨래가 되어있는 게
이 리조트의 최고 장점 같은데?"
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CCTV 같은 게 있는 거 같아.
우리가 일정한 시간에 나가는 게 아닌데
나갈 때마다 와서 청소를 해주잖아?
아마 CCTV 같은 걸 보다가
방에 사람이 다 나간 걸 보고
그때 우리랑 안 마주치게 와서
청소를 다 해놓고 가는 것 같아"
"우와.
트루먼쇼네?"
"어? 하하.
뭐 따지고 보면 그렇네"
어떤 개입이
상대방에게 필요할 때도 있고
필요 없을 때에도 있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을 때도 있고
조금은 필요할 때도 있다.
상황마다 다르고
그래서 정답이 없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너무 안심이 되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참 끔찍한 말이다.
트루먼이
And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라고 하며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을 때
다른 채널에서는 뭐 하지?
말하는 타인들이 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당연히
자극적인 사건이 재미있고
조미료 팍팍 친 음식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매일 이런 일들만 경험하고
이런 음식만 먹을 순 없다.
우리의 인생은 일회용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이어지니까.
트루먼쇼와
AMAN,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내 생각의 고리의 고리는
트루먼쇼와 AMAN을 연결시켜버렸다.
그건 아마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거짓말처럼 읽히고
그래서 내가 아는 누군가가
빳빳하게 이불 정리를 매번 해주고
또,
섬유 유연제의 인위적인 향이 아니라
질 좋고 두꺼운 면으로
촘촘히 짜인 수건에서 나는
자연스러운 수건 향기가
나의 일상인 것처럼 당연하게 준비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10년쯤 주부로 살아본 나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부정할 수는 없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