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의 과제 공동체와 신뢰
놀이터의 탄생 기원을 살펴보겠습니다. 과거에 놀이터가 따로 있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놀이터는 15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규제가 느슨한 환경에서 어린이들은 생활영역 모두가 놀이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정나이가 되면 귀족을 제외하면 바로 노동을 했습니다. 통합된 생활구조 안에서는 놀이터는 따로 필요가 없습니다. 온 마을 곳곳에 빈틈과 구멍이 있었고 그곳은 모두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놀이터의 등장 시기는 기계 산업혁명으로 차량 전차가 등장하면서 거리가 위험해졌다는 인식과 시작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영국 등에서 프뢰벨 등 선구적인 교육자의 운동과 더불어서 최초의 놀이터가 생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환경문제와 더불어 도로와 거리가 위험하다는 인식은 어린이들의 활동을 실내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이 안전사고비율은 어린이가 보내는 절대 시간의 양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주택과 같은 실내에서 어린이를 보호할 때 자신의 신체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어린이는 신체감각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시와 거리는 위험하다는 믿음이 어린이들의 신체를 실내 환경으로 몰고 이는 다시 높은 주택 실내사고 비율로 드러나는 이상한 역학관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거리와 사회에 대해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이 충분하지 않을 때 육아는 고비용의 케어서비스를 통해 프로그램을 돌리 는 방식으로 어린이의 신체 활동 범위를 제한하게 됩니다. '신뢰'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마을에서는 육아는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김연금 박사는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라는 책에서 핀란드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어린이 이동성과 어포던스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포던스(affordance)는 행동유도성입니다. 예를 들면 뽑기 장수가 초등학교 후문에 자리를 펴면 어린이가 몰려듭니다. 어린이는 볼라드를 보면 타 넘고 싶어 합니다. 경계석이 일렬로 놓여 있으면 어린이는 외다리 타기를 꼭 하고 싶어 합니다. 어린이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도 활동을 유발하는 어포던스가 풍부한 환경을 <삐삐 롱스타킹>의 저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으로 "빌러비 마을" 모델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빌러비 마을은 놀이터가 가득한 마을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이동성과 어포던스가 풍부한 통합된 마을 환경입니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종일 뭐 하고 놀까를 고민합니다. 마을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고 그리고 그 마을 환경은 모두가 이 어린이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 장난에 골머리를 썩는 어른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게 이 어린이들의 성장을 격려하고 돕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GDP가 우리나라처럼 드라마틱하게 성장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 어르신들은 현세대 어린이들의 나약함과 배부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기성세대 어르신들은 이러한 '빌러비 마을'처럼 통합된 환경을 누리셨다는 점에서 저는 지금 세대 어린이보다 위험했겠지만 훨씬 건강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론해 봅니다. 어쩌면 그 어른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저력의 배경에는 이런 통합된 마을 환경에서 배고팠음에도 건강하게 놀면서 자랐던 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권정생의 <몽실언니>에서도 한국전쟁 후 기구한 삶을 산 한 소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격한 시대 속에서도 고아 같은 삶을 사는 몽실이에게는 따뜻한 이웃 할머니와 정 많은 언니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레딧사이트에서 해외 각국에서 겪은 곤란한 일을 나누는 흥미로운 썰 중에 '스웨덴 게이트'라는 글이 회자된 적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친구집에 놀러 갔는데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놀러 온 친구는 방안에 두고 엄마랑 친구만 저녁을 먹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친구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스웨덴 게이트'의 요지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법과 제도가 잘 갖추어진 선진복지국가일수록 지역공동체가 스스로 도우며 문제를 해결할 일이 없기 때문에 환대에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법과 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않는 나라일수록 문제가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고 어디서 도움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익명의 방문객에도 친절을 베푸는 것이 훗날 있을지 모르는 재난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가 잘 갖추어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해지면 불필요한 금지와 제제 장치들이 늘어나고 한 아이를 기르는데 고 비용사회가 됩니다. 방과 후 아이가 남아 있는 학교 근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가득 찬 곳으로 간주하는 정책들은 일상생활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돼! 하지마!로 점철된 시설과 도구들은 어린이의 창의성과 상상력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특정 소수만 놀이운동을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지역 공동체가 함께 이 '신뢰의 거리'라는 숙제를 풀지 않으면 모험놀이터도, 놀 권리 운동도 소수의 유별난 사람들의 잔치로 끝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특별한 어른들에게 영웅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어린이들의 이름을 전부 다 모르더라 도 '대충 눈에 익은 아이들이다.' 이 정도 관심만 있어도 됩니다. 아이가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물어봐주고 연락해 줄 수 있는 이러한 상식적인 따뜻한 환대가 있는 거리가 그 어떤 편의 시설로 가득 찬 어린이 청소년 환경보다 더욱 안전한 환경입니다.
저는 유럽여행하면서 트램을 이용하며 참 편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더 신기한 건 스스로 근처 매점에서 일주일별로 정기권을 사고 개표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영국의 기차 월정기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트램 운전자의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고 시민들은 이 트램이라는 사회적 공공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마땅히 비용을 지불하고 이를 일일이 검사하지 않습니다. 가끔 부정기적으로 검사해서 만일 표를 사지 않고 무임승차한 것이 들키면 가차 없이 페널티를 부과합니다. 유럽시민들은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상황 자체를 대단히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만일 이런 정책을 도입했다면? 벌써 생각 만으로 결과가 예상되시는 가요? 불명예보다 당장의 몇만 원의 이익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많을까요? 지하철 공사와 버스회사들은 바로 도산하게 될까요? 왜일까요? 우리나라 시민들의 근성이 특별히 나빠서 일까요?
우리나라 시민성에 대해 조금 변명해 보자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신호등이 너무 많은 환경에서 자라 온 것 같습니다. 가! 가지 마! 해! 하지 마! 의 조항들이 빽빽한 환경에서 스스로 무언가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숙고하고 성숙할 여유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교육의 과정안에 너무 많은 신호 등을 세워놓고 어린이 스스로 자신의 몸과 환경을 통제하고 위험을 감지하고 안전하게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이러한 상호성의 시민 감각을 충분히 기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무런 신호등이 없을 때 우리나라 시민은 자신의 속도의 이익을 위해 무한대로 속도를 높이는 시민이 많을까 아니면 주변에 짐승이나 교통약자가 튀어나올까 신경을 곤두 세우면서 상호감각 레이더를 극대화시키며 천천히 달리는 시민이 많을까? 상상으로 시뮬레이션해봅니다. 이렇듯 어린이 놀이에서 출발한 질문은 이러한 상호책임의식과 민주시민역량과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에 대한 가치철학과 불과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신호가 없는 도로에서 한 운전자가 교통 약자를 실수로 치었을 때 신호 등을 세우지 않은 국가에 책임을 미루고 부주의한 보행자를 비난하고 운전자 자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지 못한 것에게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회피하려는 시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는 더 촘촘한 신호등을 세우는 방식으로, 보험회사는 약관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자사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