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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최형욱 Aug 10. 2023

무용하고 무상한 놀이

놀이란 무엇인가? 놀이의 정의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놀이에 대해 유명한 사상가들이나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한 가지 통일된 입장이 있다.  바로 놀이에는 목적이 없다는 점이다. 즉 놀이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특히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카이와는 놀이의 주요 요소들을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중 하나로  라틴어로 알레아(Alea), 즉 요행이나 우연성을 놀이의 문화적 특징 중 하나로 꼽았다.  알레아적 놀이들은 근본적으로 운을 시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노력과 능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긴장과 흥분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러한 흥분은 뇌에 아주 강한 도파민은 분비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중독되기 쉽다. 대표적인 알레아 놀이는 도박, 주사위, 카드게임 등이 있는데 이는 현대의 주식, 보험과  매우 유사하다. 


놀이는 무목적적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놀이가 끝나고 나면 무로 돌아가고 다시 시작하면 제로 zero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놀이의 알레아적 성격은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어떠한 부를 창출 하지도, 가치를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단지 부의 위치만 바꿀 뿐이다. 애초에 놀이의 성격이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어른의 경제활동의 신성함을 옹호하는 입장에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은 그렇게 모인 자본이 기업의 생산과 투자에  흘러들어 가 보다 많은 일자리와 가치 재투자를 만들어 내기에 매우 생산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입장이다. 물론 100프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주식으로 자본이 모인 다음에  기업의 입장에서 발생하는 일을 설명하는 목적론적 설명이다. 투자에 뛰어든 그 개인 입장을 현상적으로 살펴본다면 어쨌든 주식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순 없고 그 과정에서 우연과 요행의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첨단 자본시장이라 할지라도 개인에게는 기본적으로  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닌 부의 위치를 옮기는 도박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내가 사회에 기여했다는 충만감을 느끼면서 주식을 하는 개인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보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못다 한 사회 안정망을 민간 자본회사가 보험상품으로 판매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많은 가입자들의 돈을 모아 기업에 재 투자도 하고 불행한 상황에 처한 가입자를 보상해 준다는 긍정적 의미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보험의 기원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가입자의 불행을 두고 판돈을 거는 도박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내가 암에 걸릴지 안 걸릴지를 두고 얼마의 판돈을 건다. 그리고 내가 기한 내 암에 걸리면  판돈의 몇 배를 보상받는 게임이다. 반대로  평생 암에 안 걸리면 오랫동안 납입한 판돈은 날리거나 원금의 손해를 보는 구조이다. 사실 가입자 입장에서는 중대 질병에 걸리나 안 걸리나 지게 되는 게임이다. 생각해 보자. 혹여 운 좋게(? ) 중대 질병에 걸려서 막대한 보상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를 행운이 라고 마냥 신난다고 할 가입자가 있을까?  이는 애초에 두 계약자 사이에 비대칭적 출발선을 가지고 있다. 


일견 첨단 자본주의 상품이 사회에 큰 기여를 하는 생산적 일이라고 비칠 수 있으나 그것의  놀이의 알레아적 성격을 대입해서 보면 생산보다는 운명과 운명을 시험하는 도박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임 참가자 사이에서 손해를 보느냐 손해를 주느냐의 제로섬 게임이다. 즉 어른들의 진지하고 생산적인 일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기여한다는 말 이면을 면밀히 살펴보면 잡히는 실체가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엇을 생산하는가? 무엇을 마케팅하는가? 어떤 가치와 기호를 소비하는가? 우리는 정말 필요해서 그 일을 하고 있을 것일까? 


어린이의 놀이는 어떠한가? 놀이는 무엇을 생산하고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일인가? 이런 맥락에서 대입해 보면 딱히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는 어린이들의 놀이는 설사 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즐거움과 현재적 몰입과 기쁨이라는 효용성까지 생각하면 어른의 일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의 놀이를 억지로 합리화시키려는 욕구를 느낀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설명한다. 잘 노는 어린이가 창의적이고 공부도 잘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놀이의 과정에서 협응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조작하고 발명하고 운명을 시험하고 신체적 활용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간성의 성장과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효용성이 놀이의 출발점은 결코 아니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열광하고 중독되는 것, 자기 자신을 탕진할 때까지 모든 것을 쏟아붓는 놀이의 재미는 어른들의 진지한 자본주의 게임과도 일맥 상통 하는 일이다. 아이들의 놀이라고 결코 유치하지 않으며 어른들의 놀이라고 결코 고상하지 않다. 


어른들이 어린이의 놀이를 별로 시답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어쩌면 전쟁 후 어려운 시절을 빠르게 통과해야만 했던 개발도상국의 과도기적 운명 때문일 지도 모른다. 역사를 살펴보고 인류의 문명사와 문화사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삶과 문화 자체가 놀이성 그 자체인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놀이의 스케일과 수단과 그 결과 짊어지게 되는 무게가 다를 뿐 근본적으로 어른들의 일은 어린이의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른과 어린이 모두 각자의 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내가 어른들이 말하는 진지한 일과  어린이가 하는 유치한 놀이 사이의 이분법적 경계를 계속해서 뒤 흔들고자 하는 이유는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 우리가 시도하는 진짜 이야기에 대해서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 인류는 오랫동안 노동과 놀이가 뒤섞여 있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하위징아의 주장 데로 문화라는 것 자체가 놀이 안에서 발생하였고 놀이와 문명자체는 불과분의 관계에 있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뇌에 최상의 도파민을 분출하는 최고의 놀이이었다.  채집기술과 사냥기술, 전쟁, 마상술, 기사도,  창술, 검술,  문장가들의 풍류와 시 짓기 놀이, 농업의 노동요, 농한기의 민속 공예작업, 법원의 송사 등 단지 생존을 위한 투쟁과 노동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중세 성당을 짓는 일과 석굴암, 다보탑, 무영탑을 만든 석공의 일은 단지 노동이 아니라 어떤 저 너머의 신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생산과 효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코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과 노동과 놀이가 한데 뒤섞여 있었고 문화의 발생은 놀이적 특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이 둘을 철저히 구분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움직임을 관절하나하나 분석해서 최상의 효율적인 움직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제거한 테일러리즘,  장인처럼 생산의 총체성을 잃어버리고 노동자를 거대기계의 부품으로 소외시키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그리고 시간 검열장치들, 출퇴근 카드, 비대면 재택근무 시 마우스 10분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회사에 보고되는 관리 시스템 등 관리하고 감독해서 비효율성을 모두 제거하고 생산력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모두 근대 산업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놀이는 죄악시되고 쉬지 않는 근면한 노동과 생산은 신성시되는 이분법적 구분이다.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즐거운 마술성을 허용하는 자세이자 총체성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에 반응하며 발생하는 생산 활동 중에 놀이 적이지 않은 일은 없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예외적으로 전쟁포로나 죄수, 노예에게 시킨 강제 노역은 전혀 놀이적이지 않았다. 


나는 현대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회사의 일이 즐겁지 않은 이유와 칼퇴근과 휴가와 연차에 목메는 이유는 아마도  현대 시스템 안에서 노동의 형태가 과거에 인간성을 소외시킨 강제부역의 형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놀이의 총체성과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강제 부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은 회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 것이다. 노동은 노예상태와 동의어이고 최상의 상태는 경제적 자유와 노동으로부터 독립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놀이 안에서 노동하고 노동 안에서 놀이하도록 오랫동안 자연 안에서 그렇게 반응하며 살아왔다. 사실 탈피 해야 할 것은 살아 있는 놀이로서 노동이 아니라 인간의 정념 제거한 체  개인을 소외시키고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극대화하려는 하는 구 시대적 노동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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