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비저블 맨
‘식상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것’과 ‘익숙한 재미를 새롭게 각색하는 것’은 얼핏 보면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목적에서 분명 다르다. 전자가 앞에서 진행된 작품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거라면 후자는 익숙한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표현이다. 물론 두 가지 방향 모두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관객들을 찾아가는 목적은 다를지라도 제각기 또 다른 재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1897년 출간된 H.G.웰스의 <투명인간>은 소재가 주는 독특한 재미를 넘어 그 속에 많은 무거운 주제를 안고 있었다. 과학적 상상이 만들어내는 질문,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인간성의 접근을 통해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다른 이들의 눈치 없이 마음대로 행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소설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단절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마냥 즐길 수만도 없는 공포를 스스로 형성시킨다는 점에서 대중의 관점보다 본인의 측면에서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여기에 리 워넬 감독은 또 다른 시각 하나를 첨가시켰다. 영화 <인비저블 맨>(2020)은 투명인간 본인에 대한 이야기보다 쫓기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 분)의 입장을 비추지만, 단순한 공포보다는 그녀가 겪는 내적 갈등과 심리 변화에 좀 더 주력했다. 그녀를 둘러싼 독특한 환경이 주는 신비감은 재미를 안겨주는 덤이다.
영화는 세실리아가 남편 애드리안(올리버 잭슨 코헨 분)으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애드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통제하려 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이자 이와 동시에 세계적인 광학전문가이기도 하다. 어렵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드리안이 자살했고 그녀에게 거액의 상속금을 남겼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잠시나마 행복에 사로잡힌 그녀에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영화의 제목에서도 비추듯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는 거다. 오직 그녀만이 느끼는 알 듯 모를 듯한 공포는 그녀의 주위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관객들은 이때부터 그녀를 두고 진실 공방에 빠지게 된다. 실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 혹은 그녀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망상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시디어스>(2010) 시리즈와 <직쏘>(2017) 등에 대한 제작 참여로 공포물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일가견을 보였음은 물론, <업그레이드>(2018)와 같이 SF를 주제로 한 공포에도 탁월한 실력을 보였던 바 있는 리 워넬 감독답게 이 영화에도 최첨단 공포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해져있는 소재를 관객들에게 새롭게 전달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탄생시켜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로부터 다가오는 공포심을 유발시킨 바 있는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할로우 맨>(2000)과는 또 다른 해석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가져오는 공포를 넘어 이 존재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의 심신을 흔들어대는 ‘공포’에 집중하기보다 그 공포가 만드는 사람들의 심리 변화, 여기에 적절한 긴장감을 형성시키는 스릴러 요소, 그리고 러닝 타임 내내 끌고 왔던 주인공의 공포를 한 순간에 뒤집어버리는 마지막 반전까지. 리 워넬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재미를 놓치지 않게끔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마치 누군가를 엿보는 것 같이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는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때로는 좌에서 우로, 때로는 앞에서 뒤로 카메라는 물 흐르듯 이동하며 관객들에게 빈 공간에 대한 공포를 이끌어내고자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갑작스레 등장해 관객들을 놀래게 만드는 시청각 효과 대신에 공간이 안겨주는 ‘여백 효과’에 공포감을 집중시켰다는 점이다. 만약 여기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처럼 사운드 효과를 전적으로 배제시켰다면 그 공포심은 배가 됐을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소설 <투명인간>은 사람들과의 단절된 소통으로 스스로 하나의 괴물이 된 채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마는 한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여기에 <할로우 맨>은 보이지 않는 능력에 자만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원초적 심리에 집중했으며,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투명인간의 사랑>(1992)은 어릴 적 누구나 꿈꿨던 투명인간의 능력에 행복을 느낀 것도 잠시, 자신이 가진 모든 자유와 행복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채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잃어버린 아픔에 슬퍼하는 주인공의 불행에 메시지를 모았다.
그리고 이 영화 <인비저블 맨>은 중반까지만 해도 <할로우 맨>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지만, 그보다 잇따른 공격으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심리 변화와 학습 효과에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이 재미있는 부분은 무엇보다 중반까지 이끌고 가는 관객들과의 소통에 있다. 실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자가 스스로 망상에 빠져 심리적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관객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도 드러냈고 중반 이후 솔직하게 펼쳐놓았듯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모든 걸 드러내 보인 채 관객들과 재미난 줄다리기를 시도한다.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 것 같음에도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할수록 이상하게도 무리한 액션과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이쯤 되면 리 워넬 감독의 연출은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관객들과 심리적 줄다리기를 지속할 새도 없이 세실리아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보다 싸워 승리를 쟁취하기를 원했다. 여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액션은 아주 잠깐이지만 관객들에게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관객들은 이 천하무적의 존재와 그녀가 어떤 마무리를 지을 지를 놓고 흥미진진하게 스크린을 지켜봐야하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보여준 반전은 관객들 스스로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결국 감독이 원했던 스포트라이트는 애드리안이 아닌 세실리아였다는 사실 말이다. 새로운 다크 유니버스의 형성을 위해서는 후속작을 세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존재감이 부족했던 애드리안을 그대로 이끌고 가기보다 <에일리언>(1979)의 리플리(시고니 위버 분)처럼 하나의 여전사가 되어 고독한 싸움을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는 여지도 마련하고 말이다.
영화는 익숙한 소재를 놓고 새로운 유니버스 형성을 위한 새 의상과 새 무대를 마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이 그리는 새로운 미래를 관객들에게 선사하기 이전에 제대로 된 문을 열어젖혔다는 생각이다. 물론 소설 <투명인간>과 같이 깊이 있는 고찰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로 인한 사회성 결여, 사람들 사이에서의 소통 부재 등 다룰 수 있는 다양한 부분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단지 유니버스를 확장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에 꼭 무거운 주제를 얹어놓아야만 영화의 색깔이 제대로 입혀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영화는 그 목적과 방향에 알맞게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야 비로소 영화답기 때문이다. 깊이보다 확장성이 주는 넓이에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영화, <인비저블 맨>이었다.